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이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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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5,594회 작성일 07-11-06 14:20본문
어제 밤 꿈속에서 Yellow mawed라는 영어 단어를 보았다.
갑작스레 깨어나 꿈의 스토리는 희미해졌다. 그런데 'maw'라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단어이다. 모르는 단어가 왜 꿈에 선명히 보인 것일까.
내가 모르는 단어이다. 모르는 단어가 왜 꿈에 선명히 보인 것일까.
사전을 뒤적여 보았다.
maw n. 반추 동물의 넷째 위(胃); (새의) 멀떠구니; (드물게) 사람의 밥통;
목구멍, 입; (비유) 심연(深淵), 깊은 구렁.
목구멍, 입; (비유) 심연(深淵), 깊은 구렁.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참나' '본성'을 찾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부모미생전' '이뭐꼬'를 아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생각, 시간, 자아가 소멸된 의식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부모미생전' '이뭐꼬'를 아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생각, 시간, 자아가 소멸된 의식이라고 한다.
그럼 이것을 얻은 분이라면 '깨달은 분'일까?
이 지구 상에 '내가 무엇일까?'를 찾았다는 사람은 부지기수 인데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말한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본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이유가 아주 많나 보다.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말한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본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이유가 아주 많나 보다.
요즘 불교 쪽으로 깨달았다라는 분들의 사이트 몇 곳을 둘러 보았다.
뭐랄까. 깨달음의 구구단 공식으로 짜놓은 이음동의어의 집합소 같은 느낌과
나이도 많아 그들의 언어관이란게 이미 소통이 단절된 일방 통행식이다.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나이도 많아 그들의 언어관이란게 이미 소통이 단절된 일방 통행식이다.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직접 체험하여 안 것은 그래도 '무의식'의 세계이다.
본래 의식이였는데 무의식으로 넘어가 버린 것들도 있고
본래부터 있어왔었던 무의식도 있을 것이다.
또 무의식이였는데 의식화 되어 형질을 바꾼 것도 있다.
본래부터 있어왔었던 무의식도 있을 것이다.
또 무의식이였는데 의식화 되어 형질을 바꾼 것도 있다.
이렇듯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모호하다.
나는 간혹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이 무의식의 문이 잠시 열려
그것을 잠시 구경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그것을 잠시 구경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어떤 분은 자기의식의 욕망과 소망이 누적되어 오다가 어느 순간
무의식으로 사라졌었고, 이 무의식이 나중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투사해
주는 것을 그가 잠시 보게 되는 수가 많다고.
무의식으로 사라졌었고, 이 무의식이 나중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투사해
주는 것을 그가 잠시 보게 되는 수가 많다고.
이런 경우는 무의식의 자기환영 일 것이다. 자신이 감독 주연한 영화를
관객이 되어 보고서 감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객이 되어 보고서 감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식, 분별, 논리, 지각으로서는 무의식의 세계와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성질 자체가 바로 무의식의 억압 벽(wall)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성질 자체가 바로 무의식의 억압 벽(wall)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과 다른 구조 세계이다.
여기에 탐조등이나, X-레이선 투과나, 리트머스를 대어보는 행위가
바로 자유연상, 은유, 암시, 꿈의 해석, 명상, 최면 등이다.
바로 자유연상, 은유, 암시, 꿈의 해석, 명상, 최면 등이다.
이런 행위 조차도 고작 무의식의 존재, 에너지, 성질 만을 어렴풋히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안다는 것 자체도, 그것을 타파했다는 것 조차도,
그걸 훤히 비추어 보았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훤히 비추어 보았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람들은 어느정도 접속 했거나 하이퍼링크 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감출 '藏' 한 자를 A4 사이즈로 확대하여 벽에 붙여다 놓았다.
그리고 무의식은 내가 모르는 'maw'라는 단어를 꿈 속에서 비춰 주었다.
그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갈망을, 무의식의 또 다른 '나'가 '나'에게
보낸 전언 같이. '나'이면서도 도저히 정체를 알 수도 없는 '나'가
꿈 속에서 보내준 편지라 할까.
보낸 전언 같이. '나'이면서도 도저히 정체를 알 수도 없는 '나'가
꿈 속에서 보내준 편지라 할까.
그것은 해독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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