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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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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알로하 (125.♡.204.124) 댓글 0건 조회 7,106회 작성일 14-02-2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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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Guru)이란 말은 흔히 넓게 사용되어, 영적인 도움말을 주는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라고도 하지만, 슈리 라마나는 이 말을 상당히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승이란, 진아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진아 깨달음(Self-realisation)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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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 라마나는 종종 신, 스승 그리고 진아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스승은 인간의 형상을 한 신(God in human form)이며, 동시에 모든 헌신자(devotee)의 심장 속에 있는 진아이기도 하다. 스승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므로, 그의 힘도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외부의 스승은 가르침을 주며, 헌신자로 하여금 진아에 그의 주의를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고 내면의 스승은 헌신자의 마음을 그 근원으로 끌어당겨 진아 속으로 흡수하고, 마침내 그것을 파괴해 버린다.
 

진아의 영원한 자각을 향해 노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이, 슈리 라마나의 가르침 상에서 하나의 기본 항목이다. (수행자의) 영적인 발전에 있어서 스승의 촉매적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진아에 대한 무지가 워낙 뿌리깊어서 수행자 개인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슈리 라마나가 비록 진아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스승이 꼭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는 또한 스승이라고 해서, 힘써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진아를 발견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할 때에는, 스승의 은총과 힘이 자동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을 때에는 스승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스승의 본질과 (제자가) 진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스승의 역할에 대한 슈리 라마나의 견해들을 요약한다. 슈리 라마나가 그의 힘을 사용한 특유의 방식에 대해 서는 제9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 문 ] 스승의 은총(Guru's grace)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제자를) 진아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까?
[ 답 ] 스승은 진아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고 자기가 가진 것들로써도 만족하지 못할 때, 신에 대한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정화되어 신을 알고자 하게 되고,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만족시키기보다는 그의 은총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그때 신의 은총(God's grace)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신은 스승의 형상을 하고 그 헌신자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나아가 그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그러면 헌신자의 마음은 강해져서 내면으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명상에 의해 더욱 정화되어 작은 물결 하나도 일어나지 않게 고요해집니다. 그 고요한 세계가 진아입니다.
스승은 외부적이면서 동시에 내면적입니다. 그는 밖에서 마음을 안으로 향하도록 밀어 넣습니다. 또 그는 안에서 그 마음을 진아 쪽으로 끌어당기고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이 스승의 은총입니다. 신과 스승과 진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 문 ]신지학 협회神智學協會(Theosophical Society)에서는 그들을 인도해 줄 스승들을 찾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 답 ] 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명상은 스승이 외부에만 있다는 무지한 관념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스승이 그대가 기다리는 어떤 딴 사람이라면 그는 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잠시 지나가는 존재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진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는 한, 외부적인 스승도 필요하며 그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자신을 육체라고 여기는 그릇된 동일시가 사라지면, 스승은 다름 아닌 진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문 ] 스승은 전수傳授(initiation)를 통해 저희들이 진아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까?
[ 답 ] 스승이 그대의 손을 잡고 귓속말이라도 해줍니까? 그대는 스승도 그대와 같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자신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도 역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대에게 뭔가 구체적인 것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내면에서, 즉 영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 문 ]스승을 어떻게 찾습니까?
[ 답 ] 내면에 있는 신은 그의 은총으로, 그를 사랑하는 헌신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헌신자의 발전 정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나툽니다. 헌신자는 스승을 한 인간이라고 여기고 두 육신간의 어떤 관계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 또는 진아의 화신(God or the Self incarnate)인 스승은 내면에서 그의 일을 하며, 헌신자가 그의 수행 방법상의 오류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마침내 내면의 진아를 깨닫게 합니다.
 

[ 문 ] 참스승(sadguru)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답 ] 진아 안에 항상 안주하며, 언제,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문 ] 여러 가지 길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 답 ] 그에게서 그대가 평안(shanti)을 얻는 이를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 문 ] 그의 가르침도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 답 ] 열렬한 구도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지시하는 사람은 진정한 스승이 아닙니다. 구도자는 이미 자신의 행위들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으며 평안과 휴식을 원합니다. 다른 말로, 그는 자신의 행위들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만약 가르치는 이가 그에게 그의 행위들에 추가하여 아니면 그 대신에, 어떤 것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구도자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행위는 창조입니다. 행위는 자신의 본래적인 행복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만약 행위를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는 스승이 아니라 살인자(killer)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창조의 신(Brahma)이나 죽음의 신(Yama)이 스승을 가장하고 끼여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사람은 구도자를 해탈시킬 수 없으며, 그의 속박만 가중시킬 것입니다.
 

[ 문 ] 저는 제 스승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 답 ] 집중적인 명상으로써 찾을 수 있습니다.
 

[ 문 ] 스승이 바로 자신의 진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자가 아무리 많이 배웠고 어떤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스승의 은총 없이는 진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는 가르침의 본뜻은 무엇입니까?
답: 절대적 진리의 견지에서 보면 스승의 상태가 자기 자신[진아]의 상태이지만, 무지 때문에 개인(jiva)이 되어버린 자아로서는, 스승의 은총 없이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 또는 성품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 문 ]스승의 은총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답 ] 그것은 말과 생각을 넘어서 있습니다.
 

[ 문 ]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은총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 답 ] 그것은 마치 코끼리가 꿈속에서 사자를 보고 (놀라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가 사자를 보자마자 깨어날 수 있듯이, 제자도 스승의 자비로운 은총의 눈길에 의해 무지의 잠에서 진지의 깨어있음(wakefulness of true knowledge)으로 깨어날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 문 ] 진정한 스승의 성품은 바로 지고의 주主(sarvesvara)의 성품 그것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답 ] 우선, 신의 상태 또는 진지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인은 부단한 헌신을 수행합니다. 그의 헌신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 개인을 지켜보아 온 자로서 또한 그와 동일한, 주主가 나타납니다. 그는 그의 세 가지 본질적 속성인 존재-의식-지복(sat-chit-ananda)의 도움 하에, 형상과 이름까지 우아하게 갖추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를 축복하는 듯이 하면서 그를 자신의 안으로 흡수합니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스승은 진정 주主로 불리는 것입니다.
 

[ 문 ] 그러면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스승 없이 진지를 성취했습니까?
[ 답 ] 소수의 성숙된 사람들에게는 주主가 형상 없는 지知의 빛으로 나타나서 진리의 자각을 전해줍니다.
 

[ 문 ] (자기에게) 맞는 스승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스승의 진면목(swarupa)[성품 혹은 진정한 형상]이란 어떤 것입니까?
[ 답 ] 그대의 마음이 동조同調하는 이가 그대에게 맞는 스승입니다.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이 스승이며 그의 진면목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평온, 인내, 관용 그리고 그 외의 덕德이 있어야 하고,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그의 눈만으로도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하며,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덕목을 갖춘 이가 진정한 스승이지만, 그대가 스승의 진면목을 알려면 먼저 그대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참된 성품을 모르고서, 스승의 참된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스승의 참된 성품 또는 형상을 알아내려고 하면, 먼저 이 우주 전체를 스승의 형상(Guru rupam)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대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속에서 스승을 보아야 합니다. 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는 모든 대상을 신의 형상(God's rupa)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진아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의 진정한 형상 혹은 스승의 진정한 형상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의 진정한 형상과 성품을 아십시오.
 

[ 문 ] 그것을 알기 위해서도 스승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 답 ] 맞습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그대의 마음이 동조하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그대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대의 스승입니다.
 

[ 문 ] 해탈(liberation)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스승의 은총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답 ] 해탈은 그대 바깥의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내면에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벗어나기를 갈망하면, 내면의 스승은 그를 진아 안으로 끌어당기고 외부의 스승은 그를 진아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것이 스승의 은총입니다.
 

[ 문 ] 어떤 사람들은 당신께서, 스승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마하르쉬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 답 ] 저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 문 ] 슈리 오로빈도(Sri Aurobindo)나 그 외 다른 분들은 마하르쉬님의 경우에는 스승이 없었다고 합니다.
[ 답 ] 그것은 무엇을 스승이라고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스승이 꼭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닷따뜨레야(Dattatreya)에게는 지地, 수水 등 5대 원소를 포함한 스물 넷의 스승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스승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오직 스승만이 지성과 감각 지각의 밀림(jungle)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스승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 문 ] 저는 인간으로서의 스승을 의미합니다. 당신께는 한 분도 없었지 않습니까?
[ 답 ] 저에게도 한때 언젠가는(前生에는) 스승이 있었겠지요. 또 저는 아루나찰라에 대한 찬가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스승이 무엇입니까? 스승은 신神이며 진아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면 신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그의 필요에 맞추어 이런저런 형상, 즉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닌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그를 자신에게로 인도합니다.
 

[ 문 ] 한 스승에게 헌신하면서 다른 스승들을 존경할 수도 있습니까?
[ 답 ] 스승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의) 힘이 약한 한, (스승이) 힘을 받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 문 ]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는 '스승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 답 ]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깨달은 뒤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으나 그 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 문 ] 슈리 바가반께서는 저희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 답 ] 도움은 항상 있습니다.
 

[ 문 ] 그러면 질문을 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저는 항상 있는 그 도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 답 ] 순복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 문 ] 저는 항상 스승님께 귀의하고 있습니다. 바가반께서는 저희들이 따를 얼마간의 가르침(upadesa)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데 사는 제가 어떻게 도움을 받겠습니까?
[ 답 ] 참스승(sadguru)[존재와 하나가 된 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 문 ] 제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참스승이 필요합니다.
[ 답 ] 참스승은 내면에 있습니다.
 

[ 문 ] 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스승을 원합니다.
[ 답 ]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스승이 자기는 내면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문 ] (수행의) 성공은 스승의 은총에 달려있지 않습니까?
[ 답 ] 예, 그렇습니다. 그대의 수행 자체가 그러한 은총에 기인하지 않습니까? 그 결실은 수행의 결과이며 그것에 자동적으로 뒤따릅니다. {해탈정수解脫精髓}(Kaivalya)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1:86). '오, 스승이시여, 당신은 항상 저와 함께 계셨고, 여러 생을 통해 저를 지켜보셨으며, 제가 해탈할 때까지 저의 길을 정해 주셨습니다.' 진아는 필요한 때가 되면 외부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렇지 않으면 항상 내면에 있으면서 필요한 일을 합니다.
 

[ 문 ] 쉬르디 사이 바바(Shirdi Sai Baba)의 어떤 제자들은 그의 사진을 숭배하면서 그것이 그들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신으로 숭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그들의 스승으로 숭배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 답 ]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집중을 확보합니다.
 

[ 문 ]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느 정도 집중하는 훈련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을 위해서도 스승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 답 ]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국 스승(Guru)이란 집중(guri)을 의미할 뿐입니다.
 

[ 문 ] 생명 없는 사진이 어떻게 깊은 집중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깊은 집중은 그것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스승을 필요로 합니다. 바가반 같으시면 아마 살아 있는 스승 없이도 완전에 도달하시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 답 ]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생명 없는 사진을 숭배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음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구에 의해 자신의 진아를 알지 못하면 그러한 집중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 탐구를 위하여 스승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 문 ] 스승은 자신의 어떤 힘(power)을 제자에게 전해줌으로써 제자가 진아를 깨닫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 답 ]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승이 깨달음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의 장애물들을 제거할 뿐입니다. 진아는 항상 깨달아져 있습니다.
 

[ 문 ] 진아 깨달음을 구함에 있어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
[ 답 ] 그대가 진아 깨달음을 구하는 한 스승은 필요합니다. 스승이 진아입니다. 스승을 진정한 자기(진아)로 보면 그대의 자아는 개인적 자아입니다. 이 이원성의 느낌(sense of duality)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무지의 소멸입니다. 그대에게 이원성이 지속되는 한 스승은 필요합니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스승도 역시 하나의 육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육체가 아니며 스승 또한 육체가 아닙니다. 그대는 진아이며 스승 또한 진아입니다. 이러한 앎은 이른바 진아 깨달음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 문 ] 어떤 특정인이 스승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답 ]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마음의 평안과 그대가 그에게 느끼는 존경심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 문 ] 만약 그 스승이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믿었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 답 ] 각자가 그의 복력福力(merits) 나름입니다.
 

[ 문 ] 제가 스승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답 ] 은총은 항상 있습니다.
 

[ 문 ] 그러나 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 답 ] 순복하면 은총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문 ] 저는 심혼心魂을 다해 순복합니다. 저는 제 양심을 누구보다도 잘 판단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은총을 느끼지 못합니다.
[ 답 ] 만약 그대가 순복했다면 그런 의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문 ] 순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의문이 일어납니다.
[ 답 ] 은총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판단은 가변적입니다. 다른 어디에 잘못이 있겠습니까?
 

[ 문 ] 한 분 이상의 스승을 모셔도 됩니까?
[ 답 ] 스승이 누구입니까? 그는 결국 진아입니다. 그 마음의 발전 정도에 따라 진아가 스승으로서 외부적으로 나타납니다. 옛날의 이름난 성인聖人 닷따뜨레야(Dattatreya)는 자기에게 스물 넷 이상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뭔가를 배우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스승은 닷따뜨레야의 경우처럼 때때로 무생물(inanimate)일 수도 있습니다. 신, 스승 그리고 진아는 동일한 것입니다.
영적인 마음의 소유자는 신이 일체에 두루하다고 여기고 신을 그의 스승으로 삼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어, 신이 그를 인간의 모습을 한 스승과 만나게 해주면, 그는 그 스승을 전부 중의 전부(all in all)로 알고 섬깁니다. 마침내 그는 스승의 은총에 의하여, 그의 진아가 실재이며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진아가 곧 스승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 문 ] {슈리마드 바가바드 기따}(Srimad Bhagavad Gita)에서는 '순수 지성으로써, 스승에 대한 봉사로써, 그리고 탐구로써 진아를 깨달으라'(4:34)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 답 ] '이슈와라와 스승과 진아는 같다'(Iswaro Gururatmeti) 하였습니다. 그대에게 이원성의 느낌이 존속하는 한, 그대는 스승이 그대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승을 찾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대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그대는 지견知見(insight)을 얻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아를 향하도록 함으로써 지고의 진아지를 그에게 내려주는 분이야말로, 진아인 신의 형상이라고 진인들이 칭송하는 위없는 스승(supreme Guru)입니다. 그에게 매달리십시오. 스승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그대는 그의 은총을 통해 태어남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그대가 진아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진아로서 확고하게 안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구원救援으로의 길에 발심하고 그 길을 확고하게 따르던 사람들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때때로 그 길(베다적인 길, Vedic path)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들은 항상 스승의 말씀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진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그대가 만약 신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것은 스승이 바로잡아 줄 수 있지만, 그대가 스승에게 범한 잘못은 신이라고 해도 바로잡아 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드물게 강렬하고 넘치는 사랑이 있어, 스승이 던져주는 은총의 눈길에 대해 완전한 믿음을 갖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없을 것이며, 그는 이 세상에서 뿌루후따(Puruhuta)[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의 한 이름]처럼 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평안은, 참스승의 은총을 통해서 마음의 고요함을 얻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누구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그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일념(one-pointed mind)으로 이 은총을 구하십시오.
 

[ 문 ]바가반의 제자들 중에는 당신의 은총(his grace)을 받아 큰 어려움 없이 깨달은 이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은총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여자의 몸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 살기 때문에 제가 바라는 만큼 많이 그리고 자주 마하르쉬님 곁에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바가반의 은총을 간구懇求합니다. 저의 집에 돌아가서도 바가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바가반께서는 부디 저의 간청을 들어주십시오.
[ 답 ] 그대가 어디로 갑니까? 그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그대가 육체라고 가정한다 해도, 그대의 육체가 럭나우(Lucknow-북인도의 도시)에서 띠루반나말라이까지 왔습니까? 그대는 단지 차 안에 타고 있었을 뿐이고, 이런 저런 교통 수단이 움직여 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는 자기가 여기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대는 육체가 아닙니다. 진아는 움직이지 않으며 세상이 진아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대는 단지 그대 자신일 뿐입니다. 그대 안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여기를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뒤에도, 그대는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장면들만 바뀌는 것입니다.
은총으로 말하자면, 은총은 그대의 내면에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은총은 진아입니다. 그대는 은총의 작용으로부터 절대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은총은 항상 존재합니다.
 

[ 문 ] 제 말씀은 제가 스승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 제 마음이 더 강해져야 하고 또 스승님 쪽에서 어떤 반응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노력은 아무래도 너무 약해서 저 혼자 힘으로는 안됩니다.
[ 답 ] 은총은 진아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만약 그대가 바가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진아가 그렇게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미 은총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대 안에서 은총이 작용하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까? 그대가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은총의 징표입니다. 그것이 반응이고, 그것이 자극이며, 그것이 진아이고, 그것이 은총입니다. 그대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 문 ] 저는 외부의 도움 없이 저 자신만의 노력으로 제 스스로 더 깊은 진리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 답 ] 그대가 진아에 대한 탐구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은총의 한 나툼입니다. 그것은 내적 존재(inner being)이자 진정한 자기(진아)인 심장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그대를 끌어당깁니다. 그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가 진지하게 탐구해 들어갈 때, 깊은 내면에서는 은총이 움직입니다. 제가 은총 없이는 진정한 탐구가 없으며, 진아를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둘 다(노력과 은총) 필요합니다.
 

[ 문 ] 깨달음을 위해서는 스승이 얼마나 오래 필요합니까?
[ 답 ] 무지가 있는 한 스승은 필요합니다. 무지는 자기(진아)에 대하여 스스로 설정한 그릇된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신은 헌신자의 숭배를 받게 되면 곧장 그의 헌신에 꾸준함을 부여하여 그것이 순복으로 되게끔 합니다. 헌신자의 순복에 대하여 신은 스승으로 나타남으로써 그의 자비를 보여줍니다. 스승, 달리 말해서 신은 그의 헌신자에게, 신은 내면에 있으며 진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해줌으로써 그를 인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게 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 문 ] 은총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개인적인 노력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 답 ]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라 해도 진아가 저절로 분명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행복은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그 상태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노력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efforts) 또는 노력 없음(effortlessness)을 넘어서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 상태를 깨달을 때까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번이라도 그러한 지복을 맛본 뒤에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듭 시도하게 됩니다. 평안의 지복(bliss of peace)을 한 번 체험하고 나면, 아무도 그것 없이 살기를 원하지 않으며 다른 활동에 관여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문 ] 깨달음을 얻는 데는 신의 은총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도 생사 윤회(return to life and death)가 없는 그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까?
[ 답 ] 깨달음을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필수적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신神 깨달음(God realisation-자기가 신임을 깨닫는 것)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총은 진정한 헌신자 또는 탐구자에게만 하사됩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열심히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 문 ] (시간 공간적) 거리가 은총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 답 ]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항상 그대의 진아(은총) 안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어찌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 문 ] 라디오를 들을 때에도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이 먼저 듣습니다. 여러분은 힌두인(Hindu)이시고 저희들은 아메리카인입니다.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답 ] 없습니다.
 

[ 문 ]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남이 알기도 합니다.
[ 답 ]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문 ] 바가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겨 은총을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답 ] 그대는 목까지 물에 잠겨 있으면서 물을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것은 마치 목까지 물에 잠긴 사람이 목마르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물 속의 고기가 목말라 하는 것과 같으며, 혹은 물 자신이 목말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은총은 항상 있습니다. '스승의 은총 없이는 무착심(dispassion)도 얻을 수 없고, 진리 깨달음도 얻을 수 없으며, 진아 안에 내재함도 얻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행(practice)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진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사나운 황소를 맛난 풀로 꾀어서 우리 안에 가둬놓고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길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 문 ] 저는 최근에 어떤 따밀(Tamil) 노래를 접했는데 그 작사자는 자신이, 제 어미를 꽉 붙들고 놓지 않는 끈덕진 새끼 원숭이 같지 않고, 제 어미가 목덜미를 집어 물고 다녀야 하는 낑낑거리는 새끼 고양이 같다고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에게 자기를 보살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경우가 그와 꼭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연민을 가져 주셔야 합니다. 제 목덜미를 물고 계셔서 제가 떨어져 다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 답 ]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대 자신도 애써 노력해야 하고 스승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 문 ] 언제까지 스승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까?
[ 답 ] 왜 알려고 합니까?
 

[ 문 ] 희망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 답 ] 그러한 욕망도 하나의 장애물입니다. 진아는 항상 존재하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아가 되십시오. 그러면 욕망과 의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은총은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입니다. 은총이 진아입니다. 그대는 진아를 육체로 오인하기 때문에 스승도 하나의 육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승의 견지에서는 스승은 곧 진아일 뿐입니다. 진아는 오직 하나이며, 스승은 그대에게 진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진아가 그대의 스승 아닙니까? 다른 어디서 은총이 오겠습니까? 은총은 진아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진아의 나툼이 은총의 나툼이며, 은총의 나툼이 진아의 나툼입니다. (그대의) 이같은 모든 의심은, 그릇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진아의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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