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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림쟁이 이야기 -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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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9.160) 댓글 8건 조회 6,550회 작성일 10-10-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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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걸레로 온통 지저분해진 파렛트와 붓을 닦는다. 손에 물감이 묻어 엉망이다. 찬물에 몇 번이고 손을 씻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는다. 멍하니 캔바스를 보다 문득 떠오른 나이, 오십이 눈앞이라니. 참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을 겪고 지나쳐 보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꽤 선명하다. 어째서 최근 일일수록 잘 기억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바닥에 뛰어든 지 벌써 30년. 생각보다 이 길은 험하고 힘든 곳이었다. 아름다움과 내적 완성의 추구라는 이상을 좇아 달려왔지만, 언제나 모자라고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허허로웠다. 갈증처럼 무엇인가 되고 싶었다. 모두에게 주목받는 화려한 꽃.

2008년 4월. ‘띤쨘’이라는 축제와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하여 마얀마 북부 산악 지역에 있는 ‘몌묘’라는 소도시로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열댓 시간을 덜컹거리는 고물버스로 밤새워 도착한 ‘셰따웅곤’이라는 절은 기강이 세기로 유명한 ‘빤디타라마’ 계열의 수행처였다.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의 좌선과 경행은 지난 7개월의 수행 피로와 알 수없는 조급증, 초조함으로 인해 더욱 힘든 것이었다. 아침 시간 마을로 한 시간 넘게 탁발 나가 밥을 얻어오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4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그날도 끙끙대며 앉아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었는데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득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 분노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온갖 사건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주눅들었거나 상처받았거나 부당하게 대우받았거나 초라해 졌을 때와 위축되어 도피하고 싶었을 때 등의 그 많은 사건들, 일들, 욕망들... 그때는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지만 또는 애써 무시했지만, 가라앉아있던 그 의식들이 수도관이 터져 물이 솟아나오듯 욕지거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좌선을 풀고 경행을 하며 생각했다. 다시 좌선에 들었을 때 또다시 그러한 것들이 반복되었고 내 어리고 여린 영혼이 지속적으로 상처받았던 근원들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항상 술취해있던 무력하고 무능한 아버지, 추운 겨울밤 술사오라고 소리 지르던 대현 삼촌, 또 항상 술 취해 소리 지르던 달현 삼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입산 수행을 포기하고 하산해 술로 생을 망쳐버린 삼촌의 연이은 죽음들. 불쌍한 할머니, 어머니... 어리고 보호받지 못한 내가 그들에게 한번도 하지 못했던, 표현하지 못했던 분노와 항변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다음날 붉은 가사를 감고 발우를 갖추고 마을로 탁발을 나갔다. 길은 온통 노랗거나 보라 빛의 이름 모를 꽂들로 찬란했다. 흙을 딛는 맨발의 감촉과 귀를 울리는 확성기 노래 소리. 문득 스무 살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친구와 술이 떡이 되어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 참외 몇 알과 솔 담배 한 갑을 마루에 두었다. ‘너네 아버지 괜찮은 분인 것 같아’ 친구의 말이 바로 들리지 않을 만큼 그를 싫어했고 혐오했으며 또는 안타까워했다. 알콜 중독자.

오랜 술병으로 어머니와 동생들과 내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약간은 후련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대화 같은 대화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떠올린다. 노란 참외와 솔 담배의 선연한 색깔이 생각난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아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도 전날의 나처럼 위축되고 분노하고 초라함과 좌절 속에서 생의 의욕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를 닮은 나를 발견했다.

발우 가득 밥을 얻어오면서 울었다. 그를 위해, 그의 사랑을 기억하며, 내 젊은 날의 잘못과 겪어온 고통과 좌절을 생각하며, 그리고 참외와 솔 담배를 생각하며. 스님이 울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쳐다보았지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비는 점점 거세졌다. 며칠 뒤, 양곤에서 태풍으로 인명 피해가 엄청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작가로서 시작하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고 가진 것 없으면 어떠랴, 그냥 살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 뒷날 만나면 그런대로 열심히 살아왔음을 서로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이야기할 날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고원님의 댓글

고원 아이피 (58.♡.244.198) 작성일

조선생님! 지난 전국모임때 만났던 임성순입니다.
 님의 글을 보면서 쓸쓸함과 허전함과 함께 편안함이 교차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군요.
 한줄기 바람이  지날때마다  소주생각이 간절하군요...
 부디 안녕히.

지족님의 댓글

지족 아이피 (112.♡.206.210) 작성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일산에 살다 제주로 왔는데 그림이 보고싶네요.

행복한나무님의 댓글

행복한나무 아이피 (115.♡.218.67) 작성일

요즘 도덕경은 부흥회를 한거 같다. 부흥회를 통해 간증들이 쏟아진다.


요즘 나는 도덕경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보면서 줄줄 눈물이 흐른다

자꾸만  자꾸만 울고 싶다.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59.♡.232.155) 작성일

아버지,
참 힘겨운 이름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직 제겐 건재하시거니와 변하지 않은 채,
당신께서는 여전히 당신께서 익숙한 것들을 하고 계십니다.

못견디게 힘겨운 저는 결국,
내 아버지로서의 그를 내려놨습니다.
그냥 한 인간으로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곤,
기회가 되면 비원님의 강의를 함께 들을 수 있는 날을,
저 혼자만의 꿍꿍이 속샘으로 그날을 그려봅니다.

고집이님의 댓글

고집이 아이피 (115.♡.88.34) 작성일

소중한 나눔 고맙게 고맙게 받겠습니다.

진실님의 댓글

진실 아이피 (58.♡.244.35) 작성일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지요.....

글을 읽고...  더듬어 심장을 찾으니 제 생채기도 우지끈~~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175.♡.130.98) 작성일

고마워요 vira님
벌써 부터 삼탄이 기다려 지네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장애 요소들....
무장해제가 되어 받아들여지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고마웠습니다

늘 만나고 흐르고 있습니다
영혼의 고향에서....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아이피 (211.♡.96.16) 작성일

다시 읽어도 또 눈물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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