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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의 긴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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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4,914회 작성일 07-07-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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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럼 내리는 남포동 구두방 골목, 카바이드 등불을 켜고 점을
봐주는 보살네가 항상 몇 분 계시다.
(요즘은 배터리에 연결한 꼬마 전구촉으로 바뀌었다)
낡은 한복에다 왼손에는 염주, 길 바닥에는 관상이나 당사주 보는 책들이
늘려져 있다. 운명을 봐주는 책에는 울긋불긋 동양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태고운 여인이 도포와 갓을 쓴 남정네에게 술을 따르거나
수양버들 나무 아래 장원 급제를 하여 나귀타고 고향에 내려오는 남자
부뚜막 한 곁에 옷고름을 훔치며 울고 있는 아낙네
그런 그림 들이 카바이드 불빛에 어렁거린다.
인생이 그런 그림들 처럼 펼쳐질수 있을까.
이상하게 점 봐주는 이런 보살님네들의 얼굴을 흘깃 보면
그들의 파란만장한 운명이 어떻게 펼쳐졌을까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박복한 인생, 미간이 좁아 관운이 없으니 서방 덕이 흐릿하고,
인중이 짧으니 명이 국수가락처럼 늘어지다 툭 끊어지고,
광대뼈 툭 불거져 나왔으니 모진 험로 돌아서도 귀인상 못만나겠네.
아, 서러운 인생 저도 몰랐는데 남 아린 가슴 속 쏙쏙 꼬집어 낼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오늘 일진이 사나운지 손금 한 번 봐달라는
사람도 없이 게슴추레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졸고 있다.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다리 아래
불빛만 무심히 흔들리고
나도 산대 젓가락을 뽑고, 쌀알도 던져보고, 꽃에게 말도 걸어보고,
아기 소리내며 사탕 한 알 달라고 울어보고 싶었다.
그 날 바람이 불어 사주 책갈피가 펄럭이듯 넘어가고
카바이드 불빛에 반사되어 어리는 얼굴들, 누구의 얼굴이였을까.
천변만화의 만다라 그림 속에서도 또렷히 보이는 하나의 얼굴.
희미하게, 흐릿하게 다소곳히 우는 듯 웃는 듯,
그림 속의 한복입은 여인의 얼굴 처럼.
불빛따라 흔들리는 옛 사랑의 긴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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