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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읽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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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도인 (211.♡.76.142) 댓글 0건 조회 9,159회 작성일 08-01-22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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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과 헤롯 왕
얼마 전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내 절친한 친구가 한국에 잠시 다니러 왔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누군가의 클래식 기타 연주 소리를 듣고는 ‘필’이 꽂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거기에 바쳐버린 친구인데, 캐나다에 간 것도 단지 기타를 좀 더 깊이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거기 가서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오른손에 근육마비 증상이 와 기타를 그만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도 겪게 되는데,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10여 년의 각고 끝에 결국 따뜻하고 섬세한 클래식 기타 레슨 선생으로 자리 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최근엔 연주회 CD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방학을 맞아 잠시 쉬러 들어온 것이다.

짧은 3주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그의 열정적인 기타 연주를 오랜만에 들어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격조(隔阻)했던 그간의 삶의 얘기들을 오랜 시간 나눌 수 있어서도 참 좋았다. 그런데 그가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 일찍 출국한다기에, 짧은 만남이 아쉬워 김해공항까지 내가 태워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성경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러자 갑자기 그는 흥분하며 성경에 관한 자신의 생각과 불만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그는 모태신앙이었다).
성경은 구약성경을 없애고 신약성경만 남겨둬야 한다는 것, 그랬을 때 더욱 성경다울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불과한 구약을 성경에 포함시킴으로써 십일조 등의 율법의 부담과 무리수를 사람들에게 안겨줬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참된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감각을 무디어지게 했으며, 하나님을 단지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오해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으로 족하며, 그랬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진리에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많은 얘기를 했는데, ‘성경’과 ‘진리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나름의 애정과 사랑에 바탕을 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론 친구의 그런 마음에 공감도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어떤 설명할 길 없는 안타까움으로 살포시 젖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친구를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까의 그 설명할 길 없는 안타까움은 바로 이런 내 안의 오랜 의문과 맞닿아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렇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은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책이다. 그 깊이와 넓이가 한량(限量)이 없어 인생(人生)과 인간(人間)과 세상에 관한 참된 진실과 모든 비밀들을 가득히 담고 있으면서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삼류소설보다 못한 ‘말도 안 되는 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성경은 ‘무한각(無限角)’의 책이다.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무한히 달라져 보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단지 그만큼만 퍼가도록 허용하는 참으로 현묘(玄妙)한 책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는커녕 성경 안에는 분명한 진리와 무한한 지혜와 따뜻한 사랑과 한없는 은혜가 가득히 담겨 있다. 또한 우리를 진실로 거듭나게 하고 다시 살게 하는 어떤 ‘힘’이 성경 안에는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종교’나 ‘신앙’을 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내가 처음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은 나이 서른이 되던 해 9월 교직(敎職)을 사표내고 황망히 들어간 지리산 토굴에서였다. 그땐 깊디깊은 영혼의 메마름과 공허를 어쩌지 못해 하며 세상과 사람을 등진 채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있을 때였는데,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부여잡고선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또 읽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읽어도 단지 그때뿐 책은 내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허허로운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친 마음에 문득 생각난 것이 바로 ‘세계 최대(最大) 최장(最長) 베스트셀러’라는 성경이었다.

‘아, 그렇다면 이 속에는 어떤 <길>이 있지 않을까? 나 자신과 삶의 이 끝없는 의문과 고통을 풀어줄 답(答)이 있지 않을까? 30년이 넘도록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영혼의 이 설명할 길 없는 억압과 구속과 답답함을 풀어줄 평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거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경을 펼쳐 구약성경 창세기 1장1절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 후에도 많은 세월이 흘렀고, 7개월간의 지리산 토굴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와선 곧바로 경기도 포천에 있는 어느 수도원(修道院)으로 들어가 기도와 청빈, 노동의 수사(修士)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문득 타는 목마름으로 배를 타 갑판원으로서 선원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의 많은 방황과 경험들이 덧보태어졌다.
그렇게 세월과 더불어 나의 영혼의 갈증과 고통도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갈 즈음 어느 순간, 마침내 “너희가 전심(全心)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29:13∼14)라는 성경말씀이 내게 이루어져,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오고 동시에 영혼의 지극한 평화가 찾아왔다. 아, 비로소 나는 생(生)의 모든 방황과 메마름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와 함께 구약성경 시편(詩篇) 1편3절에서 노래하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펼쳐 읽었을 때 아, 성경은 전혀 다르게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성경은 현존(現存)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영혼을 비추는 맑디맑은 거울이었으며, 근본에 있어선 우리 모두와 호흡과 체온이 똑같은 동질(同質)의 무엇이었다. 아, 그랬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하나였다.

그랬기에, 나는 성경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 마음으로 자꾸만 성경을 노래하고 싶어졌다. 하다못해 성경의 ‘무한각(無限角)’ 가운데 한 자그마한 각을 들고서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런 뜻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을 우리 내면으로 가져가 읽어보면 어떨까요? 성경 안에는 이런 뜻도 있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들과 자꾸만 얘기해 보고 싶어졌다.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글을 써보게 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이야기를 ‘예수의 탄생과 헤롯 왕’이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한 자유로운 영혼의 자유로운 성경 읽기로서 말이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복음 2:6)라는 말씀에서처럼, 예수는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의 탄생의 자세한 연유는 이렇다.

당시 로마 총독인 아구스도가 인구조사에 관한 영(令)을 내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호적(戶籍)하게 하는데,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하기 위해 길을 나서서 조상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 이르게 된다. 이때 마리아는 갑자기 해산기(解産氣)를 느껴 사관(舍館)①을 찾지만,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사관마다 만원이라, 하는 수 없이 급한 김에 근처 외양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마리아는 해산(解産)하여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②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7)
① 객지에 머무르는 동안 잠시 기숙하는 집.
②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서 만듦.

아, 그렇듯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따뜻하고 안락하며 깨끗하고 경건한, 그래서 모두의 축복과 경배를 받을 만한 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천하고 더러우며 축축하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그런 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금강경(金剛經) 제일분(第一分)에서 보면 금강경이 설(說)해진 그 날의 법회(法會)가 열린 연유가 나오는데, 설법(說法)하시기 전에 마침 식사 때가 되어 부처님이 가사(袈裟)③를 두르시고 바리때④를 들고 사위성(舍衛城)으로 들어가 밥을 빌어서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밥을 잡수시고, 그리고는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는 법회를 위해 자리를 펴고 앉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③ 중이 입는 법의(法衣).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음.
④ 절에서 쓰는 중의 밥그릇. 나무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올림.

그런데 사실 부처님은 이러한 모습들로써 이미 금강경을 다 설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법(法)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진정한 ‘금강(金剛)’은 어디에 있는가를 부처님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상(日常)의 이러한 모습들로써 이미 우리에게 다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듯 금강경의 진의(眞義)는 이 제일분(第一分)에서 이미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진의(眞義)는 무엇일까?

이때, 그것을 찾음에 있어서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부처는 단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일 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이 그러한 모습들로써 정작 우리에게 말해주고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진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현재(現在) 속에서의 우리 자신의 삶, 이 일상(日常),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이 있는 그대로, 나아가 우리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일체시중(一切時中)이 그대로 법(法) 아님이 없으며, 그 그대로가 진리요 깨달음이며 부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멸법(生滅法) 이대로가 바로 불법(佛法)이요, 번뇌(煩惱) 그대로가 곧 보리(菩提)라는 것이다.
금강경은 제일분(第一分)에서 바로 이러한 ‘진실’을 우리에게 밝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따로 찾을 것도 구할 것도 없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이 실상(實相)의 세계를 단박에 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미 이대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리했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설법(說法)이며, 법회(法會)이며, 또한 ‘금강(金剛)’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부처란 언제나 ‘이름’과 ‘모습’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현존(現存)’이며 ‘현재(現在)’이기에, 금강경이 말하고자 하는 시점(時點) 또한 언제나 ‘현재’이며, 드러내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당시의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 ― 우리 각자 자신 ― 인 것이다. 부처란 결코 어떤 ‘대상(對象)’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이야기를 단지 2000년 전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인자(人子)로서의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읽으면 안 된다. 그것은 대상화(對象化) 할 수 없는 것을 대상화시켜 버리는 것이며, ‘과거의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금의 나’를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예수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 또한 지금 여기에서의 ‘나’와 분리된 어떤 ‘대상(對象)’도 아니며, ‘종교’ 안에 한정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현존(現存)’이며 ‘현재(現在)’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의 탄생’에서도 2000년 전의 예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眞我]의 탄생’을 봐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이 ‘예수의 탄생’ 이야기 속에는 우리 영혼이 진실로 자유케 되고 영원한 해방을 맞아 진리[眞我]와 지복(至福)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 즉,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 분명한 <길>이 제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앞서 금강경 제일분(第一分)에서 이미 ‘금강(金剛)’의 진의(眞義)가 다 드러나 있었듯이, 여기 이 ‘예수의 탄생’에서도 그 <진리의 길>이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이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한 번 읽어보자.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라는 성경말씀에서 보듯 <가장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나아가 사관(舍館)에 있을 곳이 없어 외양간의 더럽고 축축하고 냄새나고 초라한,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그런 곳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 내면에도 보면, 우리가 결코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는 작고 초라하고 못난 구석이 여러 곳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우리 안에서 일어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게으름, 무기력, 우울, 불안, 막막함, 짜증, 화, 미움, 밴댕이, 경직과 긴장, 외로움, 우유부단, 무지(無知), 어리석음, 말더듬, 교활함, 비열함, 이기심, 번뇌(煩惱)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그런 자신을 보게 되면 화들짝 놀라며,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난 양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나 정죄하며 얼른 그곳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곤 스스로의 다짐과 결심과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전혀 그렇지 않은 인간, 즉 당당하고 충만하고 가득차며 자비롭고 성실하고 겸손하며 진실하고 지혜롭고 사랑이 많고 완전한,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곤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행복과 영원한 평화를 맛보려고 한다.

그렇듯 우리는 언제나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나’가 아니라, 당당하고 힘있고 가득차고 완전한 존재가 됨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마땅하고도 당연한 삶의 길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이 언젠가는 우리를 자유케 해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가장 작은> 마을 <더러운 외양간>에서 태어난 자신의 초라한 탄생으로써 온 몸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한 ‘길’과 ‘진리’와 ‘생명’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우리가 추구하며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그 ‘완전에의 길’은 정녕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냄새나고 더러운 외양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인 자신의 탄생을 보면서도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우리를 진리에로 인도하여 완전한 자유와 해방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길은 우리가 그토록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거기, 그 초라하고 볼품없어 스스로 외면하고 등돌리는 내면의 바로 그 곳, 그 번뇌(煩惱)들,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목격할 때마다 애써 못 본 체하며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 바로 그런 ‘내면의 외양간’에서 사실은 한 다스리는 자 ― 참나[眞我], 진리, 깨달음 ― 가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모든 자기분열과 갈등과 메마름을 영원히 끝내고, 참된 평화 속에서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했던 번뇌(煩惱) 그것이 사실은 보리(菩提)요, 중생(衆生) 그대로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아, 그와 같이 우리를 진실로 자유케 해주고 해방케 해줄 진정한 왕(王) ― 그리스도, 진리, 깨달음, 참나[眞我] ― 은 우리가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며 자신 없어 하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 속에서 탄생함을 예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탄생으로써 그렇듯 애틋하고도 간곡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의 탄생’ 속에서 이러한 ‘관점의 전환’과 분명한 삶의 ‘진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노자(老子)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도덕경(道德經) 8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최상의 선(善)은 물과도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處衆人之所惡]은 어디인가?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낮고 더럽고 추한 곳, 냄새나고 쾨쾨한 곳, 보잘것없어 조금도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 바로 그러한 곳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런 곳으로 물은 흐르고, 그래서 물은 도(道)에 가깝다는 것이다.
노자(老子)의 이 말씀 또한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가져가 읽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성인(聖人)들의 말씀이 모두가 똑같고 한결같지 않은가! 그들은 그와 같이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언제나 똑같은 <진리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이 애틋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리켜 주고자 했던 그 <길>로는 결코 발길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만 자꾸 가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그들이 가리키는 길은 도무지 <길> 같지가 않고, 더구나 그리로 갔다가는 그나마 애써 지키고 있던 것들마저 다 잃어버리고 무너져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라고 얘기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공허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⑤ 예수는 맨 처음 입을 열어 '말씀'을 전파하면서부터 우리에게 이렇게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라고. 이때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다. 즉,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부족'에서 '완전'으로, 중생(衆生)에서 부처[깨달음]로, 번뇌(煩惱)에서 보리(菩提)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에서 미래의 보다 완전한 '나'에로 가려던 그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이다. 그리했을 때 천국은 바로 그 '돌이킨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진실로.

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생명의 문’으로 보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멸망의 문’으로 보이는 이 오래고도 깊은 우리의 미망(迷妄)과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어찌하면 좋을까? 성경은 그 뿌리 깊은 우리의 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태복음 2:1~2)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보라, 예수는 분명히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났건만,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왕(王)을 찾고 있지 않는가. ‘베들레헴’은 유대 땅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고을이요, ‘예루살렘’은 그 나라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首都)가 아닌가. 그들은 고대 동방의 점성가 혹은 천문학자들로서 지혜에 밝은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날 밤하늘에 크고 밝은 별이 떠올라 빛나는 것을 보고는, 저 정도의 큰 인물이라면 필경 새로 태어난 왕일 것이라 생각하고는 곧장 예루살렘으로 찾아가 그에게 경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 지혜가 오히려 ‘참 진리’를 만나는 데에 걸림돌이 될 줄이야!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도 우리 내면의 ‘왕(王)’ ― 자기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됨의 자리, 참나[眞我], 진리, 깨달음 ― 을 어디에서 찾는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작은 ‘나’에게서 찾는가, 아니면 미래의 보다 완전한 ‘나’에게서 찾는가? 번뇌(煩惱)에서 찾는가, 아니면 보리(菩提)에서 찾는가?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맞닥뜨리게 되는 게으름, 무기력, 우울, 불안, 막막함, 미움, 짜증, 화, 밴댕이, 경직과 긴장, 외로움, 우유부단, 무지(無知), 어리석음, 말더듬, 교활함, 비열함, 이기심 등등의 초라한 ‘내면의 베들레헴’에서 찾는가, 아니면 그 모든 왜소하고 부족하고 못난 것들은 눈 닦고 봐도 없을 ‘내면의 예루살렘’에서 찾는가?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예루살렘에는 ‘왕(王)’이 없었다. 아,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런데 20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우리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구나!
어쨌든 당시의 유대 왕이었던 헤롯은 그와 같은 난데없는 동방박사들의 축하사절단 방문에 혼비백산해,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⑥을 급히 불러 모아서는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4∼6)라고 한다.
⑥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 '랍비' 또는 '율법사'라고 불렀다.
그래서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태복음 2:8)라고 한다. 그러나 헤롯은 짐짓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아기가 있는 곳을 박사들을 통하여 알아내기만 하면 단칼에 그를 찾아내어 죽여 버림으로써 후환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고, 새로운 왕이 났다면 자신의 아들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멀리서까지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난 아이를 새로 오신 왕이라며 경배드리러 간다고 하니, 일찌감치 그를 찾아내어 없애버려야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사들은 아기를 찾아 경배만 드리고는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나중에 이를 안 헤롯은 크게 분노하며 군사들을 보내어, 아기가 태어났다는 베들레헴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지경(地境)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여 버린다.
말하자면,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났다는 그 아기만 찾아 죽이면 그만이었지만, 그 아이가 정작 어느 아이인지를 모르게 되었으니,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갓난 아기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죽여 버렸던 것이다. 아, 그 바람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어미들이 가슴에 아이를 묻은 채 슬퍼하며 통곡했을 것인가.
나는 예전에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분하고 억울함을 많이 느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救世主]’라는 예수가 태어났으면 태어났지, 그로 인하여 이토록이나 많은 죄없는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웃음 한 번 제대로 웃어보지 못한 채 죽어갔다는 것을 생각을 하니, 예수를 향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내 안에서 어떤 ‘근본적이 변화’가 오고, 삶에 평화가 오고, 그래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난 이후에 다시 이 대목을 읽었을 때, 그 헤롯은 정확히 지난날의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고는 크게 전율했었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내가 보잘것없고 초라하고 껍데기뿐인 ‘나’를 못견뎌하며 보다 가득차고 충만하며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없이 괴로워할 때, 내 안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이런저런 욕망과 탐진치(貪嗔癡)와 번뇌(煩惱)와, 앞에서 열거한 게으름, 무기력, 우울, 불안, 막막함, 미움, 짜증, 화, 밴댕이, 경직과 긴장, 외로움, 우유부단, 무지(無知), 어리석음, 말더듬, 교활함, 비열함, 이기심 등등이 문득문득 일어날 때면 아! 나는 그런 나 자신에 얼마나 크게 분노하며 그러한 것들을 단칼에 죽여 버리려고 애를 썼던가! 그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드는 시늉만 해도 나는 아예 그 ‘싹’부터 잘라내어 버리려고 눈을 부라렸던 것이다.

아, 그럼으로써 얼마나 많은 내 안의 어린 ‘나’가 미망(迷妄)에 찬 나의 칼부림에 죽어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내 안의 ‘나’가 두려움에 떨며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납덩이처럼 주눅들었을 것인가. 그렇듯 내가 간절하게 추구했던 ‘인간완성’과 ‘인격완성’과 ‘자아실현’과 ‘깨달음’이라는 상(相)과 허구(虛構)는 어느새 ‘내 안의 헤롯 왕’이 되어 참으로 많은 ‘두 살 아래’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죽이고 또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 영혼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어디에서 왔던가? 내가 그토록 꿈꾸던 ‘참나[眞我]로서의 행복한 삶’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던가? 그것은 너무나 뜻밖에도, 내가 그토록 괴로워하고 못견뎌하면서 끊임없이 부정하고 죽여 버리고 싶었던 그 ‘나’가 바로 ‘참나[眞我]’였음을 깨닫게 되면서부터가 아니던가. 어느 순간 문득 내 안에서는 ‘무언가가 되려는 마음’이 사라져 버렸고, 그럼으로써 매 순간순간 다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충만해지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니던가. 아, 그렇게 보잘것없고 초라한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모든 저항을 그치고 비로소 내가 나를 껴안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생(生)의 모든 갈증과 메마름과 방황도 영원히 끝이 났던 게 아니던가.

그와 같이, 나를 ‘아버지’께로 인도해준 ‘그리스도’는 2000년 전 외양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인 예수님과 똑같은 모양으로 ‘내 안의 더럽고 추한 외양간’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곤 그 한 번의 탄생으로 내 안에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지는 것과 같은(요한복음 5:24) 엄청난 '에너지'와 평화와 사랑과 지복(至福)이 넘치도록 솟구쳤고…….
아, 예수님의 탄생이 가지는 이러한 ‘진실’이 우리 모두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여,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모든 저항을 그치고,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며,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아, 정녕 그리 되었으면 너무나 좋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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