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대승찬 강의中 , 지공화상14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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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경 (211.♡.76.142) 댓글 0건 조회 12,906회 작성일 08-01-13 05:23본문
http://cafe.daum.net/yumhwasil/7wVm/11 中
무비스님 강의를 보면 김기태샘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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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으나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렵다
大道常在目前이나 雖在目前難覩라
대 도 상 재 목 전 수 재 목 전 난 도
대도상재목전 大道常在目前이나 수재목전난도雖在目前難覩라
제가 번호를 붙여놔서 이야기 하기가 좀 편리하네요.처음에 두 구절을 한 번호로 그렇게 이제 매겼는데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 대도大道라는 것은 항상 목전目前에 있다 그랬습니다.
신심명에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그랬죠 어렵지 않다면 바로 목전에 있다는 뜻이겠죠.
대도大道나 지도至道나 같습니다. 큰 도나 지극한 도나 뭐 그냥 도라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냥 도가 됐든지 불도가 됐든지 선도가 됐든지 불도佛道 선도禪道 도道 지도至道 대도大道 이것이 똑 같은 뜻입니다.
지도至道를 이야기 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지극한 도란 뭐겠습니까.
가장 이상적인 삶 뭐 쉬운 표현을 하자면 가장 행복한 삶을 말하는 것이고 참 나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정말 진정한 행복 제대로 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데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는 그 문제가 다 떨어져 나간 그런 삶 그것이 이제 대도적인 삶이죠.
거기 보면 대도라는 말 그다음에 약욕오도진체若欲悟道眞體 또 도가 있죠 그 밑에 또 언어즉시대도言語卽是大道 초기에 세 구절에서 도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도에 대해서 불교의 궁극이 도고 처음이 도고 중간이 도고 마지막이 도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도는 사실은 도불가수율 이라고 도교에도 말하고 있듯이 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한 순간도 우리가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공간적으로도 여기 말했듯이 목전을 떠날 수 없다.
목전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순간 이 자리 이 사실입니다. 그래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뭐 부르면은 대답할 줄 알고요 하는 그런 작용들 그것이죠 바로.
제가 명구 해설에 심춘尋春이라는 것을 불교신문에도 올렸고 우리 그 염화실에도 올렸는데 봄을 찾아나섰던 사람이 하루종일 저기 구름 감도는 언덕배기를 돌고 돌면서 봄을 찾아나섰다가 집에 돌아와서 우연히 매화나무 가지 밑을 지나는 데 매화 꽃이 피어가지고 미처 매화꽃은 보지 못하고 향기가 잔뜩 코를 찌르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보니까 매화나무 가지에 매화꽃이 만발해서 거기에 봄이 가득하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아주 그 참 의미심장합니다.
송나라때 어떤 비구니 스님이 지은 오도송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봄을 찾는다는 게 뭐겠습니까
행복을 찾는 것이요 나를 찾는 것이요 지극한 도를 찾는 것이요 부처가 뭔지 부처를 찾은 것이요 바로 그거지요.
그것은 바로 목전에 있는 것이고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이나 시간적이나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좀 더 쉽게 풀면요
우리는 늘 현재에는 만족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래의 어떤 일을 생각하고 미래의 어떤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거기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걸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희망을 갖고 그러는데 그 기뻐하는 것도 예를 들어서 미래의 어떤 일을 생각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도 뭡니까 지금 내가 기뻐하는 거예요. 미래의 일하고는 사실은 관계가 없어요. 지금 내가 기뻐하고 있는 그 사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우리가 알기 어렵다는 거죠.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는 말을 이렇게 풀어도 될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단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대도라고 하는 그 본질에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도록 저는 가능하면은 풀고 풀어서 쉽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근거로 해서 보다 더 높고 깊은 뜻에 다가갈 수 있다면은 그것도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수재목전雖在目前이나 난도難覩라 비록 목전에 있지만은 보기 어렵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바로 이 순간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여기에 행복의 촛점을 우리가 맞추지 를 않고 늘 저 없는 미래에다 맞춰요.
현재에 없는 미래는 그건 가상입니다. 현재에 있는 것이 실상이죠. 늘 우리는 있지 않는 어떤 그 무엇에다가 촛점을 맞춰놓고 기다리거나 그렇게 하고 있는데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야 되고 이 순간에서 모든 문제해결을 찾아야 되고 뭐 도라고 하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중략)...........
83. 譬如夢裏度河(비여몽리도하)라. 비유 하며는 꿈속에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꿈속에 강을 건넜다고 합시다.
船師度過河北(선사도과하북)이지요? 뱃사공이 그 강북 쪽으로 건네주었다. 이것입니다.
강북 쪽. 강남 쪽도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대개 강을 동서로 건너도록 되어 있어요. 보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는데, 중국은 전부 西出東流水(서출동류수)입니다.
그 뭐 우리나라에서도 西出東流水가 귀하다고 해서, 서출동류수를 아주 좋게 생각하지요.
서쪽에서 나와 가지고 동쪽으로 흐르는데...
중국에 뭐 장강이나 황하강은 전부 西出東流水 예요.
서쪽에서 발현을 해서 동쪽을 향해서 흐릅니다.
그러니까 강을 건너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건너거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거나, 당연히 그렇게 되지요.
어쨌든 뭐 어느 방향으로 건너던 간에, 그렇게 뱃사공이 강을 건네주었다. 이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서 건넜기 때문에...
84. 忽覺床上安眠(홀교상상안면)이니, 홀연히 꿈을 깨고 나면 침상위에서 편안히 자고 있더라. 이겁니다. 覺. 꿈깰 교로 읽습니다.
꿈속에서 뭐 그 먼 길을 걸었고. 또 큰 강이 있어서 강을 건너기 위해서 하룻밤 자고, 또 거기서 강을 건너는데 뭐 품삯을 준다든지, 온갖 과정을 다 거쳐 가지고, 또 이제 강을 건너서 그 쪽 건너편에 가서 내렸어요. 짐을 가지고 내린다든지, 이런 그 과정들을 다 겪었는데, 꿈을 깨고 보니까 전혀 그런 일이 없었고, 침상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더라.
그 失却度船軌則(실각도선궤칙)이라 그랬어요.
度船軌則. 내가 법칙이라는 꿈을 꾸지 않고, 건너야 한다. 그랬는데, 법칙이라기보다는 度船軌則.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법칙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절차입니다.
그런 절차를 다 잃어버렸다. 하는 말은 그런 절차가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왜냐? 안 갔으니까요. 깨 보니까 배를 타고 건넌 것이 아니라, 그대로 침상위에 편안히 누워 있더라. 이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무슨 배를 타고 건너가는 그런 절차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런 절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며는, 우리가 뭐 대도를 깨닫기 위해서 또는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도를 통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뭐 어떤 표현도 좋습니다. 그런 어떤 그 불교에서 어떤 마음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경지에 이르러 가는 데는, 어떤 地位漸次(지위점차) 이야기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다 방편이고 사실은 地位漸次가 전혀 없다.
바로 앉은자리 선 자리. 내가 현재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이 순간 여기에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
열반이면 열반. 깨달음 이면 깨달음. 성불이면 성불. 견성이면 견성. 대도면 대도. 이 모든 것이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한 이 자리에 다 구비되어 있더라. 그 말입니다.
신심명이나 증도가나 이 대승찬이나 끊임없이 수정을 부정하는 그런 그 최상의 가르침!
불교 최첨단의 가르침을 이야기했습니다.
‘修定(수정)을 不定(부정)한다.’라고 하는 말은, 닦고 증득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부정 하는 것이지요.
그 뭐 조사스님들 어록에도 보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대개 방편을 이야기 하며는 52位(위) 漸次(점차)라든지, 뭐 별별 그런 地位漸次(지위점차)를 이야기하게 됩니다마는, 정말 첨단 불교. 그 궁극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며는 본래 성불을 이야기해야 그게 옳은 것입니다.
본래 성불은 修定을 不定하는 거예요. 닦아 증득 하는 것을 인정 하지를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꿈 깨는 것과 같은데, 꿈 깨는데 무슨 닦아 증득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자던 잠, 자던 꿈 그냥 깨면 그 뿐 이예요.
무슨 三阿僧祇劫(삼아승지겁)이라는 세월을 걸려서, 52位(위) 地位漸次를 밟아 올라가듯이 그렇게 되어있는 게 아닙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은, 또 그런 근기들을 위해서 방편으로 설해 놓은 것이지요. 그렇게 이해를 해야 옳습니다.
여기의 방금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85. 船師及彼度人(선사급피도인)은, 船師. 뱃사공이나 또 저 건너가는 나그네는,
兩箇本不相識(양개본불상식)이라. 두 사람은 본래 서로 아는 바가 없지요. 잠자고 있었는데 뭐 혼자 꿈꾸었지, 언제 뭐 뱃사공을 알아서 무슨 꿈꾸었던 것도 아니고, 배를 뭐 보았던 것도 아니고, 뱃사공하고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 꿈속에서야 뱃사공을 만나서 뱃사공에게 품삯을 주고, 건너가는데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겠지만, 꿈 깨고 나면 전혀 그 사람하고 관계없습니다.
그 속에, 꿈속에 있었던 모든 것은 다 부정됩니다.
거 없다는 것이지요. 본래 없었는데 공연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兩箇本不相識(양개본불상식)이라. 두 사람이 본래 서로 알지를 못한다. 아주 참 미묘한 표현이고, 아주 능수능난한 의미심장한 그런 표현을, 참 대승찬을 읽어보면 읽어 볼 수록 그런 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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