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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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헐 (211.♡.76.142) 댓글 0건 조회 5,382회 작성일 07-12-16 06:42본문
임제는 황벽의 문하에서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정진하고 있었는데, 3년이 지난 어느날 수좌의 권유로 방장 스님인 황벽을 찾아 법(法)을 묻게 된다. 임제는 황벽에게 불법(佛法)의 분명한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임제의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벽은 몽둥이를 들어 임제를 때렸다. 세 번을 이렇게 물어서 세 번 모두 두들겨 맞은 임제는, 왜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때리기만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여기고 불만스러워 한다. 결국 임제는 때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황벽과는 인연이 없다고 여기며 황벽을 떠난다. 그리하여 고안(高安)의 대우(大愚)를 만나 황벽이 몽둥이로 때린 것이 바로 임제의 질문에 대한 가장 친절한 대답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임제는 황벽의 뜻을 알아차린다. 황벽이 몽둥이를 휘두른 뜻을 알아차린 임제의 첫마디는, '원래 황벽의 불법에 특별한 것은 없군!'이라는 감탄이었다.
임제가 보청(普請)으로 김을 매고 있을 때, 황벽이 오는 것을 보고는 괭이를 붙잡고 서 있었다. 황벽이 말했다. 이 놈이 피곤한가? 임제가 말했다. 괭이를 아직 들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피곤하겠습니까? 황벽이 바로 때리자, 임제가 방망이를 낚아채서 한 번 밀어서 넘어뜨려 버렸다. 황벽이 소리쳤다. 유나! 유나! 나를 좀 일으켜 세워다오. 유나(維那)가 다가와 부축하며 말했다. 스님 어찌하여 저런 미친놈의 무례를 용납하십니까? 황벽은 일어나자마자 곧 유나를 때렸다. 임제는 괭이로 땅을 파며 말했다. 모든 곳에서는 화장(火葬)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일시에 산 채로 묻어버린다.
임제가 아래 선방에서 앉아 졸고 있는데 황벽이 내려와 보고는 주장자로 선판(禪板)을 한 번 쳤다. 임제가 머리를 들어 황벽을 보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황벽은 또 선판을 한 번 치고는 윗 선방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수좌가 좌선(坐禪)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랫 칸의 후생(後生)은 도리어 좌선을 하고 있는데, 너는 여기서 망상(妄想)을 피우고 있어서 어쩌겠느냐? 수좌가 말했다. 이 노인네가 뭐하나? 황벽은 선판을 한 번 두드리고는 곧 나갔다.
임제 스님이 법당(法堂)에 올라가 말했다. 붉은 고기 덩이 위에 하나의 자리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늘 그대들의 면문(面門)으로부터 출입하니, 아직 밝히지 못한 자는 잘 살펴 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자리 없는 참사람입니까? 임제 스님이 선상(禪牀)을 내려와 그를 움켜잡고 말하였다. 말해라, 말해! 그 스님이 머뭇거리고 있자 임제 스님이 그를 탁 놓아버리고 말했다. 자리 없는 참사람이라니 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 같은 소리냐? 그리고 곧 방장(方丈)으로 돌아갔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온 우주를 관통하니, 눈에서는 본다 하고, 귀에서는 듣는다 하고, 코에서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서는 말한다 하며, 손에서는 쥔다 하고, 발에서는 걷는다 한다. 본래 한 개의 깨끗하고 밝은 것이 나누어져 18계의 경험세계를 이루므로, 하나의 마음도 이미 없다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해탈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이 항상 치달려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저 옛 사람의 부질없는 인연과 경계를 숭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나의 견처에서는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자르며, 십지보살은 천박한 놈과 같고, 등각보살과 묘각보살도 족쇄찬 놈이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변소간의 똥과 같고, 깨달음과 열반은 나귀 매는 말뚝과 같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그대들이 3아승지겁 동안 공(空)에 통달치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참된 도인이라면 결코 이와 같지 않아서, 인연따라 오래된 업을 녹여 없애고 자재하게 옷을 입으며, 가고자 하면 가고 앉고자 하면 앉을 뿐 한 생각이라도 부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 왜 그러한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부처가 바로 삶과 죽음의 큰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여러분! 시간은 아까운 것이다. 저 사이비 학도는 분주히 선(禪)을 배우고 도(道)를 배우며, 명칭을 파악하고 언구(言句)를 알아차리며,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며, 선지식을 찾아서 뜻으로 헤아린다. 착각하지 말라, 도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한 부모(父母)가 있을 뿐인데,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그대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아쥬냐닷타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가, 찾는 마음을 쉬어버린 곳에서 곧 할 일이 없어졌다라 하였다.
여러분! 평상(平常)하기를 바란다면 모양을 짓지 말라. 어떤 종류의 좋고 나쁨도 구별 못하는 머리 깍은 자는, 신령을 보고 귀신을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날을 좋아하고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 빚을 갚아야 하니,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쇠구슬을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좋은 집안의 남녀들도 이런 종류의 들여우 도깨비 같은 자들에게 홀려서 괴상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놈들은 밥값을 치를 날이 있을 것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무엇보다도 참되고 바른 견해를 찾아 얻어야, 천하에 두루 다니더라도 저런 종류의 도깨비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일 없는 것이 사람을 귀하게 하는 것이니, 단지 조작(造作)하지만 않으면 바로 평상(平常)이다. 그대가 바깥의 남에게서 구하려 하고 발판을 찾아서 다닌다면 잘못된 것이다.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부처는 이름이요 말일 뿐이다. 그대는 도리어 찾아서 다니고 있는 바로 그것을 아는가?
삼세 시방에 부처와 조사가 나타나는 것은 다만 법(法)을 구해서일 뿐이며, 지금 도를 배우는 여러분도 다만 법을 구할 뿐이다. 법을 얻어야 비로소 끝마치게 되고, 법을 얻지 못한다면 여전히 5악도를 윤회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법[心法]이다.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눈앞에 드러나 작용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이름과 말로써 알아차리고 문자 가운데에서 구하며, 뜻으로 불법(佛法)을 헤아리니, 하늘과 땅 만큼이나 어긋나는 것이다. 마음법은 범(凡)에도 들어갈 수 있고 성(聖)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깨끗함에도 들어갈 수 있고 더러움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진(眞)에도 들어갈 수 있고 속(俗)에도 들어갈 수 있다. 요컨대 그대가 진속범성(眞俗凡聖)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진속범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지, 진속범성이 이 사람에게 이름 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
그대의 한 생각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이것이 마구니이다. 그대가 만약 만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은 환상처럼 조화를 부린다는 것에 통달하면, 다시는 하나의 경계도 없고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모두 청정하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는 물들거나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나의 견처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예도 없고 지금도 없으니, 얻는 자는 곧바로 얻을 뿐 시간을 거치지 않으며,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을 뿐, 언제든지 다시 무슨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것을 넘어서는 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이나 환상과 같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모두이다.
대장부라면 지금 바야흐로 본래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각 생각 치달려 구하며, 제 머리는 버려두고 따로 머리를 찾아서 쉴 줄을 모른다. 예컨데 원돈보살이라고 하더라도 법계에 들어가 몸을 드러내고, 정토(淨土)에서 범(凡)을 싫어하고 성(聖)을 좋아한다면, 이러한 무리는 취하고 버림을 아직 잊지 못했으니 깨끗하니 더럽니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선종(禪宗)의 견해라면 그렇지 않아서, 바로 지금일 뿐 다시 어떤 시절도 없다. 나의 말은 모두 한 때의 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방편일 뿐이고, 실법(實法)은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참된 출가여서 매일 만 냥의 황금이라도 쓸 자격이 있다.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인가의 도장을 받아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라고 말하지 말라. 말재주가 강물처럼 유창하게 흐른다 하더라도 모두 지옥갈 업을 짓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참되고 바른 견해를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참되고 바른 견해에 통달하여 두루 밝게 되어야 비로소 끝마치는 것이다. 참되고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그대들은 항상 범(凡)에 들어가고 성(聖)에 들어가며, 더러움에 들어가고 깨끗함에 들어가며, 모든 불국토에 들어가 곳곳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그러나 부처는 세상에 나타나 큰 법바퀴를 굴리고 열반에 들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보지 못하고 그 생사를 찾아도 찾을 수 없으니, 곧 무생법계(無生法界)에 들어가 곳곳마다 노닐면서 화장(華藏) 세계에 들어가도, 모든 법이 공상(空相)임을 볼 뿐 실법(實法)은 전혀 없는 것이다. 오직 법을 듣는 의지함 없는 도인이 있으니, 이것이 모든 부처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의지함 없음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의지함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 또한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이다.
배우는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름과 말에 집착하므로, 저 범(凡)이니 성(聖)이니 하는 이름이 장벽이 되어 도안(道眼)을 가로막게 됨으로써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12분교는 모두 도를 드러내는 말일 뿐인데, 배우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도를 드러내는 말 위에서 알음알이를 내니, 이는 모두가 의지하는 짓이라서 인과에 떨어져 삼계의 생사를 면하지 못한다. 그대가 살고·죽고·가고·머물고·집착하고·벗어남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바로 지금 법을 듣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발하게 인연에 응하여서 수만 가지 경계를 펼치지만, 작용하는 곳은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나니, 이름하여 비밀이라고 한다.
꿈 같고 환상 같은 이 육신에 집착하지 말라. 나이가 들면 바로 죽음으로 돌아간다. 해탈하려면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무기력하게 습관을 따르며 쾌락만을 쫓지는 말라. 시간은 순간 순간 덧없이 흘러가며, 굵게는 지(地)·수(水)·화(火)·풍(風)에, 가늘게는 생(生)·주(住)·이(異)·멸(滅)의 4가지 모양에 핍박받고 있다. 바로 지금 4종의 모양 없는 경계를 알아서 경계에 핍박 받지 않도록 하라. 무엇이 4종의 모양 없는 경계인가?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의심이 땅이 되어 가로막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좋아함이 물이 되어 빠뜨리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성냄이 불이 되어 태우고, 그대의 한 생각 마음의 기쁨이 바람이 되어 휘몰아친다. 만약 이와 같이 분별해낼 수 있다면, 경계에게 굴림을 당하지 않고 곳곳에서 경계를 쓸 수 있어서, 동쪽에서 솟았다 서쪽으로 가라앉고 남쪽에서 솟았다 북쪽으로 가라앉으며, 가운데에서 솟았다 가장자리로 가라앉고 가장자리에서 솟았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물을 땅처럼 밟고 다니고 땅을 물처럼 밟고 다닌다. 왜 이러한가? 지·수·화·풍의 4대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깨끗하고 묘한 국토에 들어가서는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말하며,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서는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말하며, 해탈국토에 들어가서는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말한다. 그러나 이 삼안국토(三眼國土)는 모두가 의지하여 변하는 것들이다. 경론가(經論家)라면 법신을 근본으로 삼고 보신과 화신을 응용으로 여기겠지만, 나의 견처에서는 법신이라 하더라도 법을 설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불신(佛身)은 뜻에 의지하여 세워지고, 불국토(佛國土)는 바탕에 의거하여 논한다]라 한 것이다. 법성신과 법성토가 만들어진 법이며 의지하여 통하는 국토로서, 빈 손에 누른 잎사귀를 쥐고서 어린 아이를 속이는 짓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시덤불의 마른 뼈다귀 위에서 무슨 즙을 찾느냐? 마음 밖에도 법은 없고 마음 안에도 법은 없는데, 무슨 물건을 찾는가?
그대들 여러 곳에서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업 짓는 일이다. 그대들은 또 육도만행(六度萬行)을 고루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역시 모두가 업 짓는 일이다. 부처를 찾고 법을 찾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찾는 것 역시 업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이 늙은 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참된 도(道)라고 여기고는, 선지식은 불가사의하고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저 노인을 헤아려볼 수가 없다고 여긴다. 어리석은 자들아, 그대들은 일생 동안 단지 이러한 견해만 지으며, 스스로의 멀쩡한 두 눈을 저버리고 있구나! 마치 얼음 위를 걷는 망아지처럼 차갑게 입을 다물고서, 나는 감히 선지식을 훼손하지 못하니 구업(口業) 짓는 것이 두렵다고 여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훼손할 수 있으며, 천하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대장경의 가르침을 배척하며, 어린 아이 같은 무리들을 비난하고, 순조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참사람을 찾는다. 그러므로 나는 20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으나 겨자씨 만큼도 얻을 수 없었다.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 밥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려워 안정되지도 즐겁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부터 선배들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법이 귀한 것인줄 알았다. 만약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긍정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자가 한 번 울부짖으면 들개의 무리는 머리통이 부서지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이 있다]고 말들을 한다.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엇이 모자라며,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인가?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면, 곧 이런 부류의 들여우·도깨비를 믿고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을 결박하고는, [이치와 행동이 서로 응하고 3업을 다스려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도 도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사람이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만가지 삿된 경계가 다투어 나타난다. 지혜의 칼을 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밝음이 나타나기 이전의 어둠 그대로가 곧 밝음이다]라고 한다. 그 까닭에 옛 사람은,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도 공부하는 이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세간이나 출세간의 모든 법(法)은 전부 자성(自性)도 없고, 생겨나는 성품도 없고, 다만 헛된 이름[空名]일 뿐이다. 이름 또한 헛된 것인데, 그대들은 오로지 저 부질 없는 이름을 진실하다고 여기니,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설사 무언가 있다고 하여도 모두가 의지하여 변하는 경계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삼신불(三身佛)이니 지혜니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것들은 모두가 의지하여 변하는 경계이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하는 경계 속에서 무엇을 찾느냐? 나아가 3승(乘)과 12분교(分敎)는 모두가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낡은 종이요, 부처는 허깨비이며, 조사는 늙은 비구이다. 그대들도 또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느냐?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 곧 부처라는 마구니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한다면 조사라는 마구니에게 결박된다. 구한다면 모두가 고통이니, 일 없는 것이 좋은 것이다.
어떤 부류의 승려는, “부처는 구경의 경지이니 무수한 세월 동안 수행한 공덕이 가득해야 비로소 도를 이룬다.”고 말한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가 구경의 경지라고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부처는 80살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죽었는가?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부처의 생사는 나의 생사와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또한, “32상 80종호가 부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전륜성왕도 부처여야 할 것이다. 32상 80종호는 다만 환상일 뿐임을 분명히 알라. 옛 사람은 말하기를, “여래가 나타내는 몸의 모습은 세간의 인정에 따르기 위함이니, 사람들이 단견(斷見)을 낼까 염려하여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우고, 32상이니 80종호니 하는 말을 빌리지만 모두가 헛소리일 뿐이다. 몸이 있으면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고, 모습 없음이 곧 참 모습이다.”라 하였다.
오직 여러분 눈 앞에서 지금 법을 듣는 사람이 있을 뿐이니, 이 사람은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도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동산에서 거닐며 구경하듯이 하며, 아귀와 축생에 들어가도 과보를 받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서 떳다 가라앉았다 할 것이다. 번뇌는 마음에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마음이 없으면 번뇌가 어떻게 구속하겠는가? 분별하여 모습을 취하는 수고만 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저절로 도를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남에게서 부지런히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3아승지겁이 지나더라도 마침내 생사로 돌아갈 것이니, 일 없이 절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이 더 좋다.
그대들 제방에서 오는 자들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며, 해탈을 구하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대들은 삼계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 하느냐? 부처와 조사는 숭상하여 잡아맨 이름일 뿐이다. 그대들이 삼계를 알고자 하는가? 삼계는 그대들의 지금 법을 듣는 마음 바탕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탐내는 것이 욕계이고,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성내는 것이 색계이며,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에 어리석은 것이 무색계이니, 이들 삼계는 그대 집 속의 가구들이다. 삼계가 스스로 ‘나는 삼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 눈 앞에서 신령스럽게 만물을 비추고 세계를 헤아려보는 사람이 삼계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대덕들이여! [밖에는 법이 없다]고 내가 말을 하면, 학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곧 속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에 기대어 앉아 혀를 윗 입몸에 붙이고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것을 조사(祖師) 문중(門中)의 불법(佛法)이라고 여긴다.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청정한 경계를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을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옛 사람이, [고요하고 컴컴하고 깊은 동굴은 진실로 두렵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또 그대들이 만약 저 움직이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풀과 나무도 모두 움직일 줄 아니 마땅히 도(道)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풍대(風大)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지대(地大)인 까닭에,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불법(佛法)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있고,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불법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있으니,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물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스스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대덕들이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계인데, 의지함 없는 도인이 움직임으로도 작용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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