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하지 말라는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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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4,689회 작성일 08-01-28 13:18본문
진리도 언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에는 사탕발림의 유혹과 함께 독소적 요소도 들어있고
약간의 진실이 혼합되어 있다.
손쉽게 먹혀 들어가는 관념일수록 나르시즘과 도피의 메카니즘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
숨기는 경우가 많다.
관념이 유효한 약처럼 작용할 때도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평화와 구원을 이야기
해주면 죽음의 고통을 덜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평화와 구원을 이야기
해주면 죽음의 고통을 덜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이 대부분 통념화 되면 자기 영혼 속의 울림을 잃어
버린다. 실존적 삶과 깨달음을 방해한다. 그것이 관념의 폐단이다.
버린다. 실존적 삶과 깨달음을 방해한다. 그것이 관념의 폐단이다.
관념이란 얇은 지적유희나 피상적 상상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대면, 싸움, 고통 끝에 얻게되는
보배로운 통찰을 얻지 못하게 하는 권위로서 사람을 지배한다.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대면, 싸움, 고통 끝에 얻게되는
보배로운 통찰을 얻지 못하게 하는 권위로서 사람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간택하지 않으면 깨닫는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양변에 치우치다 보면
실다운 진리를 잃어 버린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나름대로의 당위성이 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양변에 치우치다 보면
실다운 진리를 잃어 버린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나름대로의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논리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쉽다.
결정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논리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쉽다.
인간에게 선택이란 갈등의 다른 표출이다. 우리가 진로를 택하거나 선택 사이에
방황 할 때 우리 내면에 갈등이 생겨난다. 때로 선택은 갈등이라는
엄청난 내적 긴장을 일으킨다.
방황 할 때 우리 내면에 갈등이 생겨난다. 때로 선택은 갈등이라는
엄청난 내적 긴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사람은 갈등을 싫어한다. 선택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선택한
것에 책임과 결과를 떠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것에 책임과 결과를 떠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하나의 고통이다. 사람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소망할 때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변화를 소망할 때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스러움을 회피하는 것에서 일종의 포기나 도피가 싹튼다.
갈등은 본래의 자기 가치와 진정한 내면의 목표를 재조정하는 값진
기회이기도 하다. 갈등 속에서만 자아가 드러난다. 갈등이 없으면
자아도 표출되지 않는다. 아것이 상당히 역설적이다.
기회이기도 하다. 갈등 속에서만 자아가 드러난다. 갈등이 없으면
자아도 표출되지 않는다. 아것이 상당히 역설적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선택을 기피하는데 있다. 기회가 부담스럽고 자유가 힘겹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처음에 선택의 경우 수는 무척 다양하고
많아 보인다. 그러나 결정의 순간에 선택을 바라보면 이원성 밖에 남지 않는다.
많아 보인다. 그러나 결정의 순간에 선택을 바라보면 이원성 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택은 단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안전'과 '자유'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다.
안전은 보다 명확하고 확실하지만 아무런 변화나 자유가 없다.
자유는 모호한 위험, 미지의 공포가 있지만 생명력으로 충일해진다.
자유는 모호한 위험, 미지의 공포가 있지만 생명력으로 충일해진다.
이런 '안전'과 '자유'사이에 놓인 극한 값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삶'과 '죽음'의 선택 문제로 변형된다.
'삶'과 '죽음'의 선택 문제로 변형된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선택은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삶은 우리를 미지의 세상으로 내몰고 신산의 고통과 노력을 요구한다.
죽음은 하나의 종식이다. 영원한 휴식이고 좋고 나쁜 게 없다.
죽음은 하나의 종식이다. 영원한 휴식이고 좋고 나쁜 게 없다.
인류의 스승들은 이런 이원적 문제를 모두 간파하였다.
부처, 예수, 공자, 마호메트는 가능한 인간이 '자유'와 '삶'을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를 촉구하였다.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를 촉구하였다.
그 분들이 선택의 포기를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
개입을 요청하고 삶, 자유, 생명, 사랑의 물결에 동참하기를 요청하였다.
개입을 요청하고 삶, 자유, 생명, 사랑의 물결에 동참하기를 요청하였다.
'선택의 포기'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는 선택이 없다.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무 간택의 세계이다.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무 간택의 세계이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쩌면 그 선택이 우리 자신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선택이 우리 자신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무간택의 진리는 완전히 폐기 되어야 하나?
그 참된 의미는 선택의 초월적 기능에 있다.
선택의 순간, 상반되는 갈등이 서로 충돌하는 긴장을 자아낸다.
선택에는 최선이란게 없다. 선택하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희생의 댓가를
치루어여 한다. 초월적 기능이란 이런 긴장을 견뎌내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있다.
선택에는 최선이란게 없다. 선택하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희생의 댓가를
치루어여 한다. 초월적 기능이란 이런 긴장을 견뎌내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있다.
더 나은 선택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 결과에 초연한 평정심을 필요로 한다.
무간택이란 선택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선택의 지점에서 산으로 올라가
산 아래를 한 번 바라보라는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보면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화하여 초월적으로 볼 수가 있다. 지금 당장의 갈등 해소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된다.
산 아래를 한 번 바라보라는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보면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화하여 초월적으로 볼 수가 있다. 지금 당장의 갈등 해소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된다.
생명과 존재는 살아 있는 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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