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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일상을 강화하는 종교인들(도인?)의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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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21.♡.28.104) 댓글 0건 조회 5,193회 작성일 07-10-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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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일상을 강화하는 종교인들의 삶에 대하여...


현대의 많이 쓰고 많이 소비하는 [대중소비사회]의

기반 자체가 인간 서로간의 갈등을 초래하고,

생태계의 붕괴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후손들의 절명의 원인임을 앞에서 논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증가해서 붕괴직전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혁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임으로,

‘각자’의 ‘현재적 노력’으로 이러한 대중소비사회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일상의 해체’를 논했었다.


이 ‘일상의 해체’는 대중소비사회적 삶에 저항하고

‘자기비움’ ‘자기낮춤’으로 귀결되는

주체적 고민과 실천을 동반하는 삶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석가모니를 스승으로 여긴 이들이 말하는 ‘해탈’(도)이나,

예수를 믿는 이들의 ‘영생’의 개념과 언듯 맥이 닿을 수 있지만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해탈과 영생을 위해서 법당과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상당수의 이들은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개인의 (영적)‘자유’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종교를 가졌다는 이들의 이러한 ‘편협한 개인성’(=>이기성)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후손들의 미래를 망가트릴망정 ‘현재적 편리’를

축소할 의지 없이, 대중소비사회에 잘 적응한 삶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더군다나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모든 사람을’ 복음화 하려는 전략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이기에

기존의 사회부조리와 모순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모두 보고 있다시피, 현대 한국적 기독교가 자본과 권력에 결탁해서

오히려 대중소비사회적 삶을 더더욱 지향하면서

‘생태’와 ‘후손’들에 대한 해악으로 작용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들의 ‘행태’는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부정’ ‘부패’ ‘부조리’ 를

점점 고조하고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악’의 근원으로서의 작용을 사회에 미친다.


대부분의 교회는 ‘부자는 천국가기 힘들다’ ‘이웃을 위해 살아라’

‘비우고 낮추라’는 이야기 등의 ‘공존’적인 삶의 메시지를

신도들에게 전하면서 신도들 각 개인이 예수의 삶을 본받고

각자의 생활의 장에서 적극적으로 나누고 비우며, 공유할 수 있는

‘주체적 일상’을 실현할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나를 따르라!’라며 ‘추종심’을 유도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릴 뿐이다’는 류의 공포감을 고조하며,

번번히 ‘집단행동’을 통한 감성자극(부흥회 같은)으로 신도들의 수를 불리고

교회의 규모를 확대할 고민 해대고 있다.

그들은 ‘주체’와 ‘개인’이 깨어나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설령 알더라도 그렇지 못하게끔 힘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와 개인이 깨어난다면 그들이 세워놓은

‘권력’의 지반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실로 그러했던 철저히 비움과 낮춤의 의지는 없고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기반한 성장과 확대,

승리를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그들 대부분 교회의 행태가

도무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파시즘 사회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러한 잡다한 논리와 이론,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서만

이 개탄스러운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절실한 기독교인들(불교도인) 대부분의 ‘일상적 삶’을

살펴봐도 이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절간이나 교회에서 그들이 믿는 대상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헌금하며 자신들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자부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짐으로

자기 자신을 부풀리려는 대중소비사회적 노력만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믿는 예수(석가)는

세상의 모든 재화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최고경영자의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의 인도에 힘입어 (설교/법회시간에)

예수와 석가의 손에 큰 재화(부자로 살수있는)와 권력(영생, 평안, 힘)이 쥐어진 것을 살필 뿐,

‘빈손’ ‘나누는 손’ ‘낮추는 손’이 어떻게 세상에 작용하면서

만물이 공평무사하게 다뤄지면서 공존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세상'이 이모양 이꼴인 것은 당연지사이다.

물론 모든 불교도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다 이러한 부조리로 일관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올바로 ‘도심’을 갖추고, ‘예수믿음’ 행위를 통해서 온전히 비우고 낮추는 삶을

사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사회문제’ 에 대해서 너무 ‘비심’한 나머지

자신이 얻은 혜안과 통찰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려하지 않는다.

그나마 자신의 일상에서 석가와 예수의 믿음을 실현하는 이들도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류의 주장으로,

사회적 현실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 온전히 깨여나면 된다’

관점을 정당화 시킨다.


이들은 자신이 ‘해탈’ ‘영생의 길’에 들어설 기회를 얻었음이

그 전대인들의 ‘사회적 노력’의 성취 결과인지를 파악하여,

‘후대’의 해탈과 영생을 위한 ‘사회적 지반’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필요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의 온전한 ‘해탈’과 ‘구원’을 위해서 충실히 노력할 뿐이다.


물론 이들이 세상의 문제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해탈’과 ‘구원’을 추구하는 삶만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사회적 성과를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앎’과 ‘생활’이 주위사람들에게 상당한 정화작용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힘으로 승화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상 '해탈'하고 '구원'받았던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세상이 계속 혼란스러웠던 것은
인간의 삶의 한 단면이 혼란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그리 '해탈'하고 '구원'받았던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감소시키는데 자신들의 해안과 통찰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도 크다.


쉽게 말하자면 그들의 이해와 통찰이 ‘대중소비사회’에 저항해

‘인류’를 해방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고,

그 개인의 해방만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대부분의 불교/기독교인들은 ‘일상의 부조리와 부정을 강화’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극소수만이 올바른 자기 낮춤과 비움의 길을 터득했으며,

그 중에서 다시 극소수만이 이러한 분위기의

사회적 확대(결국 자아의 확대)를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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