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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곡(思父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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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보 (125.♡.91.239) 댓글 0건 조회 5,142회 작성일 08-10-3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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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랫만에 글을 올립니다.
시월의 끝날 아침, 돌아가신 부모님께 드리는 한통의 편지가 저를 울립니다.
서프라이즈에 nightowl이란 필명으로 가끔씩 글을 올리는 분이신데, 오늘은 절 아주 펑펑 울게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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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靈前에 이 글을 바칩니다.

밤 택시 6년차 nightowl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버지께서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형님에게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 눈을 감으셨기에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을 마음 한구석에 담았습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주일간 조문객을 맞이하고 아버지를 땅에 묻고 그 무덤에 꽃을 헌화하며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한평생을 묵상하고 기념하였습니다.
더불어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온 저의 부끄러운 일기들도 한 장씩 꺼내보았습니다. '왜 아버지처럼 살아오지 못했을까!'라는 회한이 밀려올 때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8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를 뵈었을 때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이 마지막 대화가 되었기에 세상과 자손들에게 남기신 유언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버지를 세상에서 떠나보내며 당신이 남기신 유언과 유지가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삶. 그 자체가 유언이라는 것을.
1932년 평양에서 북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평안남도에서 8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신 아버지께서는 당시 수재들만 다닌다는 평양제일고에 합격하여 평양의 출가하신 누님 집에서 유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고 소련군이 평양에 주둔하여 조선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산당식 개혁을 단행해 나가던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성장하신 아버지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시대적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격동의 공간에서 아버지께서 내리신 결론은 '이건 아니다!'였다고 보여집니다. 언젠가 저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일제잔재의 과감한 청산과 토지개혁 등의 과정들에 대해서는 많은 지지를 보내면서도, 소련이라는 외세의 개입과 때로는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인민재판식 개혁들이 아버지로 하여금 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하였고,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진행되는 인민의 지지도 아버지께는 일종의 공포로 다가온 듯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아버지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대 사변이었습니다. 인민군의 승전소식이 평양시내를 뒤덮던 전세는 하루아침에 역전되어 매일같이 엄습해오는 폭격의 공포가 평양 하늘을 뒤덮었고 아름답고 찬란했던 평양의 구석구석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공습을 피해 숨어들어 간 누님 집의 지하 방공호는 인민군 차출을 거부하는 도피의 지하실이 되었습니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했던 그 짧았던 가을, 아버지는 이미 전쟁의 대세가 미군과 국군에 기울었다고 판단하신 듯하였습니다. 정확히 말씀은 안 하셨지만 잠시나마 국군 일을 도와주시기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고 대대적인 철수가 감행될 때 아버지께서도 피난을 결행하셨습니다. 집안에서도 장남은 꼭 살아야 한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당신께서도 당시의 후퇴가 그렇게 길어지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사랑하는 부모님 누님들 그리고 동생들과 변변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피난길에 오르신 바로 그 순간이, 한평생을 그리움에 치를 떠는 생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피난길에 폭탄파편이 스쳐 지나간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하마터면 우리 아들도 못 볼 뻔했다우~구수한 평안도 사투리와 함께 저를 안아 올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내려온 낯선 남한땅, 아버지는 곧바로 국군에 차출되었습니다. 당시 북쪽에서 내려온 젊은 청년들은 거의 모두가 국군에 차출되어 최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아버지께서는 미군 특수부대에 배치되어 중공군과의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이 전쟁이 미국과 남한의 승리로 끝날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으나 아버지는 제대를 하지 못하고 전시상황과 다름없었던 서해안 강화도 부근에 배치되어 다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었던 이북출신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알받이가 되었습니다. 수 많은 작전중에는 북쪽의 개성에까지 침투하여 적진을 교란하는 임무도 주어졌습니다.
영화 실미도는 아버지의 군생활에 비하면 '새발의 피'나 다름없었습니다. 군번도 없이 남한의 총알받이로 보낸 군 복무 7년이라는 세월은, 살아서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버틴 세월이었음과 동시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남한사회를 온몸으로 체험한 세월이었습니다.
식량이 배급되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에서 다 가로채기가 일쑤였고, 후임병들이 먼저 제대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흘렸을 그 고통의 눈물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피 끓는 청년이 겪어야 했던 온갖 멸시와 불평등을 어찌 이 머리로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보자기 하나 달랑 매고 30대가 다 된 나이에 접한 남한사회의 실상은 또 어떠했습니까!
깊은 절망의 나락에서 아버지께서는 초야에 당신을 묻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평양제일고 출신의 엘리트. 평양에서 국군을 도왔었고, 미군 특수부대 출신에 서해안 전방에서 7년이란 세월을 인민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거친 경력이라면, 학교 소사가 교장 되던 시절 '반공'의 머리띠 하나만 둘러매면 한자리하고도 넘쳐 흘렀을 그 모든 것에 등을 돌리시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고단한 노동의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이 너무도 힘겨웠는지 아버지께서는 천주교에 귀의하시고 어머니를 만나 저희 형제들을 낳으시며 가난하지만 작은 행복을 꾸려 갔습니다.
그러나 격변하는 우리 현대사는 아버지를 그냥 놓아두질 않았습니다.
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시골의 작은마을에도 들어선 대형섬유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하신 아버지께서 노동조합을 꾸리고 위원장에 당선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능유제강(能柔制剛 :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은 아버지께서 꾸려간 노동조합의 실천이 되었습니다.
어용과 기회주의가 판을 치던 서슬 퍼런 유신의 그늘 아래서 한발의 전진을 위해 두 발을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하며 노동조합을 굳건히 지켜내었습니다. 노동의 권리와 해고에 대한 위협이 닥칠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회사가 먼저 모범을 보이라고 하였고, 회사경영이 압박을 받을 때에는 스스로 임금동결을 설득하여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역사회와 노동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은 것은 스스로에게 철두철미한 자기관리에 있었습니다. 10원 한 장을 헛되이 쓰는 일이 없었으며, 수많은 회유와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는 일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노동조합 위원장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공안기관의 뒷조사도 결코 당신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캐면 캘수록 나오는 것은 인민군을 수없이 때려잡은 이북출신의 반공주의자와 언제나 텅 빈 은행의 잔고뿐이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장기집권하며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었고, 가난한 여공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야근을 하실 때면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붉게 물든 저녁 하늘과 드넓은 들녘을 지나 아버지의 조합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퇴근길을 서둘던 여공들이 위원장님 아들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에서부터 훈훈한 조합사무실의 공기와 냄새,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은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80년 5월 학교에 가면 빨갱이였던 폭도들이 집에 오면 아버지의 형제가 되어 있었고, 서울과 부산의 미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방화범들은 그들이 앞으로 당해내야 될 고초들을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타 조금 칠 줄 안다고 깝죽대며 음악 하겠다고 울며불며 서울로 대학 보내달라던 아들을 간신히 설득하신 아버지 덕분에 지역의 돈이 안 드는 대학에 진학한 그 해 87년.
정년퇴임을 하시고도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었고, 한문과 서예에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지는 조그만 표구사를 차리셨습니다. 남들이 보면 노년에 근사한 직업쯤으로 여겨지던 표구 일은 그야말로 가혹한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서서 닦고 바르고 말리고를 반복하다 보면 스무 살의 아들도 녹초가 되곤 하였는데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은 경이로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믿고 물건을 맡긴 손님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는 그 특유의 고집스러움은 표구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밀려드는 주문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난한 노동의 연속이 또 20여 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던 그해. 6월 항쟁은 방황하는 저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가두에 나가 스크럼을 짰고, 돌을 던졌습니다. 화염병을 처음 들었을 때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저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겁 많고 울보였던 당신의 아들은 어느새 화염병과 쇠 파이프를 들고 페퍼포그 차를 때려잡는 투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해가 서산을 저물어 온 대지를 빨갛게 물들이던 그 6월의 한복판 저녁 무렵. 최루가스가 뒤범벅된 거리에서 손수건을 둘러매고 짱돌을 내던지던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조금은 놀라운 듯 두 눈에 맺힌 눈물을 훔치시며 조용히 박수를 보내시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되면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는 지역의 활동가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한 걸음의 전진을 위해 두 걸음의 후퇴'를 역설하셨습니다. 6.29 항복문서를 받아들고 들불처럼 번진 노동자대투쟁의 공간에서 당신의 말씀은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였습니다.
못난 아들 또한 아버지의 방식이 개량주의라고 공격했으니까요. 이미 당신은 10년 후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벌였던 많은 논쟁들은 경직된 이념의 노예가 되어버린 저에게는 한낮 노땅의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역의 노조들은 몇년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갔습니다. 민주노조의 기치를 내걸며 아버지를 비웃었던 활동가들은 이후 어용이 되고, 노동귀족이 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전교조 결성이 한창이던 어느날 아버지에게로 급박한 전화 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아빠! 전교조에 가입한 누님의 전화였습니다. 학교에서 감금당한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하시던 일을 멈추고 달려간 학교에서 아버지께서는 교장과 담판을 지으시고 누님을 구해냈습니다. 어림잡아 협박했더니 꼼짝을 못하더라. 허허! 이것이 당시 상황의 전부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올 무렵 아버지께서는 저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조그만 공장에라도 취직하여 동료들의 신뢰를 얻고 노동조합 위원장이라도 한다면 아버지가 동네 어르신들 불러모아 잔치를 열어주겠다.라고요.
그러나 전 동료들의 신뢰를 얻기는커녕 동료들과 주위사람들을 속이고 배신하며 점차 나락으로 떨어져 갔습니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떠나 생사도 모른 채 방황하기를 수년. 절망의 끝에서 다시 돌아갈 때마다 아버지는 묵묵히 당신 아들을 감싸 안으셨습니다.
반복되는 거짓말을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셨던 아버지. 당신 아들이 언젠가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의 끈을 한시라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데까지 왜 이리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회한과 고통의 눈물이 앞을 가려옵니다. 목이 메여옵니다.
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될 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형님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면서도 집 나간 작은 아들 생각에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셨던 아버지.
서울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고 나서야 다시 찾아뵌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의 등을 두들겨 주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새 세월의 그늘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로해져만 가는 아버지 모습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5년 노무현 대통령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시며 수구기득권세력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시던 아버지.
택시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말씀드리던 아들의 모습에서 당신 아들에 대한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조금씩 확인하시며 언제나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아버지.
꿈에도 그리던 고향산천을 내 손으로 모시고 갈 거라는 다짐을 수없이 반복하며 부디 건강하시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던 그해 여름. 고단한 노동의 끈을 부여잡은 채로 아버진 그렇게 쓰러졌고 끝내 눈을 감으셨습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습니다.
한 어르신은 형님과 저의 손을 꼭 잡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씀하셨던 단 한분이 떠나셨다.'라고 하였고, 성치않은 몸을 이끌고 오신 어르신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미사가 집전 되던 성당에서 당신이 손수 만드신 영구차를 타고 계시다는 신부님의 말씀은 온 성당을 눈물로 적셨습니다.
천주교공원묘지에 아버질 묻고 돌아온 집에서 전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어머님.
전교조 핵심간부가 되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일그러져가는 교육과의 전면전을 수행하고 계시는 형님.
언제나 넓은 마음으로 우리 농산물운동과 지역사회의 일익을 담당하고 계신 형수님.
아버지를 닮은 넉넉한 웃음으로 역시 전교조와 성당 일에 열심이신 누님.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걱정하며 생협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동생.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실함으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매제.
사회운동가가 되겠다는 고등학생 조카와 누나의 손을 잡고 광장에서 촛불을 밝힌 중학생 조카까지.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있는 가족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흘려 보았습니다.
작년 어버이날.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잔이 될 줄 꿈에도 몰랐었기에 그때 나누었던 대화들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한나라당의 집권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살아생전 고향땅 밟아보기는 틀렸다며 단숨에 소주잔을 비우시던, 노무현 대통령 5년 동안 참 잘 버티어 냈다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성당 사람들에게 도대체 그런 정신으로 성당은 왜 다니느냐고 일갈하시던, 국내와 국제정세를 넘나들며 나름대로 진보적이라는 아들보다 더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셨던 아버지.
고기와 술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나온 식당 앞에서 한사코 손을 내저으시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면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버지! 건강하셔야 되요. 이렇게 업고서라도 제가 북녘땅에 모시고 갈 거니까요. 아셨죠?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과 믿음을 저버리고 살았던 아들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어릴 적 단칸방에서 그리운 고향 생각에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없는 울음을 참아내시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평생을 그리움에 사무친 북녘땅에서 고모님 삼촌들 그리고 조카들의 손을 맞잡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을 증언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닮기를 원하는 아들이 반드시 살아오신 삶을 증언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편히 잠드십시오.
night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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