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소설가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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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개천 (124.♡.45.52) 댓글 0건 조회 8,925회 작성일 11-06-13 22:24본문
20대 초반에 도서관 생활을 1년 정도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도 안 되고 인생이 뭘까 고민도 되고 ㅋ ㅋ ,무협지는 거의 읽지 않았지만, 김용 소설과 영화는 거의 다 본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영화는 아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ㅎ ㅎ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이 전생에 나이지 않았을까 상상을 하며......
여기에 이 글을 옮겨 놓은 이유는 이 무협소설에서도 인생이 담겨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김용의 소설은 따뜻함과 진실함과 현실감이 넘쳐난다고 생각됩니다.
남자들의 세계인 것처럼 느껴지는 무협의 세계지만 연애에 대한 나름 개성있는 연애관도 전개되는 것도 아주 맘에 들었답니다.
(홍콩=글·사진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 대협(大俠)·신필(神筆)로 통하는 김용.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무협의 정신과 보도의 진실을 얘기할 때는 정색을 했고 어조도 강했다.
강호 고수들의 광대무변한 무공과 날랜 초식이 이 공손한 노신사의 손끝으로부터 만발했음을 첫 인상만 갖곤 믿기 어려웠다. ‘무협’이란 통속소설을 중국 문학의 한 교범으로 만든 김용(金庸·81)은 홍콩 명보(明報)를 창립해 사장·주필로 있으면서 중국의 문화혁명 과정과 대만 일당독재에 비판적 칼럼을 썼던 언론인이다.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그를 홍콩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에서 그는 필담을 섞어가며 90분 동안 자신의 철학과 무협세계를 설명했다.
◆ 무협 ‘정신’을 배웠으면
장풍(掌風)·경공술(輕空術) 같은 그의 소설 속 무술은 현란하다. 김용은 “내 무협에서 무공은 가짜지만 정신은 진실이고, 정의·공평·공정·정의(情誼)를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은 존중하고, 나머지 30% 정도를 상상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七分眞 三分假’(칠분진 삼분가)를 펜으로 적어 보여 주면서 “사실로 입증된 것은 바꿀 수 없고, 논쟁 중인 사안이나 역사상 미스터리엔 창작을 가미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태극권은 어지간한 경지에 있지만, 다른 무술은 수천 수만권의 책을 통해 소재를 얻었다고 했다. 프로 1단 정도 수준인 바둑에 대해 “바둑과 무술은 통하고 무술 속에 예술이 있다”며 “조훈현·이창호를 좋아한다”고 했다. 또 베이징에서 배우 송혜교를 본 적이 있다면서 “내 작품 ‘천룡팔부’ 중 영리한 소녀 ‘왕어언’을 닮았다”며 웃었다.
그는 당·송 시대, 특히 송을 좋아한다고 했다. “송대엔 문인들이 예의 바르고 서로 존경하고 인간미가 있었고, 당은 강성하고 무협이 발전한 시기였다.”
‘자신의 최고 걸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모두 내 자식이라 경중을 가릴 수 없다”고 했다.(그는 이전 인터뷰에서 ‘긴 것이 짧은 것보다, 나중 것이 먼저 것보다 낫다”고 재간 있게 말한 적이 있다)
◆ “다시 태어나도 무협소설 안 써”
김용은 “요즘 하루 5~6시간씩 중국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72년 자신의 열다섯번째 소설인 ‘녹정기’를 발표한 뒤 절필을 선언했고, 1994년 명보그룹 회장 직을 끝으로 신문사 경영에서도 은퇴했다.
“녹정기가 최고 완결편이어서 절필한 게 아니오.” 그는 자신의 청춘과 공력을 다 바쳤다는 듯 “무협소설은 영영 쓰지 않을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안 쓰겠다”고 했다.
김용은 “중국 병기 문화가 수천 종이기 때문에 특정 부분을 참고했다기보다 여러 가지를 용해해 각 문파(門派)에 특성·병장기를 부여했다”고 했다.
김용을 ‘아편’ ‘한족 중심주의자’ ‘위선자’라고 폄하한 비평가들도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 놓인 ‘홍콩언론회 2000년 언론인 특별상’ 트로피엔 ‘비평은 자유지만 사실(Facts)은 신성하다’고 한 그의 단골 어록이 적혀 있다. 그가 ‘대협(大俠)’으로 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범하기 때문이다.
◆ “낮엔 소설가, 밤엔 주필”
김용은 1959년 ‘공정과 진실’을 내걸고 단4명으로 명보를 창간했다. “대공보(大公報)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뒤 신문에 매력을 느꼈고, 정치인들의 위선·거짓을 감시하려는 욕구가 컸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작가·주필 업무를 병행하던 한창 때 소설·칼럼 각각에 구상 1시간, 집필 1시간씩 공평하게 시간을 나눠 썼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인 1967년 암살 위협을 받아 싱가포르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신명(新明)일보를 창간했다. 그의 소설은 대만에서도 20여년간 금지됐다. 그는 “50여년을 살며 언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홍콩이 고향과 같다”고 했다.
김용은 “언론의 정권 감시와 정부간의 긴장은 불가피하다”면서도 “각국 문화·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론 자유의 정도는 다르게 마련이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한 언론의 자기 통제도 절실하다”고 했다.
◆ 중국을 읽는 눈 ‘金學’
‘소설가 김용’을 연구하는 ‘김학(金學)’이 베이징 대학 정규 교과목으로 개설됐고, 버클리 등 미국 명문대에서도 중문학 부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대중문학도 문학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김용은 “한국인이 춘향전을 좋아 하듯, 내용이 인간적이고 재미있으면 좋아하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우유부단하고 배신도 불사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 “100% 완벽한 사람은 없고 진실된 인간상을 드러내 독자의 공감을 얻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신필(神筆)’ ‘기재(奇才)’라는 극찬에 대해 “그저 ‘김용 선생’이라 불렸으면 좋겠다”는 그였지만, ‘겸허 속 자부’는 어쩌지 못했다. ‘멀티미디어 시대에 무협이 계속 사랑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확신은 못 해도 과거에의 향수와 낭만에 대한 애착은 영원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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