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 산청모임 후기 '진리는 삶의 모든 것속에 매순간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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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17.♡.178.162) 댓글 0건 조회 9,081회 작성일 19-02-11 12:56본문
●오늘 하루종일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봄이 온다고 하기엔 이르지만, 추우면 추운만큼 공기가 맑아 쨍한 느낌이 참 좋습니다. 마음껏 하루를 누리다 가는 축제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진짜로 원하는게 무엇인지가 제 눈에는 보입니다. 제가 이런 모습, 이런 환경속에서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환경속에서, 녹록지 않는 삶을 살아오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삶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 마음속에 바라는게 하나쯤 있게 되는데, 그 바라는 모습이 다 다르더라도 그 다른 것들속에 공통되는 바탕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속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원하는, 한번 밖에 없는 삶을 편안하게 살다 가고픈, 모든 생명의 속성이 만족스럽고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진실로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길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삶의 고통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영원한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정한 자유는, 노력과 애씀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는 것은 잠시 입술만 적실 뿐이고 또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미치겠어서 지리산을 찾아가서 책을 몽땅 읽었고, 책을 읽고서도 그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이 책에는 진리가 없구나 하며 다 태워버렸는데, 그러면서도 태우지 못한 책이, 태울 수 없는 책이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경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장이 있었고 그 말씀이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진리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름일 뿐이니, 여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라는 말도 엄밀히 말해 틀립니다. 거기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진리, 도, 우주자연의 이치, 하나님의 섭리...
생로병사, 누구나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고 있는 이게 진리입니다. 머리가 희어지고, 늙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져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줘야하고, 피부가 쪼글쪼글해지는 이게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화장실가서 볼일을 보는데 바로 해결하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기다리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는 이게 전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자연의 이치에서 제외되는 것, 현상이 있을까요? 이 모든 생로병사, 모든 현상이 우주자연의 이치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자연의 이치와 섭리가 이루어지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지금'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이 섭리가 나타나는 순간은 언제나 '지금'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순간 하나님의 섭리자체로 살고 있고, 모든 순간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자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어떤 한순간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실상인데, 왜 우리는 두리번 거리며 불만족속에 살아가는가? 진리의 좋은 점이 뭐냐면, 지금 이대로라는, 그래서 더 찾을 필요도 없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내가 나라고 믿어왔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이해가 오면 그것이 작은 틈을 만들고, 맹목적으로 믿어왔던 자신에 대한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따로 있지 않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우리가 이미 그것 자체인, 우리 삶을 보면, 일어나서 잠이 드는 순간까지, 그리고 꿈속에서까지, 우리 각자의 삶이 곧 도, 진리입니다. 오늘 아침 어떤 모습으로 눈을 뜨던, 속이 상해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그래서 새벽에 눈이 떠지고 숙취로 괴로워하는 그것까지, 내가 또 술을 먹었구나하는 후회까지, 진리는 매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이니까, 진리는 있는 그대로 이니까. 지금 이순간 일어나고 나타나고 경험되는 이대로가 몽땅 도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싫어,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것을 싫어합니다. 우주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은 없고, 늘 그것은 지금 이순간에 나타나는, 그런데 우리는 모양을 따라가면서 분별해 버립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 이대로 진리라는 것이 이해가 되면, 그 모양에 이름을 빼앗겨 되니 안되니 판단하고 분별하는, 이것보다 더 좋은게 있을거야하는....진실로 이게 이해되었다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에 어떤 작은 문제라도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경험하는데 그 경험에 물들지 않는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아닌 다른 것을 찾아가면서 '비로소' 불만족과 결핍이 생깁니다. 실제로는 불만족과 결핍이 없습니다.
모든 순간이 있는 그대로, 그런데 우리는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가면서 불만족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의 생각을 진짜로 착각해서 그 생각을 따라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 이해하나가 삶의 전부를 바꾸어 버립니다. 고칠 것이 없는, 이게 무위자연입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생각, 내 감정이다하면서 착각에 빠지고 그래서 고치고 바꾸려들면서 고통에 빠집니다.
●이게 모든 자연 그대로의 섭리라는게 이해가 되면, 삶의 모든 순간이 자연의 이치라면, 실제로 생각, 의도가 일어나고 행동을 하게되고 그것이 사라지는데, 생각은 내가 하는게 아니라 저절로 일어납니다. 생각을 가만히 지켜보면, 어떤 연결도 없고 중구난방입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고, 스스로 펼쳐지는데, 우리는 그 생각과 완전히 동일시해버립니다. 그렇게 몽상을 하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면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구나 자책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고 전개되어가고 또 거기에서 빠져 나오면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감정을 보면, 그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불안, 두려움, 우울함, 이 모든 것들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내 생각, 감정, 느낌, 제가 길을 걷는데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저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전부 착각입니다. '왈왈'하는 소리가 먼저 귀를 때립니다.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소리이고 그와 동시에 생각이 일어나면서 내가 듣는다고 착각합니다. '계란'이것도 개념이고, 오래전부터 배웠던 지식입니다. '파'는 여기에 '파'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이름을 떼보면 이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소리, 일차적으로 소리가 들리는데, 이와 동시에 생각이 일어나 '내가 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먼저 일어난 소리를 놓치고 개념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나'라는 착각, 몸이 가려우면 그 가려움을 인식하게 되고 동시에 생각이 일어나고 몸이 움직여 손이 나갑니다. 이게 저절로 됩니다. 이런 경험들속에는 '나'라는게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눈을 감고 다시 떠보면 '내가 본다'이전에 장면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가 없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 경험속에서 단 한순간도 '나'는 없고, 단지 기억, 생각, 개념이 작동할 뿐입니다. 그 개념과 너무나 동일시 되어있어 생각을 경험하면서 실재를 경험한다 착각합니다. 나라는 생각이, 인생의 주체, 경험의 주체로 '나'가 있는데, 이것은 허구인데, 그것을 진실로 여겨 진짜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힘겨움, 그 자체로 다 자연의 이치인데 내가 이것을 벗어나려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나'이전, 모든 순간속에는 '나'가 없는데, 이 '나'가 덮어버린 착각, 이런 삶을 모든 사람이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고프고 이 생각을 따라 의도와 행동이 일어나는데, 여기에 '나'가 그렇다는 착각을 하는데, 여기에 '나'는 없다는 이해가 오면, 삶을 좀더 깊게 들여다 볼 것이고 그렇게되면, 소리를 듣다가 감각되기 시작합니다. 발을 디딜 때 신발과 접촉되는 느낌, 덥다는 느낌, 시원한 느낌, 이 감각, 생각으로 빠지기 전, 그 감각 그대로 살아보면, 그래서 '나'가 없으면, 삶의 모든 경험이 '태초'가 됩니다. 언제나 처음입니다. 바람이 불어와서 피부에 닿는 이 느낌이 '아 시원하다'가 아니라, 그냥 그 느낌.....
<야단법석>
●이것은 아는 공부가 아니라 되는 공부입니다. 삶속에서 하나씩 해보는, 이렇게 해보면 머리가 아니라 삶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사소한 감정속에서 그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는 것, 그러면서 내가 오만했다는 것, 혹은 '내가 이렇게나 너에게 해줬는데하고 여겼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그러면서 그것들을 툭툭 놓게 되는......
사별하고 그 과정중에 삶이 참 힘들었을텐데, 그러고나서 세 아이들을 혼자 키워온, 그렇게 키우고 나서 아이들이 성장하고, 혼자있게되면서 더욱 삶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그게 참 좋은 신호입니다. 삶에서 자기가 감당하기 힘든 시기가 오면 또다른 힘이 생겨 그것을 이겨내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신을 많이 억압하게 됩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직장생활하면서 아이들을 혼자힘으로 키우면서 스스로 억압했던게 참 많았을텐데, 그 억압했던 것들이 비로소 올라온 것입니다. 삶을 감당하느라 억압당했던 그 감정이 비로소 올라온 것입니다. 비로소 당신의 억울함, 외로움, 그 생명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것들을 만나다보면 감당이 안되고 스트레스 받게 될 것입니다. 한방에서 명현반응이라는게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야 비로소 호흡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아이를 책임지기 이전에 한사람의 존재입니다. 지금 그 올라온 것은 치유되기 위한 것이고, 당신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 짜증과 울분을 만나주십시오. 그것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예전에 아이들을 키울당시의 기준으로 지금의 당신을 보면 모든게 뒤죽박죽의 모습이겠지만, 새롭게 경험하는 당신을 예전의 가치기준으로 누르지 말고, 그것을 충분히 경험해주면 됩니다. 그 새로운 나를 만나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내가 내 자신을 호흡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통해 자식들도 자신을 호흡하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자식을 키우기위해 자신을 늘 뒤에 놓았다가 이제 자신의 삶을 살면, 그것이 그대로 자식에게 전해져 자식들도 자기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은 아무런 이유없이 불안이 올라왔고, 그냥 웅크리고 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걸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경험이후로 다시 불안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허무감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기회입니다. 당신은 직장에서 일하고 몰입하는게 오히려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 허무감에 휩쓸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그것은 영원히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다시 옵니다. 당신이 만났던 그 불안과 마찬가지로, 티비를 끄고 인터넷을 끄고, 와라,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서 그 허무감을 제대로 한번만 만나면 됩니다. 그 허무에 저항하기에 힘들게 됩니다. 지금 찾아오는 그 허무감이 사랑입니다. 당신을 해방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허무감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것을 피하고자 궁색한 이유를 찾고 모면하려 합니다. 당신은 달아날 구멍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하고선 해결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번의 만남이 영원한 자유를 줍니다. 당신에게 뭔가 마음의 든든한 힘이 생긴, 그 바탕이 생겨난 것 같아 참 감사했습니다. 내가 애써서 만든 평화가 아니라 저절로 찾아온 평화, 그게 참 감사한데, 당신을 찾아온 그 공허감에 대해서도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부부싸움에서 남편의 행동에 대해 '유치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시는데, 그런표현을 통해 당신에게 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잘 보이는데,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자기안의 들보를 발견하면 상대방의 티끌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남편과 충돌의 순간이 있을 때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내안의 날선 칼날을 볼 수 있다면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틀을 볼 수 있다면...이렇게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는 나 자신조차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싸웁니다. 제가 참 치졸한데, 그게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생명입니다. 싸우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상대편이 나를 이해해주고, 상대편이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끝이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다면 상대편과 같이 설 수 있습니다. 사소한 감정에 대해서도 스스로 밝아진다면 그것이 스스로 홀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진리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다가온 강의였습니다.
3월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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