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깨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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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0건 조회 5,751회 작성일 08-01-21 00:11본문
* '주체의 깨임'이라는 '(왜곡된) 주체의 버림'의 다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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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이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도 있어왔지만, 생태계 파괴에 따른
‘환경오염’ ‘이상기후’ ‘거주지축소’ ‘식량/물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서 앞으로 인류는
그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큰 환란에 휩 쌓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대중소비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살필 여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라도 더 갖고 높이려는 욕망만 고도화한 결과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저주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세대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시작될 이 지구적 차원의 파국에 대해서
본격적인 고민과 논의, 실천을 이뤄내야 합니다.
(이미 연쇄작용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요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라치면,
거기에는 ‘벌거벗은 임금님’속의 백성들과 같이 자기의 눈과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대중적 견해와 관성이 ‘주체’(나)를 삼켜서 모두가 똑같은 길을 향하게 만드는
인간의 집단심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의 생존의 역사를 통해서 ‘집단(대중)’이 움직이는 방식에
따르는 것이 가장 만족할만한 안전과 풍요를 가져온다는 것을 그 깊은 정신과 뼈에 새겨온 터입니다.
이렇다 보니 자신의 현재적 삶의 결과가 조만간 생태계와 후손들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문제로 삼지 않고 관심이 없다보니,
대중적인 견해에 맞서서 이를 '주체적'으로 살필 여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 '집단적 생존습관'은 설령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이 문제를 살핀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실천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을 내지 못하게 억제하는 역할까지 합니다.
이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이들은 기존의 ‘하나라도 더 갖고 더 높이려는’
대중소비사회의 체제와 문화에 저항하고 이를 해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에
생태계와 후손들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사회현실까지를 살핀다면) 이러한 위기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이 시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삶의 관성(일상적 삶의 습관)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장으로부터 대중소비사회에 대한 저항의 물골을 틔우고
새로운 일상의 흐름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상업자본과 거대권력이 야합해서 만들어내는 사회체제, 조직, 문화.
그 속에서 집단적으로 휘둘리는 우리의 삶 자체를 해체시켜야 합니다.
이에는 대중과 집단이 만들어내는 삶의 관성으로부터 뛰쳐나와
올바른 ‘주체’를 세우려는 힘겨운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간 수백만 년 동안 뼈 속에 각인되어오며 익숙히 여겨지는 생존의 방식(집합적 삶)은
‘주체’를 세우려는 노력에 반하면서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것이지만,
이에 의한 몸부림은 시대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필히 감수해야할 고통입니다.
이러한 주체를 세우기 위한 ‘반대중소비사회적’ ‘일상 해체적’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낱낱이 분해된
개별적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개개의 인간이 소유와 소비, 경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무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상사회의 도래는 단지 ‘이상’일 뿐이고 다만,
기존의 사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반성의 계기의 제공과 대중소비사회내부에서의
모종의 구조변화를 이끄는 동력 제공만으로도 그 노력의 성과로서는 충분합니다.
이렇기에 파국의 상황을 자각한 이들은 변화의 시작을
‘대중(집단)으로부터의 이탈’과 ‘자기해체’에 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사회에서 살지 말고, 사람들과 관계하지 말고, 산속으로 올라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하되,
기존의 ‘집단’ ‘대중’ ‘언론’ ‘정치인’들에게 휘둘리던 ‘가치’ ‘습성’ '대중소비사회문화'를 철저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해체’라는 표현 역시 ‘나는 없어’ ‘나는 존재하지 않아’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집단과 대중에 휘둘려서 ‘온전히 존재하지 않던 자기를 해체’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무너트린 사고의 기반을 차근히 다지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발로 대지를 밟고 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판단과 결정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하는 실존적 고뇌가 따릅니다.
이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은 ‘확장되는 자아’를 필요로 합니다.
확장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개인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아는
‘개인적 자아’ ‘이기적 자아’ 일 뿐이지 온전한 ‘주체적 자아’는 아닙니다.
그 자아가 개인성을 탈피해서 ‘이웃’과 ‘사회’와 ‘자연’으로 뻗어나갈 때...
그래서 온전히 그것(인류와 자연) 까지를 ‘나’로 품어 낼 수 있을 때
주체는 바로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 또 함정이 있습니다. 단순히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관념적’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주체를 말하는 것은 아님에도, 너무도 많은 이들(기독교도, 불교도, 도교도들의 상당수)이
그것을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관념’ ‘말’ 뿐인 인간과 자연과의 ‘하나 됨’은 신비주의이기는 할망정
결코 올바른 주체작용은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이 내 자신의 일부이자 내 자신이 그 일부인 그것임을 깨닫고,
‘나’라는 개체의 일상으로부터의 구체적 ‘고민’과 ‘실천’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주체’의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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