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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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0건 조회 4,238회 작성일 08-03-07 20:23본문
현재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풍요, 자유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있을라 치면, 이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 들먹여지는 '사랑'과 '이해' 사적인 '비움'과 '낮춤'을 통해서보다는 다양한 문화와 시대에 존재했던 민중들이 역사 속에서 피를 쏟고 투쟁 해온 결과임을 확인하게 된다.
노동권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10살도 안된 어린 아이들의 16시간 중노동에 대한 저항부터 시작한 노동자들의 피의 역사가 있었다.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결권을 획득하기 까지, 무수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사법제도’와 ‘살인청부업자’들에게 살해되었었다.(이 시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이 노동자들의 복음서가 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미국에서는 1935년 한해에만 73명이 자본가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감리교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국가가 형성된 수백 년 동안 주로 특권층에게만 선거할 수 있는 권리가 주워졌는데, ‘보통 남성’이 자신들의 권익을 제도화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 또한 지난한 것이었고, 여성들은 고작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온전한 인간으로서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권리를 얻었었다. 이는 여성운동가 구즈가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는 말과 함께 몸과 머리가 양분된 이후 150여년이 지난 후였다.
또한 예수를 믿지 않고도 온전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존의 권위적인 교회에 대항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불에 태워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쌓이고 쌓여진 결과였다. 종교개혁을 이뤄냈다는 칼뱅이 주축이 되어 제네바에 세운 종교국에서도 58명이 칼뱅에 의해서 직접 살육 당했고, 이후 개신교도 선교사들은 제국의 침략의 선봉자로서 다른 민족과 인종을 약탈하는데 앞장섰지만, 이러한 야만성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의 결과에 의해서 차츰 예수에 대한 믿음의 여부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물론 유독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종교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유럽의 역사적 투쟁의 성과물은 영국-미국-일본-러시아 등이 벌인 식민지 쟁탈 기에 민주주의-자본주의의 보급과 함께 아시에서 그대로 이식되어 우리는 그 열매만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에 의해서 강제 식민지화 되고 해방이후에 미국에 경제, 정치적으로 종속되어지면서 이전의 역사/전통과의 과감한 단절을 시도했었다. 이렇기에 한국인들의 다수가 미국의 속국민화 되어 있음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의 뿌리를 튼실히 하기위해서도 (우리의 전통적이고 주체적인 역사/문화를 현재에 되살리지 못할라 치면) 현재 우리의 삶속에 이식된 외래의 문화와 제도라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체화 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자본주의’속에 함축된 투쟁의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달리 움직이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어느 순간 ‘뚝딱’ 내림받은 한국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적인 ‘성장’에만 몰입한 천민자본주의 화신이 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자 한국 사람들은 편리와 풍요에만 안주해서 역사적 관점에서 세계를 살피지 못하고, 그 좁은 시야는 다시 편리와 풍요만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들이 국가와 자본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투쟁을 하는 것을 마냥 번잡스럽고 짜증스럽고 하찮게 느끼는 것이다. (또한 설령 약자의 투쟁을 위해서 힘써 나서는 이들 조차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만 목소리를 부르짖을 뿐이지,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의 권익/제 3세계인들의 권익/ 환경과 자연의 권익에는 무관심하다. 이는 민주주의를 세우고 거대자본과 투쟁하면서 싸워왔던 유럽인들의 ‘연대의식’ ‘주체의식’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제대로 숙성될 기회가 없이 급조되면서 빚어낸 한계에 기인한다.)
이렇게 역사의식이 부재한 것에 더불어, 개인의 불만쯤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국가주의적 사고, 만사를 좋게만 보는 낙관론, 실천성이 결여된 관념론이 만나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바대로의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면서 투덜대기만 하는 인간이 만들어진다. 교회나 절간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만 하는 유형의 이들도 별반 그와 다를 바 없다. 죽지 않기 위해서 피흘리며 싸울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수 많은 민중들의 현실을 외면한체, 사람 좋은 '넉넉함'과 '사랑'의 전파를 충고하는 이들의 위선의 근거는 그들의 생활의 넉넉함으로 부터 기인한다. 배고픈 자들 중에 '이해' '용서'를 권하는 이들이 없듯이, 배부른 자들 중에 '투쟁'을 부르짖는 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손에 쥐는 편리와 자유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우리 선배’(국내외를 가리지 않고)들이 쏟아낸 피땀의 결과였음을 명확히 숙고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자유를 위해서 저 너머 제 3세계의 공장구석에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아동들의 착취되는 삶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서 황폐화된 자연과 후손들의 빼앗기는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책임은 시공과 역사의 중심인 ‘지금-여기’에서 인류와 자연을 하나로 묶어 작용할 그 어떤 보편타당한 힘이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자유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작용물(물질)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 실천을 통해서 사회(물질)에 영향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를 원하지 않는 세력(권력을 가진 세력, 자본을 가진 세력)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텐데, 이들과의 투쟁을 불사해야 함은 과거 우리의 선배(민주주의,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국내, 국외의 인물들)들이 그리해 왔기에 우리가 현재를 누릴 수 있음에 대한, 우리의 다음에 올 세대를 위한 시대적인 보은이다.
비판과 투쟁만으로는 세상이 결코 아름답게 변하지 않는다. 비판과 투쟁만으로 세상이 변할라치면 진즉에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과 투쟁마저도 없으면' 세상은 더더욱 인간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이 바로 한편으로 투쟁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의 사회-역사적인 의미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풍요속에 실천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책임감이 삼투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체 무턱댄 평화와 평온만을 부르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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