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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난 후에...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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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7건 조회 6,161회 작성일 08-03-2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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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분노-갈등을 느끼기 마련이다.

또한 일상의 삶에 있어서의 잡다한 자극들이 마음의 평정을 깨트린다.

이에 대해서 현자들은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그 '분노'와 '갈등'은 현재의 정신상황이 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거로 소급해 들어가는 상실, 소외, 억압, 가책, 공포에 대한 경험적-인지적-무의식적 표출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처가 많은 이들일 수록 예수, 석가, 노장자의 말씀에서

'마음을 들여다 보는 길'을 찾아 그 아픔의 본질을 헤아려야 한다.


이를 통해서 '상실, 소외, 억압, 가책, 공포'를 가져왔던 그 어떤 '집착'이 '허구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순간... 쓸데없는 집중과 집념의 아우라를 벗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가 완벽했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온전한 정신의 해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호리병속에 들어있는 사과를 꺼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호리병 속의 사과는 누구도 꺼내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 하고 집념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고난의 장정은 시작된다.

그것을 쥐어 꺼내려니 손이 빠지지 않아 힘겹기만 하고, 꺼내지지 않으니 입 맛만 더 자극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 이것은 원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통찰이 시작되는 순간!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와진다.

그 전까지는 '갈구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 한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세상에는 더 이상 갈구할 것이 없는 그것 자체로 ‘완벽한 것’이 된다.

인류의 스승들은 주로 그것을 가르쳐 왔다.

노장자와 석가는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말로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로...

문제는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의 일부분인 '세계가 그것 자체가 완전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 자체로 구원받는다)는 이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의식의 부자유스러움’의 문제를 해결해 줄 뿐이지,

그것 자체로 ‘삶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비루한 현실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하느님, 도)에 모든 답이 있다‘고 설법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끼니는 꼭 꼭 챙겨 먹고, 수시로 물을 섭취했고, 옷을 걸치고 다니며, 지붕 있는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의식주)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것을 ‘깨달음’의 범주에 둬야하냐? 아니면

‘정신적 문제’만이 깨달음의 내용에 해당 하냐는 선각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많지만,

하여간 정신적인 문제만을 깨달음이라고 주장했던 선각자들에게도 분명 ‘밥’(의식주)이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밥’(의식주)을 이용했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 현실적인 작용을 했다는 것이고,

이는 세계로 부터 수혜 받은 만큼의 작용을 다시 되돌려야(갚아야) 하는 ‘자연적’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의식주)’에 대한 일종의 책임의 개념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자아’(대아)로 스스로를 확대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배고푼 만큼 타인의 배고픔을 알아먹을 것을 나누고, 내가 고통스러운 만큼

타인의 고통(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헤아려 행복의 길로 향하게 인도해 주는 것’.

이것은 결국 ‘대아’적으로 우리가 한 덩어리의 삶을 사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야하는

나 자식의 실행의 몫인 것이다. (이는 시혜나 자선의 관점이 아닌, 내 자신의 당연한 세계 작용이다)


이러한 대아적(사회적)삶의 ‘이해’와 ‘실천’은 ‘아! 이것은 원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통찰한 후

사과를 움켜쥔 손을 놓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왜냐하면 호리병에 들어있는 사과를 못 먹게 됨을 알아 사과를 쥔 손을 놓는 것이 무한한 평화를 이끌어 내는 것과는 별도로

그 상태에만 머물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삶’을 가능케 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아적 삶의 이해와 실천은 그러한 필요없는 집착과 분별이 끝나는 시점,

즉 사과를 놓는 시점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즉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내 먹을 것’만 찾으려는 노력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 것'만 귀한 것임을 아는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내고 있는 폐해가

세계의 파국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서 다음세대에게

‘못 먹는 사과를 호리병에서 꺼내기 위한 노력’에 경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의 포만감(행복)’ ‘조화와 화합이 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길’을 걷는

‘대아적’(사회적)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성인들은 '이것까지를 우리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마음의 탐구자라고 일컫는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이

‘사과를 내려놓은 것(분별을 끊는 것)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해를 전파시켜왔다.

이는 분명 ‘사과를 움켜 쥔이들’에게는 당장은 맞는 해답이었기에 널리 통용되어왔고,

진리적 가치의 중심이 되었다.(그리고 사실 이러한 교리의 집중적 설파는 아직도 여전히 유요하다.

왜냐하면 쓸데 없는 집착에 의해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이 현대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과를 내려놓는 방법론’의 전문가들이 ‘월권적이게도’ ‘사랑’과 ‘화합’의 문제를

이야기 해왔다는 것이다. ‘집착과 분별을 끊는 법(사과를 내려놓는 방법)’은 ‘현실적인 인간과 자연사랑의 실천,

화합, 조화’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과를 내려놓는 방법(나의 마음의 문제)’과

‘다른 먹꺼리를 찾아다니는 방법(현실의 문제)’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과를 내려놓는 방법의 전문가’들은 마치 자신들이 ‘다른 먹 꺼리를 찾는 방법’도 잘 안다는 듯한

주장을 남발해 왔다.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다른 먹꺼리를 찾는 방법(현실적 실천)’이 구체적인 정보와 사회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실천이 동반되지도 않고, 실천을 독려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진행되다보니,

‘관념론’적인 색체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 내려놓는 기술’의 대가들 중의 상당수는, 그 자신의 설법으로 깨달음을 구하려는 이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것과는 별도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수제자들의 사회적인 실천의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관념화’시킴으로 ‘대아적’(사회적) 현실이 개선되는 것을 막는 결과까지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가령 그런 부류의 스승이 ‘마음을 이렇게 내려놓으니 한없이 평안해지고 이것 자체가 완전하고 세상에

사랑이 가득 넘치는 것을 느끼지 않냐?’고 설법한다면, 그 제자들은 굳이 나가서 사회에 구체적인 사랑이

조금 더 추가하는 실천적 노력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속(관념론)으로 그렇게 ‘사랑이 가득 넘치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세계에 사랑이 가득 넘치는 것’이라고

스승이 얘기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느낌에 안주함으로 행복하고 부족한 것 없는데

뭐하로 나가서 땀 흘리면서 수고할 필요를 느끼겠는가?

하지만 노장자, 석가, 예수의 설법 이후 2천여년이 넘도록 이러한 이해는 문제되지 않았던 듯 하다.

‘마음을 내려 놓는다(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자체의 파격성이 모든 다른 가치와 이의 제기를 무시하고

그것 자체로 온전한 ‘삶’까지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굳어지면서,

이의 주장자들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현실생활의 민중의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는 ‘밥’ ‘환경’ ‘노동’ 등의 모든 이의제기와 논의를

‘마음을 내려놓아라(혹은 하나님을 믿어라)’는 한마디의 말로 일축하는 것은 폭력과 같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전까지 우리가 맹신해왔던 것이 단순히 하나의 ‘관점’임을 인식해야 한다.

정신적-관념적으로 ‘마음만 비우고’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하나의 관점에만 맹신해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이도 ‘(마음을)비워왔고’ 많이도 ‘(하나님을)믿어왔지’만

세계가 파국을 향해 치닫는 모양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 마음만 비우고' '하나님만 믿어서' 될 것 같으면 왜 세상이 이모습을 하고 있겠는가?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문제가 마음으로 ‘비우고’ ‘믿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사과를 내려놓는 기술’이 전부가 아니라, 현실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다른 먹꺼리를 찾는 노력)까지가

필요할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더불어 그것은 ‘비우고’ ‘믿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일상에서의 각 개인의 구체적 ‘관심’과 ‘고민’과 ‘결단’과

‘의지’와 ‘실천’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두루뭉술한 세계인식, 집단적 문화를

탈각하는 온전한 ‘주체’가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이해속에 하루를 보내왔는가?

무조건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신념과 무조건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강령에 안주해서

세계 속에 작용될 우리의 실천적 역량을 대기속에 퍼트리지 않았는가?

그러한 무실천의 결과로 인해서, 개선되어야할 세상이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고 있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의 어깨에 얹혀질 (물리적, 마음적) 짐의 크기가 더 커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그 내리 눌리는 힘으로 인해서 받아왔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우리의 '무지' '무실천'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중시키고 있지 않는가?

어찌하면 이 현실을 보다 '온전히'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찌하면 이 현실을 보다 온전히 알릴 수 있을 것인가?

댓글목록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작위적인 도식일 줄 모르겠는데, 위의 도식을 통해서 김윤님과의 몇일 간의 논쟁이 시작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저는 '(나가서 찾아야 하는)현실'의 문제를 거론해서 말씀 드렸는데, 김윤님은 '(무조건 비우면 되는)마음)의 문제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서로 괴리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물론 제가 '사회문제' '세계문제'에 대한 고민과 갈등, 억압으로 인해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는 것 자체로 인해서 고통받고 괴로워한다면...
그때는 김윤님께서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김윤님께서 바라셨던 바를 만들어 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문제' '세계문제'를 생각하고 실천함으로 인해서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물론 약간의 고민은 하겠지요. '다른 사람이 평범하게 사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길을 갈 것인가?'하고 말이죠.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삶 자체가 문제'인 것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소비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것이 자연은 물론 후손들의 삶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제가 갖는 번민은 극히 필요하고도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민'은 '기존의 사회가치'로 부터 이격된다는 것에 대한 '소외감' '공포감'이기에,
기존의 사회에 계속 그렇게 편안히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삶 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담 언듯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갈등' '번민'의 '장려'?는 기존의 '마음을 비우라'며 '갈등'과 '번민'이 없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도적 진리?와는 첨예한 갈등을 빚는 것 같이 보입니다.

물론 이는 실지로 그러한 괴리가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만 보일 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렸듯이...
'사과를 놓는 기술'과 '다른 먹꺼리를 찾아나서는 기술'은 다른 관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전의 '무조건 지금 자체가 완벽하다'는 표현은 '은유적'인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무조건 지금 자체가 완벽하다는 식의 경구는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의 집중, 강박의 고통 때문에
현실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게 제안되어야할 내용이지,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쓰여져야할 이야기가
아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언어적'으로 진실이라고 여기면 안되듯이 도적 표현의 그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마당이었기에 저는 '다른 먹꺼리를 찾아갈 필요'를 말씀 드렸는데
김윤님은 저에게 '사과놓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계속 말씀하시는 바람에,
이에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는 과정에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유익했지만요. ^^

무아님의 댓글

무아 아이피 (210.♡.89.228) 작성일

둥글이님이 다 좋은데, 안좋은 습관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들을 알지못하고 성인들을 자신의 잣대로 마구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이 둥글이님 말씀대로 그렇게 외골수로 치우쳤다면, 그들은 성인은 그만두고 현인도 아니고 범부일 뿐입니다.
둥글이님의 말과 같이 그렇게 정신적인 데만 치우친 자들을 어찌 성인이라 할 것입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상식 얘기하나 하자면, 
요즘 아주 문제가 되는 믿기만 하면 살인자도 천국가고 불신하면 타종교의 성인들도 지옥가는,
그런 그릇된 인식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신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자라면 신이 아니고 악마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이게 다 그릇알아서 생긴 병입니다.
지금 그런 예가 한 두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식으로 성인을 알면 그 해가 자신으로부터 나아가 그와 관계된 여러사람에게 미칩니다.

둥글이님도 종교의 성인들을 아주 많이 잘못알고 있어요.
그 잘못아는 바가 겉으로 드러날 정도가 아니라서 문제는 안생기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 위의 예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제 눈에는 본인과 타인에게 엄청난 유익의 길이 한번에 날아가 버리고, 있는 혜택을 누리기는 커녕 해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그러한지에 대해 일일이 다 들어서 말하려면, 
제 아는 한에서도 주고받기로 삼일 밤낮을 떠들어도 안될 것입니다.
노자책도 잘보면 그렇게 일변도가 아님을 알 수 있어요.
다 세상을 바르게 개혁?하는 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옛 성인들이 원론적인 것은 다 말해 놓았으나 지금 사람이 그것을 바로 알고 쓰지 못할 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를 비롯하여 요즘 사람들은 孔子를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옛것을 배우고 창작하지 않았다.
옛것을 알고보니 창작할 게 없더라 이 말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옛것을 알기나 하냐 말이죠.

제가 둥글이님에게 느끼는... 늘 안타까운 점은 이것입니다.
성인들에 대해 생각하는 둥글이님의 관점은,
제가 보기에 대단히 성급하고 편협하며 어떤 면에서는 웃기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마치 보배산의 보배들을 보지 못하고 보배는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대단히 해로운 생각입니다.
성인의 보배를 발견하여 세상에 쓰면 자신도 유익하고 세상도 유익하고 온 우주가 함께 기쁠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공자같은 성인도 그렇고, 노자같은 성인 또한 옛 전적을 보고 그것을 깨달아 도덕경을 지었던 것입니다.
지금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주견만 앞세워 재단하며,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대단한 경솔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남은 아니라도 그러는 자신에게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배워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배우기를 좋아해서 역사상 가장 혜택 본 인물로는 드러난 사실로는 孔子란 분이 있습니다.
둥글이님도 혜택 보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두번세번 반복어를 썼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워 혜택 보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아아~~~ 오햅니다.
'성인이잘 못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성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이들의 문제 해석의 잘못'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의식주)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것을 ‘깨달음’의 범주에 둬야하냐? 아니면
‘정신적 문제’만이 깨달음의 내용에 해당 하냐는 선각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많지만 ]... 에서 표현된 것 같이
성인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에서의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제가 늘상 '기독교'와 '불교''노장자적'적인 가르침을 한덩이로 거론하는 것도
그 자체가 완벽하고 그렇기에 서로간에 교통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무아님에게 동감합니다.

제가 성인을 비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아님은 제가 계속 그래왔다고 '그게 참 안타깝다'고 말씀 하시는데,
저에 대해서 너무 편견을 가져오신듯 하군요.

저는 어떤 말씀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항시' 어쩌구 저쩧다고 말씀 올리는 것은 아니고,
늘상 '한계'를 정해서 그 안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위에서도 '마음의 탐구자라고 일컫는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이'라고 한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 관점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마치 제가 그 한계까지를 넘어가서 전체적으로 싸잡는다는 식으로 여기시는 듯 합니다.

가령 '도를 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표현에 대해서
'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주장이 아닌 이상은 문제꺼리 잡을 것이 없는데,
제가 마치 '모든 사람들'로 일반화 해서 말하고 있다는 듯이 반발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무아님도 적쟎이 그런식으로 모시는 듯 합니다.

무아님이 제가 성인을 보는 관점이 잘 못된 부분에 대해서 '늘 안타까워 해주시는 점'은 참 감사하고
그 '편협하고' '성급한' '웃기기까지'한 성인에 대한 관점을 지적해주시는 노고도 높게 사드립니다.
뭐 제가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 '근거'로 드신 것이 님이 말씀 하시는 바대로 제가 '늘 성인 편협히 알고 비판해 왔다'는 것이라고 하시기에 참 억울합니다.

앞선 글 중에서 제가 언제 성인을 비판했는지요.
제 글중에 노장자-예수-석가의 이름이 거론된 수십개의 글이 있을 텐데,
그 중에서 단 한줄만이라도 가져다가 저에게 들이대 봐주시지요.

저도 앞서서 계속 성인들의 지혜를 해석하는 이들의 문제가 있다며,
이런 특정 문제에 대해서 거론할 때는 일정한 '한정'을 해서 '할수 있는 말'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무아님으로 부터 좀 똑바로 알라고 비판하시는 모습을 보니 참 난데 없습니다.
무아님이 제 주장을 그냥 대충 싸잡아서 도매값으로 넘기려고 했음이 아님을 보여주시지요.
...
거듭 말씀 드리지만, 가치논쟁으로 가면 쓸데 없는 분란과 갈등만 생깁니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낼 계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하이튼 쭉 다시 읽어보니 무아님과 같은 사려깊은 분들이 보기에도 문맥적으로 오해하실 수 있는 점이 느껴져서 좀 정정했습니다. ^^ 빨간색요.

무아님의 댓글

무아 아이피 (210.♡.89.228) 작성일

그런가요?
지난 것을 들춰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 그렇게 본 것이니, 그리고 지금와서 찾아갖고 들이대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혹시 못 찾을 것을 생각하고?

일단 둥글이님께서 억울하다 이건 선입견이고 나에 대한 편견의 발로 내지는 모함?이다. 말씀하시니, 읽었던 글을 두고 소회를 간략히 써서 둥글이님의 억울함이라도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저의 읽은 바 파악된 바를 말씀드렸으니, 그릇된 오해나 오독이 있으면 가차없이 비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전정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무엇보다 이참에 제 그릇된 선입견도 없어지면 얼마나 좋겟습니까?



먼저 둥글이님의 글입니다.


하지만 ‘아! 이것은 원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통찰이 시작되는 순간!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와진다.
그 전까지는 '갈구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 한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세상에는 더 이상 갈구할 것이 없는 그것 자체로 ‘완벽한 것’이 된다.
인류의 스승들은 주로 그것을 가르쳐 왔다.
노장자와 석가는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말로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로...

문제는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의 일부분인 '세계가 그것 자체가 완전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 자체로 구원받는다)는 이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의식의 부자유스러움’의 문제를 해결해 줄 뿐이지,
그것 자체로 ‘삶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비루한 현실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하(=>)는 이 글을 읽고난 저의 생각입니다.
=> 물론 저도 둥글이님이 성인을 비판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말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다만 둥글이님의 위의 글을 보고,

「성인들은 주로 밥의 문제 등 현실적인 것은 해결이 안되는 정신적인 문제를 주로 말해왔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밥의 문제가 그대로 지속된 것이다.」

이렇게 읽히었기에, 둥글이님은 성인들을 개인적인 것만 문제삼고 사회나 세계인류의 문제를 등한히 한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이부분을 이렇게 읽었는데, 제가 잘못읽은 것인가요?
여기까지 읽고나서 든 생각은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하느님, 도)에 모든 답이 있다‘고 설법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끼니는 꼭 꼭 챙겨 먹고, 수시로 물을 섭취했고, 옷을 걸치고 다니며, 지붕 있는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 이것은 대단한 편견입니다.
마음에 모든 답이 있다고 한 성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저는 이제것 성인의 주요한 말씀들을 읽었지만 성인의 가르침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인은 어리석은 바보가 됩니다. 그렇지요?
여기에 이르러서 자의적인 생각에 빠져 편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식주)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것을 ‘깨달음’의 범주에 둬야하냐? 아니면
‘정신적 문제’만이 깨달음의 내용에 해당 하냐는 선각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많지만,
하여간 정신적인 문제만을 깨달음이라고 주장했던 선각자들에게도 분명 ‘밥’(의식주)이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밥’(의식주)을 이용했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 현실적인 작용을 했다는 것이고,
이는 세계로 부터 수혜 받은 만큼의 작용을 다시 되돌려야(갚아야) 하는 ‘자연적’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의식주)’에 대한 일종의 책임의 개념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자아’(대아)로 스스로를 확대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속(관념론)으로 그렇게 ‘사랑이 가득 넘치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세계에 사랑이 가득 넘치는 것’이라고
스승이 얘기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느낌에 안주함으로 행복하고 부족한 것 없는데
뭐하로 나가서 땀 흘리면서 수고할 필요를 느끼겠는가?

=> 대체 그런 선각자가 선각자가 됩니까?
선각자란 못해도 성인의 윤곽이나마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건 성인의 윤곽조차 파악못한 자나 가질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는 둥글이님의 소설로 보았습니다.
선각자도 아닌 이들을 갖다가 선각자로 놓고 쓴 둥글이님의 선각자에 대한 소설 말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저절로 웃게된 것입니다.



하지만 노장자, 석가, 예수의 설법 이후 2천여년이 넘도록 이러한 이해는 문제되지 않았던 듯 하다.
‘마음을 내려 놓는다(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자체의 파격성이 모든 다른 가치와 이의 제기를 무시하고
그것 자체로 온전한 ‘삶’까지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굳어지면서,
이의 주장자들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현실생활의 민중의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는 ‘밥’ ‘환경’ ‘노동’ 등의 모든 이의제기와 논의를
‘마음을 내려놓아라(혹은 하나님을 믿어라)’는 한마디의 말로 일축하는 것은 폭력과 같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전까지 우리가 맹신해왔던 것이 단순히 하나의 ‘관점’임을 인식해야 한다.
정신적-관념적으로 ‘마음만 비우고’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하나의 관점에만 맹신해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이도 ‘(마음을)비워왔고’ 많이도 ‘(하나님을)믿어왔지’만
세계가 파국을 향해 치닫는 모양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 마음만 비우고' '하나님만 믿어서' 될 것 같으면 왜 세상이 이모습을 하고 있겠는가?

=> 이것은 결국 둥글이님이 알고 있는 성인과 성인을 따르는 고금의 선각자들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이니, 어찌 제가 그같이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겟습니까?
성인과 성인을 따르는 선각자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인이나 선각자들이 모두 어리석은 범부일 뿐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졸연히 말할 수 없으나, 간단히 말해
성인은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세상을 교화하고 진리에 돌아가는 것인데,
세상이나 밥의 문제가 진리를 벗어나 있다면 모를까 어찌 빠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성인과 선각자에 대한 둥글이님의 글에 대한 소회를 마칩니다.

둥글이님, 이 글에 댓글을 달지 않고, 둥글이님이 그건 오해다 그게 아니다 하면 저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자신만이 가장 자신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글로써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런 줄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다만 글이 그러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둥글이님은 그렇지 않은데, 제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뿐이니... 
저의 오해라면 사과드립니다.
선입견을 가진 것도 사과드리고요.

얼마든지 터놓고 말씀하시는 둥글이님의 모습이 보기가 좋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무아님은 제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군요.
언듯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뭔가를 해결할 의사를 보이신 듯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그럴 의지가 없으신 듯 하군요.

무아님은 앞서서 제가 여지껏 성인들을 계속 비하해 왔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사려깊게 일일히 설명 드리지 못한 한계가 있었음을 양해 드리면서
무아님께서 '잘 못보시고 있다. 과거로 부터 저는 성인을 무시한 적이 없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상식적으로 이에 대해서 '미안하다 찾아보고 얘기하겠다'고 해야하지 않나요?

하지만 대뜸 무아님은

[그런가요? 지난 것을 들춰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 그렇게 본 것이니, 그리고 지금와서 찾아갖고 들이대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혹시 못 찾을 것을 생각하고? ]라고 답하시는 군요.
그리고는 앞서 설명드린 문제를 다시 일일히 짚으면서 제가 성인을 비난하는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본인의 게으름의 문제를 마치 제가 사건을 왜곡할려고한다는 식의 의심을 보이십니다.
님은 이로서 같은 문제로 '세번' 저에게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지 안그런지 살펴 보시고 싶으시면 제가 앞서 쓴 글
-믿음의 중심 석가와 예수 따르기..-.
-교리적 믿음의 모순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장난
-연기, 무상, 공
등을 우선 살피시고 다시 오십시요.
제가 봤을 때 무아님은 '논쟁'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신 듯하고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말씀만큼은 없으신 것으로 보이는 군요.

님이 제기했던 말씀에 대한 설명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는 그들이 '마음(하느님, 도)에 모든 답이 있다‘고 설법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끼니는 꼭 꼭 챙겨 먹고, 수시로 물을 섭취했고, 옷을 걸치고 다니며, 지붕 있는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 이것은 대단한 편견입니다.
마음에 모든 답이 있다고 한 성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저는 이제것 성인의 주요한 말씀들을 읽었지만 성인의 가르침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인은 어리석은 바보가 됩니다. 그렇지요?
여기에 이르러서 자의적인 생각에 빠져 편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

우선 제가 성인을 비방하는 것이 아님은 저의 과거의 글을 보면 될 것이지만, 님이 관심이 없을 것이기에 제가 과거에 어떤 말씀을 올렸는가는 집어 치우고,
타인이 쓴 글을 사려깊게 살펴서 그 단어와 문장의 쓰임을 살피고자하는 의지없이
성급하게 살펴보면 위의 글에서 '그들(님이 문제삼는 실수를하는 이들)'이 '성인'이라고 지칭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님의 '헤깔림'에 대해서는 양해드리면서 빨간 글씨로까지 다시 정정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님이 문제삼는 실수를 하는)'그들'이란 성인이 아니라, '해설자'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님은 제가 성인들이 실수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시면서
'대단한 편견입니다'하고 다시 불끈 하시는 군요.
무아님은 우선 화부터 발끈 내기 전에 명확히 사안의 가부를 가리셔야 할 것입니다.
언듯 비슷한 얘기 같으면 확 저질러 보고 수습하시려는 것 같은데,
그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앞에 빨간줄로 강조해 놓은 것을 살피십시요.
[문제는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의 일부분인 '세계가 그것 자체가 완전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 자체로 구원받는다)는 이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성인의 가르침의 [모두]가 세계 자체가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인의 가르침의 [일부분]이 세계 자체가 완전하다'는 이야기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 '일부분'을 모두인 것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떠벌리고 있다고요.
 
이해안되십니까? 좀 어려운 문장이죠. 그렇담 이해가 쉽게 안되시면 '대단한 편견입니다'하면서 먼저 쏘아 붙이시지 말고 정확히 물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지만 장자, 석가, 예수의 설법 이후 2천여년이 넘도록 이러한 이해는 문제되지 않았던 듯 하다. ]
는 이야기는 '장자' '석가' '예수'가 그러한 현실 괴리된 소리를 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문장을 살피십시요. '설법이후' (설법을 잘못 해석 적용하는 이들에 의해) 2000년 이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고요.
문장 상으로도 그렇고 문맥상으로도 그 앞에 '관념론을 부추기는 스승들'의 문제를 짚었습니다.
그들중의 많은 이들 설법 이후 2000년간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썼다간 또 '그들'을 성인이라고 해석해서 반박글 쓰실 것 같아서 추가합니다면 여기서 '그들'이란 성인을 뺀 스승이라 칭함 받은 이들입니다.)


또한
[ 이러한 ‘현실(의식주)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것을 ‘깨달음’의 범주에 둬야하냐? 아니면
‘정신적 문제’만이 깨달음의 내용에 해당 하냐는 선각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이 많지만... ]에 대해서
선각자의 개념이 뭐냐고 따져 물으십니다.
저는 김기태 선생님의 경우에는 후자로 봅니다.
그리고 김기태 선생님식 방법을 포괄하는 '사회문제'까지를 다루는 분은 전자에 해당하겠죠. 그분들은 온전한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성인은 아니더라도 그러한 포괄적 방법론을 '어설프게 제시하는' 인류의 스승들이 있습니다.

하여간 이 양자의 관점은 분명 차이는 나기는 하고 김기태 선생님의 방법은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한계는 있는 듯 하지만, 그 방법들은 분명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첫 단초를 풀어낼 명백한 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죠.
 [사실 이러한 교리(김기태 선생님식의 집중적 설파)는 아직도 여전히 유요하다. 왜냐하면 쓸데 없는 집착에 의해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이 현대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뭏튼 이런 분들은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기에 '선각자'라는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스승'이기를 자처하던지 '스승역할'을 하는사람은 누구나 그런 축에 끼겠죠.

이에 대해 무아님은 '선각자'가 '성인의 풍모'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제가 제기한 선각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폄하하시는데... 과연 그렇게 해석해야할 사안입니까?



무아님은 지금 문제의 전말을 이해하고 계신듯 싶지 않습니다.
'둥글이 너는 왜 시종일관 성인을 폄하하냐?'는 식으로 공언을 하셨으면,
우선 그것이 잘 못되었음에 대해서 사과를 하실 일인데,
이글 자체만 물고 늘어지면서 오해하지도 않아도 될 문제만 잡고 계속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아님은 이런 식으로 '터놓고' 얘기해서 뭘 얻자는 것인지요.

무아님의 댓글

무아 아이피 (210.♡.89.228) 작성일

둥글이님이 몹시 기분이 나쁘셨나봅니다.
빨간색이라고 해서 빨간색?
빨간색 없는데...?
지금 보니, 아 위에
<성인들은 '이것까지를 우리에게 가르쳤다.>
이게 첨가된 것을 제가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들은 그것까지 가르쳤는데, 저는 안가르쳤다고 했으니, 화나실 만도 하네요.
어떻게 풀어드려야할까요?
제가 나쁜 놈입니다.
불끈 화나내고...
성인도 무시했다고 매도도 하고...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면서 뭘 터놓고 얘기하자는 것인지....
맞아요.
그래도 둥글이님이 할말 다했으니, 풀린 것으로 알께요.^^

비가 추적추적 내려 날씨가 좀 흐리지만,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빨간 글을 추가한 것은 내용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오독의 여지가 있어서 '각주'붙인 것이지요.

<성인들은 '이것까지를 우리에게 가르쳤다>는 말 뿐만 아니라,
그 위의 빨간글도 마찬가지인데, 문장이 좀 난해해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게 쓴점은 양해바랍니다.

저도 사람이라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를 지적함으로 제가 좀 더 온전해지기를 바라신다면
정확한 지적을 당부드립니다.

 무아님이 아직 보지 못한 제 한계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앞선 글에서 '무아'님이 저에게 비판하실수 있는 말씀은
'왜 그렇게 글을 장황하게 쓰냐!'는 말씀일 듯합니다.

그 점은 노력하고 있지만 잘 안고쳐 집니다.
양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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