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무상,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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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20.♡.254.193) 댓글 0건 조회 7,813회 작성일 07-11-28 13:16본문
연기, 무상, 공
1. 불교의 중심교리의 역사
석가시대 이전까지 불교계에는 두 가지의 주도적인 입장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트만’과 같이 절대불변의 자아를 전제함으로 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과
정반대로 절대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생성한 후에 소멸하는 과정에 있고
그러한 끝없는 변화상에 있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허무하다고 하는 ‘단멸론’의 입장이었다.
이때 석가는 ‘연기법’을 들고 나타났다.
이 연기법은 사물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만남, 작용,
관계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아트만’의 절대불변성과 ‘단멸론’의 단절성을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정하는, 두 가지를 취하기도 하면서 취하는 것도 아닌 양자복합적인 개념이었다.
불교계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석가는 기존의 허무적이고 염세적인 불교철학을 새로운 국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학들은 다시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석가의 후학들이 만들어낸 ‘일체개고’의 개념, ‘업’의 개념, ‘불교적 인과론’의 개념 등은
다시 살아난 불교의 허무적이고 염세적인 개념들이었다.
이 허무의 늪으로 부터 불교 철학을 구해 낸 것은 기원후 2세기에 인도에서 태어난 ‘용수’였다.
(진은영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용수는 우선 불교적 시간관의 ‘인과관계’를 깨트렸다.
만약 보편적인 믿음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상정하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라고 주장한다면 이미 먼 미래의 일은 먼 과거의 일로 인해서 죄다 결정되어
버린다. 이는 한번 ‘업’의 굴레에 들어가게 되면(원인이 생기면) 결코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
도 그 업장을 제거할 길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인간의 삶, 생존 자체를 우울한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한 시간관에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자유와 선택도 주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용수는 이 시간관을 깨트리기 위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앞선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 것(인과관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나뉘어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작용한다’는 치밀한 논증을 구축한다.
여기에서 바로 ‘공(空)’의 개념이 등장한다.
석가의 연기법은 용수의 ‘공’ 개념을 통해서 ‘무자성’(스스로 있을 수 없음), ‘무상’(늘 변함)의 온전한
의미를 그 내부에 한껏 담을 수 있게 되었으며,
기존의 ‘고통’과 ‘허무’ ‘염세’를 한편으로 부추기던 불교사상에 저항할 탄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2. 퇴행
그 이후로 18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 사상 내에는 갖은 가치와 개념들이 새롭게
추가되고 재해석되었고, 각 나라로 전파되면서 그 나라 국민들의 기질에 맞게끔 재편되었다.
이 나라(조선/한국)에서는 ‘도교’와 ‘유교’, ‘천도교’ 등의 종교와 사상, 사회적인 가치와
섞여 버무려졌고, 해방이후의 산업자본사회의 어수선한 사회상과 20세기말의 ‘흉흉한’
분위기에 뒤섞여 참으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한국사회 불교도들의 ‘특징적인 모습’은 우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는
엄청난 집착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먹고 자고, 돈 벌고, 소유하고 소비하고, 은행에 돈 맡겨서 이자 불리는 등등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극도로 용의주도하고 치밀하다.
이들은 늘 ‘화복’과 ‘극락’을 염원하고 있다.
아마 2000여 년 전쯤의 불교도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불자를 대했다면
‘어찌 개인적인 삶이 이리 집중적이고 계획적이며, 효과만 따져서 움직일까? 저러한
삶에 어찌 불심이 들어찰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가득할 것이다.
반면 이들의 절대 다수는 ‘사회현실’에 대해서 극도의 무관심을 보인다.
이들은 사회현실에 대한 무관심, 무실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세상의 문제가 존재하겠는가’(무자성)
‘세상에 네가 추구하는 사회적 실체는 없다’(무상)는 식의 이야기를 중얼거려댄다.
이들은 석가와 용수가 ‘회의’와 ‘염세’ ‘허무’로부터 불교철학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생성시키고 강화해낸 개념들을 오히려 ‘회의’ ‘염세’ ‘허무’의 수렁으로 빠지기 위해서 도용하고 있다.
사상과 존재에 대한 다각적인 숙고가 없이 ‘느껴지는 것’을 중심으로 현실을 개념화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빠진 수렁이 보일리 만무한 것이다.
편협하고 완고한 자아에 안주해, 이를 깨트리고 세계와 작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도 안스러울 뿐이다.
이들은 석가와 용수에 의해서 기반이 잡힌 불교 철학을 과거로 되돌려
견고한 불생불멸의 자아상을 다시 ‘복구’하려는 행태를 자신들이 보이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 견고히 닫힌 자기-세계인식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무상’ ‘무아’를 입에 달고 산다.
3. 연기, 무상, 공
진정한 연기, 무상, 공은 ‘관념적’으로만 세상을 관조하거나,
자기 자신의 자아상을 견고히 유지하면서 입으로만 ‘무상’ ‘무자성’ ‘무아’를 읊어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연기’ ‘무상’ ‘공’의 실현은 얽매인 자아를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 해방시켜,
세상-자연과 어울림의 작용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세상이 구체적인 어울림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나와 세계(인간-환경)가 하나로 어우러져서 현실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연기’이고,
나와 세계의 작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는 변화를 만들어 내니 ’무상‘이요,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로 존재하는 상태 자체가 ‘공’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인간-환경)과의 작용에서는 수 없는 부대낌과 비루함과 생소함, 뜬금없음이
동반되곤 한다. 하지만 이 자체를 ‘주체적’으로 인지하고 감내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스스럼없이 ‘살아내는 것’ 자체가 온전한 ‘연기’ ‘무상’ ‘공’의 실현이다.
이렇지 않고 완벽한 질서, 갈등 없음, 영원성, 무한한 안락, 평안만을 쫓는 일체의 입장은,
관념적이고 허무적이며, 허황된 것이다.
문제는 무한소유와 소비, 쾌락만 쫓으려는 대중사회 속에서의 훈련된 경향은 그러한
허무-허황된 것을 쫓게끔 우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연기’ ‘무상’ ‘공성’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서 현대대중소비사회에 의해 함몰된 ‘자기주체’부터 찾아야 한다.
교묘히 정신에 스며든 자본과 권력의 가치, 우열감을 통해 움직이는 사회적 존재의 특성,
대중집단의 관성이 자기 자신의 머리에 들어차 있음을 우선 확인하고 그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 ‘자기주체’를 바로 세워놓은 연후래야 자기를 능동적으로 세계에 내던짐으로
온전히 ‘자기 버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 시점이 바로 ‘주체세움’과
‘주체버림이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는 찰라로서 ’공성‘이 실존적으로 실현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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