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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믿음에 스며든 태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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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187.52) 댓글 7건 조회 5,476회 작성일 11-05-2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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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교리에 스며든 태만의 역사
(그간 기독교인과 노장추종자들은 많이 깠으니까 이번에는 불교도들을 까보도록 하자.)

1. 불교 까기를 시작하며

물론 목사님만큼은 아니지만 둥글이는 스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대오각성’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둥글이는 이에 참으로 큰 아쉬움을 갖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의 은혜를 받는 과정인데, ‘세상의 문제보다는 내 자신이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망상을 없애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면벽수행만 하고 있는 모습은 받아먹기만 하고
뱉어내지는 않겠다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자기 내면의 고뇌와 고통의 원천인 ‘나’라는 아상을 없애야 한다는 다소간의 집착
증을 가지고들 있는 듯하다. 하여 이를 없애기 위해서 수련의 수련을 거듭한다. 하지만 둥
글이가 숙고해본 바에 의하면, 스님들이 그리 ‘나’를 없애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을 투자?
하며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현재 만
들어진 교리’가 그렇게 하게끔 그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이는 과거로부터의 전
세계의 종교의 역사를 통해 일괄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기실 전제군주들은 종교를 통해
서 그에 소속된 백성들이 순종하는 양이 되어 그 도시와 나라와 국가를 시끄럽게 하지 않아
주었으면 했고, ‘종교의 교리’속에 그러한 ‘책략’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2. 실천성을 거세한 종교들

가령 천주교는 그 종교의 교리를 다듬고 권장한 지배자들(로마인)에 의해서 ‘현실 실천적’
요소를 모두 거세시키고 ‘천국의 기원’만 해대게끔 만들어 졌다. 초기기독교의 숭고한 저항
의식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서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깡그리 사라졌고, 백성들은 면
죄부를 구입하기 위해서 자기 먹을 식량까지 팔아 치우는 성의를 보임으로 교황에게는 1석
2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루터에 의해서 주창된 현재의 기독교는 16세기 당시 형성되던 ‘국가’와 ‘상업자본’의 요구에
따라서 ‘청교도원리’까지를 파생시키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지우고, 오히려 ‘부자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주
신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죄다.’라는 교리까지 만들어갔다. 이에 민중들은 이 땅을 ‘하느님
의 나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돈 있는 자가 돈 없는 자를 집어 삼키는 ‘동물의 왕
국’을 만들어 냈다.

노장사상의 토대가 되는 도덕경은 조조의 수하에 있던 천재 학자인 왕필을 통해서 재구성되
었는데, 도덕경의 장수를 바꾸고 교묘히 주석을 달게 하였다. 이에 의해서 중국 대륙을 떠
들썩하게 만들었던 ‘황건적의 난’의 기반이 되었던 실천적 혁명적 운동의 사상적 토대는 거
창하고 그럴싸한 존재론적 철학으로 뒤바뀌었다. 원래는 위치가 훨씬 뒤쪽이었지만, 왕필은
노장주의자들의 성경인 도덕경의 첫 장을 다음과 같이 장식하게 만들었다. ‘명가명비상명
도가도비상도’(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게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도라고 얘기되어지는
것이 도가 아니다.) 조조는 혼란한 사회상황을 잠재우고자 백성들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관
심을 끊고, 이러한 얘기나 씨부리면서 존재를 회의하는데 한 세 월 보낼 수 있게 하도록 왕
필을 독려했던 것이고, 왕필은 천재 학자답게 ‘초두효과’의 작용을 극대화 하여 이를 접한
백성들이 존재에 대한 회의에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도덕경을 편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
로 이천 몇 백 년이지나 먼 나라 한국도 이의 주절거림에만 온 힘을 다하는 이들이 부지기
수로 넘쳐나는 것을 볼 때, 조조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왕필을 참으로 적절히
등용했던 것이다.

3. 실천적성을 거세한 불교

하여간 이러한 상황이기에 ‘불교’라고 해서 그 함정을 피해갔을리는 만무하다. 피해가기는
커녕 불교는 아마 다른 그 어떤 종교보다도 더 ‘사회적 무관심, 무실천성’이 적극적으로 삼
투된 종교이다. 기실 고래로부터 상당한 잘 못을 저지른 중죄인의 경우에도 삭발하고 절로
들어가면 봐주던 관행이 있음을 볼 때, 전제군주와 불교지도자들 사이에는 교리를 재편하기
위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정일치의 사회였을 때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
었지만, 제정이 분리되면서 강력한 물리력을 확보한 왕은 불교도들의 사회참여를 제한시켰
던 것이고, 이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교리’가 재편되었던 것이다.

기실 불교도들이 ‘석가의 말씀’이라고 현시대에 열심히 잡고 늘어지고 있는 것은 ‘석가의 말
씀’이라기보다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걸쳐서 불교도들이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으면 싶어 하는
왕에 의해서 필터링 되어진 ‘재편집된 석가의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간 민주주의와 역사와 사회정의 교육이 차분히 강화해왔던 것을 이명박 정부가 불과 한순

간에 깡그리 뒤바꿔 놓음으로 학생들의 역사의식이 비루해지고 있음을 보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전제국가의 왕들이 과거 2500년 동안 ‘일괄적’으로 사회적 실천성이 거세
된 교리를 불교에 삼투시켰음의 영향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결과 상당수의 스님들은 벽보고 앉아서 오직 ‘나를 없애고자 하는’ 일에만 온 힘을 다하
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중대한 인생사의 문제로 추호도 의심치 않는 것이다. 실로 개미 다
리를 하나 가지고 수십 년간 연구를 해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것처럼 수십 년에 걸친 ‘나
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은 거창한 미사어구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추종자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보자. 불교도들은 ‘무아’(내가 없음)를 알고, ‘무상’의 깨달아 스스로를
‘해탈’시켜야 한다고 여기며, 그 단초가 되는 자기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데, 단 한사람이라도 무아를 실현한 사람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내가 없음’의 사실은
‘내가 왜 없는지’를 살핌으로 인해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의 방식’의 통해서 살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사
회적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하지만 관계를 두절하고, 벽을 마주하고 앉아 그렇게 별 쓸데없는 말장난에나 집착하고 있
으니 과거 2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전제군주들은(이명박 포함)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 힘없는 민초들은 압제자에 의해서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해왔겠는가?

이는 천주교든, 기독교든, 도교든, 불교도든 자신들이 지금 대하고 있는 교리의 역사성을 모
르고 오직 그 주어지는 관념의 끄트머리만 잡고 있으려는 종교인들의 비성찰적인 태도로부
터 기인한다. 하지만 한발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4. 실천성이 접목된 온전한 불교

가령 앞서 불교교리의 ‘무아’ ‘무상’ ‘해탈’의 문제도 전제군주의 책략에 따라서 면벽수행에
집착하던 방식을 벗어나면, 똑같은 문제를 숙고하면서도 ‘실천성’을 갖고 ‘삶으로서’ 실현할
수 있다. 일반 불교도들은 ‘무아’를 ‘내가 없음’으로 이해해버린다. 이에 끊임없는 관념놀이
와 감각의 단절 놀이가 파생된다. 하지만 이 ‘무아’라는 것을 ‘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이해가 아닌 ‘과거와 같은 편협한 나가 없음’의 의미로 바꾸어 보자. 그렇게 하면 ‘무아’
를 추구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꺼리’가 드러나 보여 진다.

또한 ‘무상’이라는 것도 ‘허무’의 의미로 보지 말자. 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
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선 ‘무아’의 문제와 연결해서 내
자신의 편협한 개인주의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끊임없이 변하고 역동(무상)하는 세계에 나를
내 던져(자아의 확대) 내가 현재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면, 결국 두 개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고 결국 이를 ‘해탈’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나가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 상태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관념놀
이에 불구할 수가 있고, 세상에 단 한명도 그렇게 ‘나’를 소멸시킨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
되도 않는 일에 매달려서 허송세월하면서 이명박 각하 같은 사람들 좋은 일 할 일이 아니
라, 차라리 그 ‘나’를 확장해서 이웃과 사회와 인류와 자연으로 뻗으라는 얘기다.

이리하면 과거의 나는 없어져서 ‘무아’가 되고, 그렇게 인류와 자연으로까지 뻗어진 자아는
끊임없이 역동하므로 일정한 상이 없는 상태인 ‘무상’이 되고, 이게 결국 ‘해탈’이라는 것이
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해탈한 결과가 세상의 평화와 자유를 증가시킨다. 그러한 ‘삶’ 을 살
아낸 만큼 차곡차곡 그의 자비는 세계에 전파된다. 이는 불교의 ‘연기원리’의 실현이다.

나를 없애는 노력을 통해서 ‘무상’을 얻고, ‘해탈’하려는 노력은 기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형의상학에 빠진다. 이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의 성취를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앞선 ‘나의 자아의 확장’을 통한 노력은 ‘지금 여기’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그야말로
‘삶의 과정’으로서의 그것이 가능하지만, 상당수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언젠가 성취될지 알
수 없는 내가 없어진 어떤 상태’는 이를 위해서 ‘지금 여기’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
금 여기’에서의 성취를 미루는 그 어떤 원리도 그 존재에게 올바른 성찰을 줄 수 없다. 그
리고 그것은 바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고래로부터 2500년간 이명박 각하 같은 분들이 ‘제
발 그래주기를 바래서’ 종교의 교리 속에 쑤셔 놓았던 바로 그것이다.

둥글이는 이 때문에도 자신들이 고민하고 있는 바의 원인과 이유와 의미와 작용이 어떤 것
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 현학적 개념에만 매달리는 스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이 일상과 사회와 자연을 떠났을 때 이미 이는 형이상학으로 변해있는 것
이다.

진정한 수련과 자기 성찰은 ‘잘 삶의 체현적 실현’이 아닐까? ‘나’라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아상을 깨부수고 이를 확장해서 ‘세계’가 된 내가 세계를 내 안에 품고 세계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을 실현한다는 의미의 그것... 부조리에 저항하고, 약자의 대변인이 되며,
환경을 지키고,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이것이 단순한 구호성 운동이 아니라, 그야 말
로 삶 자체가 되는!

5.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상

물론 그렇다고 스님들의 자기수련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분명 그들이 스스로의 욕
망을 절제하고 자기 수련에 힘쓰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고뇌의
결과를 사회적으로 환원하지 못하고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작금의 주류적 불교도들은 다만 개인주의의 한계 속에서 자기 좋은 것을 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시대에는 통렬한 자기 성찰과 함께 사회에 대한 비판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이러
한 이들이야 말로 작금의 시대를 개혁할 가장 필요한 이들이다. 여태껏 이 사회는 ‘독재자’
들과 대항을 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에게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투쟁의 기치를 높여온 ‘투
사’들을 수도 없이 길러냈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 대한 고민은 않고 오직 외부의 적에 대해
서만 비판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 그 시대가 요구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외부의 적도 적이지만, 작금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이 일상적으로 적응한 물질문명 - 자본주의적 삶이 빚어내는 ‘재앙’이다.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의 터전인 환경 파괴는 물론,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존립자체를 불가
능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을 스스로가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위기의 극
복을 위해서 우리는 이제 ‘자기 성찰’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이는 관념
적인 허상 (내가 없음)을 쫓기 위한 자기 성찰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세계관계망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기 성찰’을 말함이다.

결국 이 시대 가장 필요로 하는 인물은 바로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력’을 동시에 갖춘 인
물이라 할 것이다. 즉 사회 문제의 원인을 자기 내면에서 찾을 줄 알면서 동시에 그러한 성
찰의 결과를 사회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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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대의 불교는 그리하기는 커녕 잘해야 ‘자기 수련’이고, 조금 빗나가면 ‘영생’과

‘기복’으로 치우쳐져 있으니...]

댓글목록

일호님의 댓글

일호 아이피 (14.♡.40.191) 작성일

동글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올려주신 글, 역시 변치않은 모습이십니다. ^^

말씀중에,
결국 이 시대 가장 필요로 하는 인물은 바로 ‘자기 성찰’과 ‘사회 비판력’을 동시에 갖춘 인
물이라 할 것이다. 즉 사회 문제의 원인을 자기 내면에서 찾을 줄 알면서 동시에 그러한 성
찰의 결과를 사회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 시대 가장 필요로 하는 인물..... 제 생각엔 딱 '아무개'입니다. 아무개는 나이깨라는 책을 낸 분인데,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미 하셨고요. 또, 자리이타로 살아가시는 분이시죠.

'영생'과 '기복'.
누구든지 오래 오래 잘 살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렇게 바라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이니, 아무리 바란다 해도 영생과 복은 그들의 차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영생과 기복을 바라는 분들은 이미 영생과 복을 얻지 못해 고통받고 있으니, 둥글이님께서는 너무 언짢아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187.52) 작성일

아... 그 책도 한번 시간날 때 참조해봐야겠군요.

[영생과 기복을 바라는 분들은 이미 영생과 복을 얻지 못해 고통받고 있으니,
둥글이님께서는 너무 언짢아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는 이야기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화나는 것은 그들이 그 '고통'을 자신의 것만으로 끝낼 생각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권장한다는 것이지요. ㅠㅡ

저는 사실 '나를 찾는 답시고, 비움을 추구하는 사고' 자체도 이러한 '영상'과 '기복'의 한 형태
라고 생각합니다. ^^ 좌우지간 말씀 감사합니다.

꽃씨님의 댓글

꽃씨 아이피 (110.♡.211.115) 작성일

요즘도 생명평화 결사 계속 하시나요?
온숨..백배서원문 시디에 꽃씨의 목소리 탁발이 있었다는 걸
모르셨을 겁니다..
가수 김원중씨와 목사님..성공회 신부님..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
구미 오시면 연락하시라고 말만하구선..
전화번호를 바꿔버렸었네요 ㅋㅋ
설마 전화 하시진 않으셨겠지요?

일호님의 댓글

일호 아이피 (14.♡.40.191) 작성일

둥글이님 한동안 안 보이셨는데 바쁘셨나요? 보통 이런 온라인 게시판은 한동안 떠나게 되면 그냥 발걸음을 끊게 되잖아요. 직접 얼굴보고 인사한 게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요. 다시 또 이렇게 들러주시니 김기태의 경전다시읽기 싸이트를 사랑하시나 봐요. ^^

둥글이님은 제가 알기로는 이 싸이트에 오신지 굉장히 오래되셨는데요. 처음에 오셨을때랑 지금이랑 변화는 없었나요? 전 둥글이님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간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의 눈에 비치기로는 '약간 달라진 것 같다'고 합니다만.^^

그럼, 둥글이님은,
예를 들어서, 교회 전도하시는 분들이 둥글이님께 '전도'를 하면, 그것때문에 '화'가 나시는지요?

일호님의 댓글

일호 아이피 (14.♡.40.191) 작성일

목소리 탁발이라....

그거 음성으로 목탁소리 흉내내는 건가요? 보통은 볼을 부풀려가지고 손으로 볼을 때리면서 목탁소리 흉내내잖아요.

가수 김원중씨......저보고 '노래를 많이 안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벌써 13년전이네요.
아~ 세월도 빠르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187.52) 작성일

아예.. 궁금증도 많으시군요.

저는 나름대로 배낭을 하나메고 유랑을 다니면서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세상이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바꿔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역량을 가진 분들이 '도'하시는 분들의 정신에 있습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도를 추구하시는 분이 지극히 '주관적인 관념론'에 머물고 있는 듯 해 보이고, 이 때문에 '나만 비우면 된다.' '세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우선 깨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는 식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견 초월론적인 생각에 빠져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회실천적 의식'이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여 저는 그 '도'하시는 분들이 허황된 개념인 '나'에 빠져만 있지 않고 '내가 관계하는 세상의 문제' 속에 역동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된다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끊임없이 하나마나한 말들(비워라, 내 자신이 제대로 서야 한다.)만 관념적으로 주절거리지 않고, 그 자신은 물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까지 긍정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바라는 세상이 조금더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러한 글을 보신 분들 중에 '그래 너무 내 자신에만 빠져 있지 말고 세상의 문제도 보자' '실천도 하자.'는 생각을 하실 분들이 있다면, 이는 제가 돌아다니면서 캠페인 하는 것보다 한편으로는 더 욱 큰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그 양자를 나름대로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동안 떠나 있었던 것은 제가 말이 많다는 것을 저 스스로도 알고 있고, 괜히 잔소리만 많이 하면 부작용이 옴을 알기 있기 때문에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요. 나름대로의 마음은 늘 이곳 게시판에 잔소리?를 남기고 싶었습니다.ㅋ (그리고 사실 유랑다니면서는 이런 글 쓰기가 쉽지 않거든요. 의식주 해결하기도 빠듯합니다.ㅠㅡ)


그리고 '전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화가나나요?'라고 여쭤 오시는데, 전도 행위 자체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전도뿐만 아니라, 대순진리교 사람들이이 와도 저는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들 각각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지 궁금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이 가진 생각을 하나 하나 헤집다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생각이 가진 부조리, 비약이 보여집니다. 이런 때는 주저 없이 그 이야기를 말하죠. 그러면 그분들 상당수는 되지도 않는 말로, 혹은 감정적으로 상황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음이 없다느니' '깨여봐야 안다느니'하며 인신공격합니다. 이런 때는 화를 내지요. ㅋ 하여간 그렇습니다. 좌우지간 일호님은 궁금증도 많으셔.ㅋ

일호님의 댓글

일호 아이피 (14.♡.40.191) 작성일

궁금한게 많은 건 제가 아니라 둥글이님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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