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어느 그림쟁이 이야기 - 세 번째

페이지 정보

작성자 vira (110.♡.249.160) 댓글 4건 조회 8,420회 작성일 11-04-12 19:35

본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2008년 5월, 양곤의 무더위를 피해 수행을 핑계 대었으나 실은 휴식을 위해 감행한 ‘메묘’행이었지만, 예상과 다르게 수행으로 빡빡한 50여 일 간의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우 케미카’ 사야도의 배려로 인근 동굴 수행처와 사원들 그리고 밍군, 사가잉, 만달레이 등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즈음 귀국 3개월여를 남겨두고 까닭 없이 초조한 느낌에 빠지곤 하였다. 소 발자국을 보기는커녕 수행법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처음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열의가 식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자책감이 ‘바고’에 있는 ‘빤디따 라마’행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3개월만 죽자고 용맹정진하면 뭔가 이룰 수 있으리라...”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주 잘된 일이었지만, 동행했던 스님의 권유와 만류로 ‘쉐우민’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참혹한 태풍 뒤끝이라 황폐하게 변한 선원과 마을이 안타까웠다. 선원 사정상 사람을 받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지만 사정사정하여 머물 수 있었다. 200여명의 수행자들로 북적이던 아름다운 수행처는 쓰러진 나무와 날아간 지붕, 빗물 가득한 방들, 몇 명 남은 수행자들과 전기가 끊어진 밤으로 인해 더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리고 우기가 시작되어 끊임없이 바람 불고 비가 내렸다. 더 이상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고 열악한 식사와 연막 소독, 지붕 공사 등으로 편히 있기가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침 빗속 탁발 나가기와 개인 날 빨래하기가 전부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 바라보기, 누워있기, 비 바라보기, 누워있기, 탁발, 빨래, 아무 것도 하지 않음, 비, 비, 비...
그러기를 두 달여 새벽에 일어나 서양 요기 앙케이트 모음 팜플렛을 읽다가 문득, 방사능을 쐬듯 어떤 이해가 확 생김을 알았고, 의식의 전환이 있었음을 알았다. 비 그친 선원 경행로를 걸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소리, 햇빛, 몸의 움직임이 함께하고 있었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릴 수 있음’, 조금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샤워를 마치고 가사 속에 받쳐 입는 속옷을 입으려는데 갑자기 마음이 멈추어버려 그것을 들고 한참이나 서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입는 것’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일어났으며 겨우겨우 입을 수 있었다. 그땐 재미난 경험이라고 넘겨버렸으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겠다.
그즈음 외국에 초빙되어 가셨던 스승이 돌아왔고 그간의 일을 보고 드렸으며 이제 수행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간 내게 “사띠로써 낄레사를 점검하라.”라는 조언을 주셨다. 일 년 만에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한국, 공항에는 아내와 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그들을 안았으며 더 얇아진 아내의 어깨가 가슴 아팠다.
 

(2)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단순한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알아차림의 불씨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작업실에서, 집에서. 가끔 그 불빛이 사라져도 개의치 않았다. 여기저기 다른 선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하며 몇 개월을 열심히 법문을 들었으며, 이런저런 책들을 주어지는 대로 읽었다, 편견 없이. 초기 불교 수행 중 시체가 썩어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흉내 내어 시체 해부하는 곳을 몇 번 참관하기도 하고 인사동에서 옛 도반을 가끔씩 만나 차 마시고 환담하기도 하였다. 지인의 소개로 2010년 서산 간월암에서 보낸 한 달이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절 마당에서 경행하던 중 만난 아름다운 석양, 물새소리, 뱃소리,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안 가득한 달빛, 한참이나 앉아있던 그날의 파도소리... “무학대사는 저 달을 보고 깨쳤다는데...”
‘침묵의 향기’ 출판사 사장의 소개로 김기태 선생을 알게 되었으며, 거의 매달 출석하여 이 년여 강의를 들었다. 분별 판단하는 습성은 조금 내려지는 듯했지만,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지만, 생활에서 만나는 수많은 경계에 부딪혔을 때 즉각 분별을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여실히 확인하여 흔들림 없이 존재하고 싶었다. 그 간절함을 항상 품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얘기하다가도, 차 안에서도,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잠들기 전엔 항상.
 

(3)
얼마 전, 미얀마에서 짧게 만났지만 친해진 도반, 한때 잘나가는 사업가였지만 접대와 향응, 뇌물 봉투에 질려 내면의 소리를 따라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일 년여를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돌다가 수행처에서 만난 친구 ‘고 거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다람살라에서 심장병으로 갑자기 운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네팔, 카트만두의 타멜, 체리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의 만남, 엉터리 영어, 짜이와 망고, 흥겨워하던 그의 춤사위가 생각나 마음 아팠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삶이 무엇을 내게 말하고 있는가? 묻고 묻고 또 물었다.
 

(4)
그것에 대한 이해는 예기치 않게 일어났다. 한 단체에서 스승을 초빙했는데 지난 여행 시 얼떨결에 한 약속 때문에 10일간 집중수행코스에 참가하게 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별 기대하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 수행하여 깨닫는다는 생각보다는 나는 그냥 이런 일을 좋아하는 캐릭터라는 생각으로 짐을 꾸렸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릴 수 있음.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스쳐지나가는 대상들을 지켜보았다. 문득 ‘지켜보는 자’마저 대상으로 놓아버렸을 때 무아에 대한 이해가 일어났다. 이어, 그 이해에 따른 기쁨이 일어났으나 그마저도 대상으로 흘려보냈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무아’의 바탕에서 저절로 일어나며 어느 것 하나 항상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나’라는 짐을 내려놓는 자유로움과 후련함이 잠시 함께했다. 아무 것도 마음의 인상에 남지 않아 이때에는 업이고 무엇이고 할 것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설명할 수는 없으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다음날, 몇 십번을 읽었던 수행서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새롭게 이해되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읽은 것인지? 경이로운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몸과 마음은 법의 성품을 항상 보여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몰라본 것인지 아연할 뿐이었다. 항상 있었던 것. 오염된 견해와 마음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나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라든지,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이해되었다. 그러다보니 아무 문제가 없어져버렸고 너무 홀가분해져버렸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평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얼핏 소 발자국 한 귀퉁이를 본 듯한 느낌이다. 그냥 살아가면 소꼬리쯤 볼 수도 있으리라. 이해와 통찰의 기억은 잠재되어 있다가 순간순간 이면에서 작용할 것이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냥 작업실 가고, 그림 그리고, 밥 먹고, TV보며 히히덕거린다. 그래 참 가볍다.
 

 

댓글목록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173.♡.100.215) 작성일

바위처럼 침묵으로 계시는 조재익님이 화폭에다 생명을 불어 넣듯이
마음의 여정을 찬찬히 나눠주시어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그냥 살면 되는것을 ....
무엇이 그렇게 뜨겁게 수수를 달구고 내몰았는지
뒤돌아 보니 참 아득합니다 ^^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변한것은 없는데 ....그래 참 가볍다
언젠가 말돌이님이 그랬어요
모든 숙제가 사라져버린 ......그래 참 가볍다

바보처럼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되뇌이지 않아도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게 무어 대수겠어요 ^^
이렇게 무궁 다양한 일상이 있는데.....
여전히 수수는 그렇게 살지만 ^^ 참 가볍습니다
수수가 사랑하는 공기처럼 ~~~

일념집중님의 댓글

일념집중 아이피 (211.♡.129.172) 작성일

드디어, 끓는점에 도달하여, 마음이 흔적없이 수증기로 날라가버리신 모양입니다...
간절한 꿈이 이루어지셨네요...
도수가 차서 저절로 찾아온 것이겠지요.

축하드려요...짝짝짝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180.♡.6.2) 작성일

심우도의 주인공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고맙습니다.

아침님의 댓글

아침 아이피 (183.♡.215.193) 작성일

구도여정기 잘 읽었습니다
다음이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Total 6,216건 173 페이지
자유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916 권보 5711 08-05-27
1915 우병이 4332 08-05-27
1914 은진 15599 08-05-27
1913 대원 4120 08-05-27
1912 둥글이 5631 08-05-26
1911 우스개 4526 08-05-26
1910 권보 5377 08-05-26
1909 우공이산 15667 08-05-25
1908 옆에머물기 5767 08-05-24
1907 대원 4218 08-05-24
1906 권보 5026 08-05-23
1905 ahsksdl 3890 08-05-23
1904 유리알 5111 08-05-22
1903 우공이산 16045 08-05-20
1902 공자 5825 08-05-20
1901 무한 4554 08-05-20
1900 무한 3998 08-05-20
1899 공자 14503 08-05-19
1898 자몽 9882 08-05-19
1897 구름에 달 가듯 4445 08-05-18
1896 우공이산 14812 08-05-18
1895 구름에 달 가듯 4681 08-05-17
1894 구름에 달 가듯 3718 08-05-17
1893 둥글이 5193 08-05-17
1892 권보 7255 08-05-17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2,256
어제
16,777
최대
16,777
전체
5,101,544

Copyright © 2006~2018 BE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