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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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8.♡.163.119) 댓글 0건 조회 7,072회 작성일 07-10-01 13:58본문
■ ‘깨달음’ ‘도’를 일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시민운동’의 격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곤 한다.
반대로 ‘시민운동’적 고민과 실천에만 몰입되어 있는 이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의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이 그 중의 하나이거나,
이 양자사이의 화해의 어려움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고민해 본적이 있다면,
이의 분석을 시도하는 아래의 ‘지루하고’ ‘딱딱하며’ ‘장황한 글’ [포용과 비판]을 애써 살필 필요가 있다.
포용과 비판
1. 두부류의 인간
흔한 표현으로 ‘덕’이 있는 이들은 사람들을 잘 품는다.
직면하는 사안을 (흔히 말하듯)현명히 처리하면서
상대방의 입장과 감성을 잘 살피면서 갈등과 분열 없이 잘 조율하곤 한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없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내면의 문제에 신중한 고민을 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비심’한 이들이다.
(노장자, 석가, 예수의 믿음을 따르며 ‘자기수련’에 집중하는 이들.)
반면 ‘비판력’ ‘투쟁력’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관점의 특성은 직면하는 ‘부조리’ ‘부정’에 맞선 직접적인 해결이다.
그러하기에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집중과 타격을 통해 ‘분열’과 ‘갈등’을 고조시키기도 한다.
이들은 대체로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예민하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의 완성보다는 사회의 문제 해결에 집중해 있다. (시민운동가 등)
이 두부류의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평등과 평화, 자유, 행복’ 등이 어우러진 그것이지만,
삶에 대한 관점과 가치, 행위는 정 극단을 취한다.
이들은 서로를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하며 소통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성찰’과 ‘사회운동’이라는 이 양자의 존재경향은 인간의 의식이
안으로(자기수련) 향할 것인가? 밖으로(사회문제) 향할 것인가?의 차이.
즉 양극단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스팩트럼 상에 존재하는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인간의 ‘전체정신’상의 문제임으로 하나의 ‘통합’된 시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양자(자기수련/사회변화)의 ‘팽창’과 ‘균형’을 통해서 사회가 긍정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쇄퇴하고 붕괴하게 된다.
2. 사회균형모델
이의 설명을 위해서 극히 단순화한 ‘사회균형모델’을 하나 제시한다.
전체인구는 100이다.
그 중에서
내면의 성찰에 집중한 ‘자기수련’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10명이고,
사회변화에 관심을 가진 ‘시민운동가‘ 10명이고,
없는자와 약자를 내리누르는 ‘사회부정세력’이 20명이고,
나머지 일반 대중이 60명이 라고 하자.
그리고 1. 자기수련자와 2. 시민운동가를 하나로 뭉쳐서 ‘사회긍정세력’이라고 편의상 정리하자.
----- 정리 ----------------------------------
A. 사회긍정세력 - 1. 자기수련자 (10명)
2. 시민운동가 (10명)
B. 사회부정세력 (20명)
C. 일반대중 (60명)
* 편의상 여기서의 ‘사회긍정’ ‘사회부정’의 기준은
없는자-약자를 ‘대변하느냐? 착취하느냐?’로 하기로 한다.
** ‘자기수련자’를 ‘사회긍정세력’으로 포함한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비우며 자기 수련 노력 자체가 ‘없는자-약자’를 위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고, 그러한 낮춤과 비움의 문화 자체가 ‘없는자-약자’를 착취하려는
사회부정세력의 힘을 ‘간접적’으로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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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모형에서
A. 사회긍정세력과 B. 사회부정세력은 서로간의 힘의 대립-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의 세력다툼을 통해서 자기 자신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짖는다.
3. 사회긍정/부정세력의 대립
A. 사회긍정세력 과 B. 사회부정세력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경험해온 ‘약자와 강자와의 대립’을 통해서 수 없이 살폈다.
A. 사회긍정세력이 우위에 있을 때는 B. 사회부정세력이 힘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반대의 관계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 세력의 한편이 ‘절대화’되지는 않는다.
인간 내면에 긍정과 부정, 사랑과 분노, 생의의지와 죽음의 의지가 공존하듯이
이의 사회적 현현인
‘사회긍정세력’과 ‘사회부정세력’은 끝없이 서로에 대해 대립 갈등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가 강화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가령 A. 사회긍정세력 30 B. 사회부정세력 10 이거나
A. 사회긍정세력 10 B. 사회부정세력 30 일 수 있지만,
A. 사회긍정세력 40 B. 사회부정세력 0 이거나
A. 사회긍정세력 0 B. 사회부정세력 40 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각각의 세력은 자체적인 노력이나, 상대세력과의 대립과정에서의 영향에 따라서
그 규모가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한다.
4. 사회긍정세력의 균형의 붕괴
문제는 ‘1자기수련자’ ‘2시민운동가’의 균형이 현격하게 깨트려졌을 때
A. 사회긍정세력의 힘의 약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갑의 상황
'1. 자기수련자‘를 20명
’2. 시민활동가‘를 0명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을의 상황
'1. 자기수련자‘를 0명
’2. 시민활동가‘를 20명으로 만든다면
사회긍정세력의 힘이 현격히 약화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갑의상황의 경우,
만약에 ‘자기수련자’만 20명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0이 된다면,
사회는 ‘사회부정세력’의 뜻대로 움직여지면서 사회적인 약자들(60명의 대중)은
끝없이 짖 밟히고 착취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자기수련자’들의 특성상
그들은 직접적인 사회부정에 대해서는 나서서 맞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자기수련자’ 20여명은 ‘그에 아랑곳 않고’(세상이 어찌 돌아가던 말던)
평안한 마음으로 일관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험난하고 흉폭한 사회 현실 속에서
더욱 고감도로 자기수련을 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60여명의 대중이 착취를 당하면서 고통 받는 것에는 대체로 ‘비심’(무심)한 체로...
물론 그들 ‘자기수련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간접적인’ 사회정화효과가 있음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부정세력’이 그들 유리하게 만들어내는 사회제도, 법체계, 교육, 문화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끼는 ‘자기수련자’들의 특성상
전반적인 사회는 점점 더 부정하게 흘러가게 된다.
이번에는
을의 상황을 예 들어보자.
‘시민운동가’가 20이고
‘자기수련자’가 0이라면,
‘사회부정세력’과 맞설 힘이 좀 더 강화되면서 사회적 정의는 좀 더 세워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에 따른 증폭된 ‘갈등’과 ‘분열’로 인해서 인간의 삶은 현격히 건조하고 황량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스스로를 추려갈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외부의 대상(자본과 권력)에 대한 투쟁만 일삼는 이들이 만들어낼 사회에는
극도의 황량함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투쟁력 있는 활동에 의해서 사회제도, 법체계, 교육, 문화 등이 없는 자와
약자를 위해서 재편되기는 하겠지만,
내면의 통찰과 자기자신과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가짐이 동반되지 않는
따라서 이 양자 간에는 ‘균형’이 맞춰져야할 필요가 있다.
5. 사회긍정세력간의 균형 비율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비율’이 맞춰져야 하는 것인가?
우선 그 ‘균형’이라는 것은 양자를 정확히 반절로 나눈 균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한정된 20명이 투입되는 사회긍정세력의 힘은
시대적 상황에 맞게 우선순위를 두고 비율의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
가령 사회부정세력의 힘이 강화되어 직접적인 사회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면,
1. 시민운동가의 비율을 높이면서 그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을 해야하고,
사회부정세력의 힘이 좀 약화되거나 덜 호전적으로 바뀌는 상황이 되면,
2. 자기수련자의 비율을 높임으로 사회의 전반적인 건강성을 증진시켜야 한다.
6. 사회긍정세력간의 갈등
문제는 세력 간의 연대를 통해서 ‘사회부정세력’에 대응해야할 사회긍정세력 간에
전혀 소통이 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때로는 ‘반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자기수련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내 마음만 비우면된다’ ‘자아를 버려라’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류의 주장만하면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나서서 움직이는 ‘시민활동가’들의 활동을 ‘폄하’하면서
‘그렇게 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이나 잘 다스려라’는 따위의 조언만을 일삼는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비우고 ‘득도’한다고 해서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의 고통까지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인지할 필요조차를 못 느낀다.
왜냐하면 이들 대부분이 말하는 ‘해탈’ ‘득도’ ‘영생’의 진수는
실질적인 세상의 문제와 관계를 끊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석가와 예수가 그리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마치 사회문제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만 비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고 있다.
이는 ‘주관적인 관념론’ ‘주관적 낙관론’의 소치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자신들과 같이 산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여기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러할 것 같으면 어떠한 사이비 종교가 말하는 세계도 참으로 이상사회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택한 믿음의 길에 정진하기는 하되,
그 반대세력(사회부정세력)이 항상 상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지해서
시민운동가의 격렬한 활동의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배타성은 ‘시민운동가’에게도 나타난다.
시민운동가는 ‘자기수련’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수련’분야의 숙고가 인생에 주는 무수한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
일명 시민운동을 한다고 나서던 이들이 자기 내면에 발생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에 포섭되어 변심하는 경우...
조직 내부의 끝없는 질시와 분열...
시민운동성의 특성으로 인해서 반대되는 세력(사회부정세력)의 힘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켜주는 특성은
시민운동가들이 그들의 삶에 ‘자기수련’의 노력을 접목하지 못한 결과이다.
전적으로 그러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화 해서 설명하자면,
‘자기수련자’들이 세상을 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만 끝없이 시야를
집중시키는 이들이라고 한다면, ‘시민운동가’들은 자기의 문제는 살피지 않고
외부로만 끝없이 시야를 확대시키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은 같은 스팩트럼 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 간에 그 극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상대방의 존재가 그렇게 이질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 양자를 조율하고 통합해서 사회부정세력에 적절히 맞설 힘을 길러야 사회는
보다 건전하게 발전될 수 있다.
7. 응용사례
(인간사랑과 에티켓)의 문제에 대한 활동성을 가진 YMCA류의 활동가들과
(직접적 사회부조리에 대한 투쟁)을 행하는 일반 민중단체들은 서로 ‘심정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특별한 사안을 통한 활동의 연대도 좋지만,
서로가 긍정적 세상을 위해 각자의 입지에서 활동하며 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음을 ‘심정적’으로 느껴야 한다.
YMCA류의 활동가들이 일반시민운동가들을 비판하는 것이나,
일반 시민운동가들이 YMCA류의 활동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예외는 있다.
첫째, 서로의 조직들을 긍정할 자세가 안 된 이들은 그것 자체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가령 YMCA 류의 활동을 하는 이들이 시민운동가들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이 YMCA류의 활동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양자의 힘이 하나로 합해져야 사회의 건전성이 확보되는 힘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 대한 이유만으로 비난 받아도 마땅하다.
둘째, 타성에 젖어서 일방적 활동의 방향만 고수하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가령 앞서와 같이 사회긍정세력간의 비율 균형 에 맞게 ‘사회긍정의 힘’이 재편되어야 하는데,
직접적인 처리 사안/투쟁이 필요한 사회적 부정-부조리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YMCA류의 활동만 하거나,
사회적 갈등현안이 없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투쟁과 공격성을 고조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투입되는 기회비용의
비효율과 역효과를 초래하여 사회의 건강성을 헤치기 때문에도,
이러한 상황을 읽어내지 못하고 ‘자기만족’에만 빠진 활동을 하는 것은
냉철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자’의 활동이 동일한 스펙트럼 선상의 활동임을 이해하고 조율하고 통합하기 위해서,
기존의 사회운동(성)/시민운동(성)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이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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