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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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0건 조회 8,432회 작성일 08-02-29 10:42본문
일당 6만 원?짜리 로봇?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 0140 일하는 로봇 ]
사람이 저 일을 했으면 일당 육만 원을 받는 일인데, 일용직 노동자가 해고된 자리에 로봇이 그 일을 대체하고 있다.
과거의 어느 공상과학 소설가가 일찌감치 예견했듯이, 로봇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기는커녕 무산자계급의 빈곤을 더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기술 발달로 인해서 컴퓨터와 기계공학, 유체역학 등이 하나로 접목되면서 ‘로봇혁명’이 시작된지 오래이다. 하지만 이 로봇은 이를 제작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지만, 단순한 생산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빼앗기고 무산자들의 빈곤을 더더욱 구조화 하는 역할을 한다. 공장의 수많은 노동자가 로봇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실업자로 내몰리곤 하는 사태를 우리는 한두 번 접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에서의 ‘노동자 고난’은 ‘기계 발명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었다. 물론 ‘세탁기의 발명은 그 어떤 여성해방운동의 효과보다도 급진적인 여성의 권익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와 같이 전전으로 기계가 부정될 것은 아니겠으나, 대체로 기계의 발명은 노동자들의 자유와 권익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애초에 토지에 기반해서 살아가던 농민들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립적 생산 활동이 가능한 자유로운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상업자본 형성기에 이러한 상업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지주들’ ‘영주들’ ‘부르주아’들은 집약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농민들을 땅에서 몰아냈다.
이에 농민들은 기계가 들어차 있는 ‘공장’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소규모 수공업자(장인)들 역시 기계를 갖춘 공장의 생산성에 미치지 못해서 파산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공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자유롭고 직접적인 생산활동을 했었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농민-수공업자들은 기계의 발명에 따라, 공장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움직이는 기계의 보조에 맞춰야 하는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 초기 공장이 가동되던 당시의 공장 노동은 끔찍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아무곳에서나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노동력'보다는 비싼 값주고 어렵게 구입한 '기계'를 훨씬 귀하게 다뤘고, 투자한 원금을 회수하고 더 큰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중노동을 강요했다.
기계는 24시간 쉴새 없이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에 보조를 맞춰서 더욱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를 강요했다.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은 해고되었고, 참아내고 일하는 노동자들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 시기 도시로 몰려오는 공장노동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장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불결한 도시는 각종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온상이 되었다. 분노는 증폭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계에 대한 저항은 증기기관을 만들어냄으로 산업혁명의 영웅이 된 '제임스 와트'의 고향인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기계 공업이 가장 잘 발달된 영국에서 19세기 초반 이뤄진 '러다이트운동'이라고 알려진 이 기계 파괴운동은 기계의 종으로 전락하여 생존의 위협을 느낀 무산노동자들의 반란이었다.
채찍질 당하지 않기 위해서 10살도 안된 어린 아이들 까지 하루 15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견뎌내면서 온 가족이 공장에서 중노동을 하지만,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차라리 기계가 없었던 그때를 향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사이전부터 토지를 기반으로 천지의 운행에 맞춰 자연노동을 했던 이들에게 갑작스레 주워진 심신의 압력은 그리 폭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의해 움직이는 '합법적인 정부'에 의해서 단호한 처벌을 받았다.
기계의 볼모로 잡힌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서 유력한 법관, 정치인, 종교인, 학자들은 늘 자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들 자신이 주로 자본가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과 소수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법령 제정에 나섰을 때, 그들은 '의회가 노동자들의 죽도록 일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노동자들에게서 빼앗는다면, 영국인의 역사적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휴버먼의 책 인용)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하이튼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배려 하려 했던 '일하다 죽을 권리'보다는 '죽지 않을 만큼 일할 권리'를 얻기위해서 노동조합 등의 조직을 통해서 처절한 투쟁을 이어왔다. 이후 격렬하고 지난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투표권을 쟁취하고 스스로의 권익을 '합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의회 진출의 기회를 가지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차츰 개선되었다.
하지만 한 두세기가 흘러 '기계'는 이제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현대에 만들어지는 기계는 과거 산업혁명기와 같이 인간을 부품화 하는 기계들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일자리 자체를 대체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군소리 없이 밤낮없이 물건을 생산하는 로봇’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 해주는 충직한 하수인인 이유로 노동자들과 대체되어야할 그것이었다.
이렇자 노동자들은 실업자들로 전락하고 이전과 또 다른 '불만'을 표출하고 있지만, 자본가들의 충실한 벗인 '정치인' '행정가' '법관'들은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이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노동시장유연성(해고자유), 세계화정책 등의 추진에 힘을 싣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기계의 발달은 이에 비견될만한 또다른 병패를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의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인간의 나태와 게으름을 조장하고 있다.
기업가들은 ‘최첨단 기술’ ‘로봇혁명’ '신제품' 어쩌고저쩌고 떠벌려 대며, 끝없이 제품을 홍보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팔아먹고 있는데, 이의 무분별한 소비로 인하여 인간은 점차 삶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을 잃어가며, '소비사회의 부품(물건을 끝없이 소비해줘야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가들은 이미 충분하리만큼 섬세해지고 극대화된 인간 욕망의 계곡에 ‘욕망의골’을 하나 더 만들어내고, 그것을 ‘의미 있는 것’(욕망해야하는 것)으로 충동질 한다. 대중들은 그 새롭게 만들어진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를 구매할 ‘자본’을 얻기 위한 노동에 밤낮 몰입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 ‘충족되어야 할 것’인지 ‘충족되어야할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는 진지하게 숙고해 봐야 한다. 우리가 매달리고 있는 ‘재화’ ‘기계’ ‘기회’의 본질을 면밀히 숙고해야 한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이렇게 인간의 정신에 해를 가하는 현실이 확인되자, 새로운 방향의 기계파괴운동이 부활하기까지 했다.
'네오러다이트운동'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운동은 컴퓨터, 텔레비전, 전자제품 등의 첨단 기계문명이 결국 인류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첨단문명을 거부하면서 은둔하거나, 아니면 사회에 머무르기는 하지만, 자전거 사용이나, 슬로푸드(패스트푸드의 반대개념)를 통해서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산업화의 산물을 가려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이야기 한다. 물론 게중에는 시어도르 카진스키(하버드대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를 지냄)와 같이 모든 기계적 발명물을 거부하면서 폭발물 테러를 자행하는 급진적인 인물들도 있다.
'집시'와 '보헤미안'의 삶과 한국사회의 '농촌공동체' 들도 일견 이러한 기계 문명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삶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최소화 하고 그것을 '기계'가 대신해주게 하는 것을 ‘풍요’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무료와 무기력을 조장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팔아먹고자 하는 ‘가진 자’들은 이러한 정신병적 증세를 더더욱 부추기고 있고, 열등감과 우열감을 미끼로 운영되는 대중소비사회의 관성에 충실히 포섭된 ‘일반’인들은 ‘남들도 다 누리는 욕망’을 더불어 누리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뛰어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후로도 우리 앞에는 새롭고, 특이하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최첨단 장비-로봇의 등장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대하면서 ‘물질문명의 경이로움 - 풍요’에 대해서 놀라워할 일이 아니라, 그러한 로봇들이 만들어져서 실용화되고 보급되고 사회에 쓰여 지는 만큼 우리의 일자리가 떨어져나가고, 힘있는 이들에 의해서 기술적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도래하며, 우리의 근력, 감성, 사고는 점차 퇴화되고, 무기력과 권태는 조장되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궁극의 행복과 평화로부터 격리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간의 기술문명이 더욱 고도로 발달하여 스탠릭 큐브릭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A.I'에서 창조한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가진 로봇'이 지구상에 현실화 되는 때, 아마 인간은 그만큼의 사고와 감성과 영혼을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다. 말 그대로 (인간이 원했던 것 처럼)인간의 삶을 그들이 대신 살아주게 될 것이다.
현대 기술문명의 상징인 로봇으로 인한 혜택이 없지 않으나, ‘기계문명에 대한 맹목적 희망’은 대체로 환상과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살필 수 있는 시야를 길러야 한다. 하지만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의 생각을 TV와 컴퓨터가 대신 해주고 있는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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