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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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름에 달 가듯 (125.♡.100.209) 댓글 3건 조회 5,112회 작성일 08-07-22 14:57본문
무의식과
의식(이드,자아,초자아)으로 나뉜다.(편의상의 구분이지 다 한마음임)
의식과 무의식의 본성은 몸과 마음의 안정된 상태및 평형을 추구함
이드:본능및 쾌락을 추구함
본능:식욕,수면욕,성욕...
쾌락추구:열등감,미움 ,소심함,연약함,분노,불안,질투,두려움등은 배척하여 쾌락을 추구하며
자긍심,사랑,너그러움,강함.기쁨,안전,이해,평안등은 수용하여 쾌락을 추구함
자아:현실인식,정보수집,방법모색및 실행
초자아:마음의 법관,가치관,양심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보면
이드(쾌락추구)와 초자아 (마음의 법관)와의 갈등 상황의 연속이며
갈등상황으로 생긴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일련의 작용에 괴로워 하고 있을 뿐이다.
갈등상황을 세분화 해보면
1)옳지 못하다고 인식한 이드가 초자아를 눌러 행동화 한경우
2)옳지 못하다고 인식한 이드가 초자아에 눌러 행동화 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는경우
3)옳다고 인식한 이드,초자아가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때
4)옳다고 인식한 이드,초자아가 현실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을때
1)의 경우 초자아가 상처를 받기 때문에 (초자아가 상처받음을 무시하거나,회복 두가지의 경우발생)
무시의 경우: 방어기제(부정,투사,왜곡,동일시,퇴행,반동형성...)작용 >>>그러한 방어기제를 사용했다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으므로 열등감및 자긍심이 손상됨
회복의 경우(심 진여문):손상된초자아를 회복 해야하는 인의 씨았이 생기게 된다.>>>양심,가치관,자긍심 유지
2)의 경우 이드의 긴장 ,육체적,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태유지 되어지나
의해서 현재의 발전된 내가 있으며 ,이드를 따랐을 때는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므로
3)의 경우 육체적 심리적 기쁨및 평형유지>>>자신에 대한 믿음,사랑,자긍심이 향상됨
4)의 경우 이드의 불만족으로 육체적,심리적으로 긴장및 불편한상태유지
위의 경우로 인해
인이 생기며 연을 만나게 되면 인연의 인연의 결과인 ,업,윤회(구속됨)가 생김.
위의 각각의 결과로 인한 쾌락과 고통의 메카니즘을 살펴보면
1)의 경우 쾌락이 먼저 오고 긴장상태의 유지이며
2),4)의 경우 긴장상태의 유지
3)의 경우 현실화 될때까지 긴장을 유지하다 현실화 되면서 긴장이 해소되며 쾌락이 찾아옴)
이것의 축적은
각 경우가 긴장이 먼저 오느냐 쾌락이 먼저 오느야의 차이지
자유롭지 않다는 관점에서 보면 조삼모사 이며 마음의 장난에 불과하다.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것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
믿음
이해 입니다.
댓글목록
대원님의 댓글
대원 아이피 (211.♡.76.47) 작성일
반갑습니다.
지금 구름에 달님이.쓰고 있는 그것을 보십시오, 무엇이 사랑이라 하고 무엇이 한자 한자 글을 남기는 지요
무엇이 손을 움직이고 무엇이 생각을 해서 지금 글을 쓰고 있습니까.
지금 쓰는 그것이 도입니다,말하는 그것이 도고 보는 그것이 도고 듣는 그것이 도입니다.
도가 없으면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합니다.
그저 스스로을 보세요, 회광반조라 하지요. 무엇이 있어서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는 그것이 마음입니다. 눈깜짝하는 그것이 마음이예요.
도니 마음이니 불성이니 모두 이름입니다 그저 쓰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구름에 달 가듯님의 댓글
구름에 달 가듯 아이피 (125.♡.100.209) 작성일
대원님의 관심 고맙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정견을 갖추신것 같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알음알음이 가 아닌지 의심도 되고
걱정되는 마음도 들고 그러네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요에
발을굴러 바다를 뒤집고
손가락을 뜅겨 수미산을 뽑아올리고
5온이 24시간 지혜의 광명을 놓더라도
고봉 문하에서는 인정할수 없다고 하시며.
공겁 이전을 엿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능가경엔
자심의 견을 깨달으면
그 때엔 두견을 떠나서
여실히 멀리 떠남을 아니
분별 상을 없앤 것은 아니다.
대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대원님의 댓글
대원 아이피 (211.♡.76.19) 작성일
반갑습니다.
의심을 갖는것 당연합니다.어떤 말을 들어도 본인에게 다가오는 것이 없어서 그래요.
그러나 공부을 하다보면 어떤것이 정법의 글인지 알수가 있어요, 그것데 그것은 하나의 전제가 있어요,
자신의 안목이 어느선까지 열렸냐입니다.
열린만큼 믿게됩니다. 세간의 공부도 마찬가지 지요.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그범위에서 사는것이 아니겠어요.
공부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참 아음을 보는 것입니다.
능가경 이야기을 하셨군요,
저는 능가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번 설명을 드리지요. 분별하는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이 부처라고 했어요,
분별이 부처입니다. 그런데 지금사람들이 분별하는 내용을 따라서 그것이 자기인줄안다 이말입니다.
분별하는 내용 말고 그렇게 행위하는 그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그자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분별을 한다고 합니다.내가 부처을 찾아다녀요,
찾은 그것이 부처입니다, 내라는 것은 어디을 찾아봐도 없어요,
찾는그것이 진짜 내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