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아래 글1에 댓글을 단 것을 다소 추가해서 올립니다.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는 것을 삶의 바다에 들어온다라고 표현한다면 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많은 물을 마시게 되니 이것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삶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어느 순간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물에 저항하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면서 몸에 힘을 빼면 이상하게도 물에 익숙해 지면서 물도 적게 마시게 됩니다. 이것을 일러 마음을 쉰다라고 비유할 수 있겠네요.
이 경우가 살아가면서 겪었던 온갖 비참함, 괴로움, 불행등으로 부터 자유로와지고 이때부터는 몸과 마음이 제법 편해지게 됩니다. 이를 일러 견성이라 하며 이 체험을 한 분들이 몸과 마음이 편해지니 여기에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물에 제법 익숙하게 되면서부터 간혹 잠수도 해보곤 그 이전에 못보던 물속 구경도 하니 삶이 즐겁습니다.
물속의 움직임이 익숙해지니 여유가 생겨 불성이라는 진주를 찾아서 더욱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는 이들이 많으나 깊은 곳에는 수압이 있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이미 한번 다녀오신 분들이 후인을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줄이나 또는 무거운 추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화두나 설법 등에 비유하면 되겠습니다.
진주를 찾는데 화두나 청법(聽法)이나 자기 탐구 무엇이던지 다 가능하며 처음부터 화두로 시작해서 화두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노력을 한다고 해서 빨리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마칠 때까지 쉬지 않고 이 일에 항상 관심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부도 세속의 공부와 마찬가지로 퇴보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물에 익숙해진 후 진주를 건지는 것은 보통은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이것을 돈오점수라고 하고 물에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진주를 건지게 되는 것을 돈오돈수라고 합니다. 그러니 돈오돈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선지식들은 돈오점수를 경험하게 되니 이를 일러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事非頓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이치는 단박에 깨달으나 일을 마치는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나면 어느 방법이던 그 성취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물에 들어온 뒤 마침내 물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진주를 끝내 못 건진 것을 견성했다고만 하지 성불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겨우 견성만 하고서 부처의 흉내를 내는 것은 꿈 하나를 깨는 듯하다가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왜냐면 보통은 악몽은 깨고 싶어하니 깨기가 쉬운데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이미 꿈을 깼다고 착각하는 이는 여간 꿈을 깨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머리로 이해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등산로 입구에 있는 커다란 공원표지판에 있는 등산로의 루트를 상세히 보고 알았다 하더라도 직접 본인이 등산하지 않으면 정상에 다다를 수 없듯이 직접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등산로는 경전에 비유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경전을 다 읽어야 정상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조혜능스님의 경우 처음 듣는 금강경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인하여 바로 이 문안에 들어오기도 왔다고 하지요. 때문에 학인에게 친절하게 지도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을 대승불교라고 한다면 냉정하게 당장 갈 곳을 잃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선(禪)의 직지(直指)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현재 과거 미래를 벗어나니 아무리 정의를 내린다한들 마치 흐르는 물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면서 이것은 물이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바로 지금 이 자리라는 말도 생겼겠지요. 그래서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말보다는 부처는 뜰앞에 잣나무같은 말이 좀 더 올바른 표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왜냐면 물을 찾는 학인에게 호수의 사진을 보여주기보다는 컵에 물을 담아 주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는 허공과 같은 이것은 모습도 없고 스스로 판단과 분별작용이 없습니다. 마치 거울은 스스로 자기가 거울임을 알지 못하며 거울 속에 비치는 대상을 확인하고서야 그 존재가 거울임을 사용하는 이가 알 수 있듯이 이 존재는 상대적인 인식 속에서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공부가 익은 사람은 두두물물이 부처라는 말을 할수가 있겠지요.
이 자리에서는 대부분의 번뇌 망상이 소멸한다고 해서 적멸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해야할 일이 없다라는 의미에서 “일을 마쳤다“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렇다고 몸을 가진 존재가 살아가면서 소소한 즐거움이나 세번뇌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이 생기더라도 몸밖의 물건과 마찬가지로 그 대상에 전혀 끌려 다니지 않기에 무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석이 되는 것은 아니라 인연에 따라 후학들에게 법을 펴기도 하나 보통은 일을 벌리기 보다는 소리 소문없이 조용히 생을 마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 자리를 체득한 사람에게는 육체의 망상과와 존재의 여여함이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가 아니며 번뇌를 보리로 볼수 있는 지혜가 생기니 불완전함이 그대로 완전함이 됩니다. 그래서 소승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하는 말에 반박하면서, 삶은 완벽하다(Life is perfect)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 epilogue
평생 농사만 짓던 무지한 농부도, 인생을 향락으로 날려버린 탕자도, 악행을 일삼던 흉악범도 한 순간 마음을 돌이키면서 곧바로 이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를 일러 경전에 일초즉입 여래지라고 하던가요? 여기에 단지 필요한 것은 방하착이라는 의식의 무장해제입니다.
가장 깨닫기 힘든 사람은 밀가루에 기름이 배인 것처럼 의식에 선입견이 가득한채 이것을 증득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비유를 들면 선지식이라는 외과의사가 수술을 할려고 중생이라는 환자를 수술대에 누이고 수승한 법문이라는 강도높은 마취제를 투여했는데 알음알이라는 내성이 생겨서 방하착이라는 마취는 안되고 눈만 말뚱말뚱하고 있으니 도저히 견성이라는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평생 신심을 가지고 경전읽기, 참선, 독경, 염불, 사경 등 온갖 신행활동은 다 해오고 있어서 스스로는 남들보다 공부가 많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알음알이를 가진 분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찰에 다니시는 불자들이 기복불교에만 너무 매몰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눈밝은 선지식이 드물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제대로 역활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중생이라는 소를 먹이는 목동(법사)은 견성이라는 풀이 있는 곳만 찾아 다녀야 하는데도 이 풀을 구경해 본 목동이 드물기에 소들에게 이 풀을 먹일 기회가 적다는 것과 또한 사찰확충 신도증가와 같은 외적인 성장에만 중요시하여 당장 몸에는 좋지는 않지만 맛은 좋은 패스트푸트와 다름없는 기복행위에 집착한 결과 오늘 날 많은 불자들에게 선입견을 안겨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경우 너무 꼭 들어맞는 속담이 하나 있지요. 아는 것이 병이다라고. 맞습니다. 이 일을 체험하기 전이라면 경전에 내용은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살아가면서 고통을 많이 겪어서 꿈을 깨고 싶다는 욕구가 간절한 이가 올바른 선지식을 만난다면 그것으로 이 일을 체험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완성됩니다.
티벳불교의 좋은 점중에 하나는 목동(법사)이 되는 자격에는 승려와 재가자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승려라 할지라도 이 일을 모르는 이는 법사 대접을 받지 못하며 결혼한 재가자라 할지라도 이 일을 아는 이는 승려와 재가자들을 상대로 법을 펴고 있습니다. 승복을 입었다하더라도 이 일에 깜깜한 스님이 불자를 상대로 법을 펴는 일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으로 결국 업을 짓는 일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숭산스님께서 외국인에게 포교하면서 만든 관음선종에서도 승려와 재가자를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관음선종의 인가받은 법사들이 펴는 힘있는 설법이 기존 사찰 신도들에게 인기를 끌다보니 관음선종의 현각, 청안, 무심스님같은 출가법사는 물론이고 우봉스님같은 재가법사들 마저 전국 곳곳의 신흥 사찰이나 선원에 초청받아 설법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비록 배움의 과정에서 어떤 체험이 계신 분이라 하더라도 본래면목을 찾아서 일을 마쳤다라는 확신이 들기 전이라면 또한 눈밝은 선지식의 인가라도 받기 전이시라면 이 일을 비록 자비심의 발로에서 언급하시더라도 그것이 후학들에게 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여기 주인장이신 김기태선생께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는데 객이 주인장을 대신하여 여러 선객들에게 한 말씀올린 것을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