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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방식의 '견성'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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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8.♡.138.174) 댓글 2건 조회 5,522회 작성일 09-01-2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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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우리가 소비하는 '자원'과 '기회'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파헤치고, 타인의 결핍을 초래하지요.

지금 여기 책상위에 놓여진 종이는 열대우림을 파헤쳐낸 결과로 얻어낸 것이고, 반찬투정부리며 물 말아 넘기는 한 끼니의 식사는 그 어떤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취한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에너지’가 요구되기에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세계로 부터의 생산, 소비 작용을 통해서 그것들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노동’이 ‘세상’에 작용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산과 소비 활동은 실질적으로 ‘나’와 ‘세계’가 하나의 조화를 이뤄나가는 방식입니다. 인간 생존의 기본 양식이 이렇게 세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환경의 파괴로 인한 갖은 이상기후의 발생, 동물의 멸종 사태가 심화되고 있고, 한정된 자원의 결과로 내가 누리는 정확히 그 만큼 타인이 결핍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임은 지구공동체의 일원들에게는 생래적으로 주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나 도를 쫓는 이들에게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스러운 책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리’라는 포장을 씌운 관념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이들은 생래적으로 자신에게 주워진 권리인 동시에 의무인 ‘세계와 올바로 작용할 기회’를 포기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상을 누릴 권리만 누리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요.

그들은 ‘구원이 중요한 것이지 현실세계에서의 실천은 부수적인 것이다’(기독교)라고 말하거나, ‘나 자신이 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견성을 한 후에나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불고/노장사상)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올바로 구원받고 견성 한 후에 실천할 수 있는 사람에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구원받고 견성한 후에만 뭐를 베풀어야 그에 참다운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건넨 동전 한 푼이 상대방의 삶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고, 쥐뿔도 모르고 내뱉은 개똥 철학을 들은 상대방이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공'의 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문제는 내가 올바로 구원받은 후/견성한 후의 문제다'라며, 나라는 관념적 끄트머리만 잡고 늘어지는 것은 현대사회에 만연하는 이기주의와 한편의 관념론이 결합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아이에게는 젓을 물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타인의 자식들의 배고품의 문제는 등한시 하며 자기 자식에게는 '자연스럽게'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이기주의'요, '가족의 경계' 속에 매몰된 후에 '그 외의 것은 견성한 후에 보살피면 된다'고 철저히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 '관념론'이라 할만 하지요.


배고파 우는 자기 아이에게 젓을 물리는 것을 이기주의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지당한 처사이지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배고픔도 인식하고 내 젓을 나누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내 부족한 것을 저쪽에서 배굶주리고 있는 아이의 배고픔을 알아 마땅히 좀 덜어서 나눠주는 것. 거기에 바로 ‘자기 버림’의 미덕이 있고,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 진리가 아닌 실존적-실천적 깨우침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구원'과 '깨달음'으로 부터 멀어지는 것 같이 얘기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구원과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야 외부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극히 해악적인 얘기이지요.

옆에 다른 아이가 배고파 울고 있는데, '외부적 실천의 문제는 차후의 문제다'라며 깨달을 때까지 나눔과 실천을 미루는 것에 과연 온전한 '깨달음'이 있을까요? 이건 나태일 뿐,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론이 아닙니다.

작금의 인류의 굶주림, 지구온난화, 반민주화 등의 문제는 인류 존립을 위해서도, 분명 '세계'의 개혁을 통해서 변화시켜놔야할 문제입니다. 이는 옆에서 배곪아 울고 있는 아이의 좀 확대된 문제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외부의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편리'와 '안락' '욕망'을 추구하는 개개의 인간의 삶 자체가 세계를 현재와 같이 황폐히 만들어 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세계에 대한 비판 자체가 동시에 내 자신의 (환경과 타인의 착취를 불러일으키는)'편리' '안락' '욕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에 신경을 쓰고 나서서 실천하는 것 자체가 부족한 젓을 나누는 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것이고 참나를 찾는 길과 맥이 통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 '구원'과 '나의 깨달음'에만 집착해 있는 이들은 마치 세상의 문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나'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외부에만 손가락질 하는 걍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여기는 듯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전제'하고, '구원/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이 방법 밖에 없다'고 명시하는 말이 일반 대중들에게 잘 먹힌다는 것입니다.

잘 들여다 봐야 합니다.

1. 불교/노장사상 측면

문제 상황을 좀 심화해보겠습니다.

나의 가족인 '내 아이'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집중해 봅시다.

나는 내 자신의 배고픔과 결핍에 대해서는 늘 즉시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배고픔과 결핍에 대해서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아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찾으려는 ‘나’라는 것은 현재 자신의 ‘육체’와 ‘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본질적인 나’이기 때문에, 진정 ‘나’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육체’와 ‘인성’ 자체도 ‘외부적인 대상’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방식대로) '본질적인 나'를 찾기 위해서는 '외부의 대상'으로 취급해야할 그 나의 육체와 인성에게는 늘 그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다른 육체와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답’시고 나섭니다. 모순입니다.

'나'에 가까이 있는 '육체와 인성(내 자신, 아이, 부인)'에는 잘해주고 그렇지 않은 멀리떨어진 '육체와 인성'은 '외부의 대상'으로 구분해서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과연 온전한 깨달음으로 이룰수 있는 방법일까요? 아니죠. 그냥 개인주의일 뿐입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역사상 몇몇만 빼놓고는)대부분의 이들이 견성에 이르를 수 없었던 듯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원적인 나를 찾기 위한 그러한 목표지향적-성취주의적인 관점은 오히려 ‘나’와 ‘너’의 경계를 더더욱 견고히 할 뿐이지요.

오히려 내 육체와 개인적 인성의 욕구에 맞춰 밥을 주듯이, 타인의 그것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양자사이의 벽이 허물리면서 ‘본원적 나’가 자연스럽게 찾아집니다.

거기에 참된 '대아'의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 속에서 바로 그렇게 경계를 허물기 위한 순간순간의 노력을 통해서 ‘본원적인 나’가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이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본원적인 나가 내 몸 속 깊숙이에서 일어나듯이 나타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경계를 허무는 노력을 통해서 기존의 아집적인 ‘나’의 작용이 점차 둔화되는 와중에 ‘본원적인 나’의 모습이 활성화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계속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외부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고 내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는 식의 이해로는 이에 다다르기가 어렵습니다.


2. 기독교 사상 측면

원리상으로 극히 간단합니다.

‘구원’의 의미를 ‘대기권위의 천국에 영원토록 머무르는 것’이라는 허황된 의미가 아닌,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그것으로 여길 때(이 땅의 천국으로 여길 때) 쉽게 이해됩니다. 간난아이에게 젓을 물리듯이, 배고파하는 저 반대쪽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고 조화롭게 살려는 의지 속에 구원과 천국의 진실된 의미가 있습니다.


결론

불교/노장사상에 있어서의 ‘나를 우선 찾아야 한다’는 말과

기독교에서의 ‘나(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몽매한 대중을 위해서 우선 쉽게 사용한 말입니다. 물론 그 속에 ‘진실’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를 너무 편협하게 이해했을 때 오히려 이를 아니 믿음만 못한 결과가 빚어집니다. 그 말이 관념의 향연으로 그치지 않고, ‘본유의 뜻’에 맞게 물리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적인 앎으로 실제 적용이 되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올바로 '대아'하는 길 아닐까생각해봅니다.

댓글목록

케빈님의 댓글

케빈 아이피 (122.♡.64.76) 작성일

본자는 많으나 다다른 자는 드물다... 둥글이님의 기본적인 견해는 수행을 한다며 시간이나 잡는 사람들을 전제로 하는군요. 수행에 정말 목이마른 자는 혜능처럼 팔을 잘라서라도 자신의 불을 끄려 합니다. 둥글이님이 수행자들을 꼬집는 것은 허접 행자들이란 거죠... 그렇다면 그들의 안이한 의식을 꼬집으세요. 어차피 그런 인간들 다 글러터진 인간들입니다. 안되는데 용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글른 인간들입니다. 욕구가 다른 거죠. 목구멍에 도가 들어오느냐 돈이 들어오느냐 그거에만 관심이 있는 거죠... 동글이님이 꼬집는 인간들... 총체적인 문제인거죠. 차라리 그들에게 수행이라는 젖꼭지를 떼버리는게 더 나을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어영부영하는 인간들이기에 제정신 차릴려면 먼거죠... 저부터 그러네요. 그리고 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그말이 관념의 향연이라고요? 글쎄요 위선자들이나 지껄이는 말이지요... 관념의 향연이 아니라 먹사들 밥멕여주는 거짓부렁에 동원되는 가장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구원이란 흔해터진 말... 구원받았다는 사람은 어디있는거요? 도대체가... 불교 스님들이 하나님 은총받아 깨달았으니 불교가 제일 구원많이 받은거겠네... 아님 빌게이츠인가? 아인슈타인? 그러고보니 다 유대인이네? ㅋㅋㅋ그거가지고 엮은 얘기도 있을법 한 기분이군... ㅋ 동글이님 글을 보며 님을 혹평하는건 아니고 님이 순진한데에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전국 일주 하시며 엽서팔고 있나요? 간간히 글 올리시면서? 내가 볼때는 공부를 더 해서 사상가나 혁명가가 되던가 사회운동가로 이름 널리 알리는게 더 나을듯 하오. 환경단체나 뭐 그런데 들어가서 꿈을 이루시오. 안되는 도판 인간들 보고 이래야 한다 주장한들 관심도 없고... 기본적으로 욕구가 틀린거요... 제대로 된 욕구(놈이)라면 님처럼 바깥일에도 힘쓸지 모르겠지만 님이 전제로 한 자들은 깨얘기만 나오면 싸우기 바쁜 인간들이고 욕구도 고만한 그릇인거요... 차라리 교사면허를 따서 진보적 지식으로 선생노릇을 하시며 후학을 길르시오. 중고딩 선생 말이오... 윤리교사나 사회교사... 젊은 청춘을 소모하는게 안타깝소... 님의 원대한 꿈을 이루시길... 어차피 이런 일은 각개격파를 해야 한다 생각하오. 그러면서 커지는 거겠지... 작은 마을에 작은 가르침을 주는것도 기쁨이오만은... 너무 거창한 것도 과욕 아니겠소... 내생각이오만 인간들 생각 쉽게 안바뀌오... 내가 그걸 안다오... 멀리서나마 님의 견해가 안타깝소... 도덕경 사이트에 오면 누가 온다고... 차라리 중고딩 학생들 가르치는게 나을듯 싶소...
동글이님 안그렇소?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 충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변할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런 잡다한 글을 올리고 있읍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 글에 대한 지적을 통해서 제가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애써 올리고 있습니다.ㅋㅋ

예전에 제가 학교다닐때 주변 25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사회적으로 최 취약 계층인 '장애인에 대해서 수업시간에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설문을 하고 다녔습니다. 4, 5, 6학년 아이들 800명 중에서 '들어본 기억이라도 있다'고 답변한 아이들이 반절도 안되군요.
들어봤다는 애들도 막연히 들어본 것만 기억할 뿐, 제대로된 장애인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학교 선생님들 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없다 보니, 수업시간에 책 읽듯이 이야기하며 지나친 이유이고, 그래서 아이들이 기억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요. 평생동안 단 한번도 다른 어른이 진지한 눈빛으로 애들아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란다는 말도 못들어본 아이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여간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올라가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히 해야할 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주변에 신경안쓰고 일확천금을 노려 부자가 될 기회만 엿보는 사람이 되지요.

제가 하는 일은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아이들에게 '어떤 생판 모르는 어른이' 그네들 등교하는 교문앞에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달라고 외치면서 작은 전단지를 건넸던 그런 경험을 단 한번만이라도 가짐을 통해서, 그렇지 않았을 때 보다 마음에 약간의 온기라도 더 갖고 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지식이 필요 없이도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견성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혹자는 '제대로 깨닫지 않고하는 행동은 부작용을 미친다'고 하지만,
그건 위에 빨간색으로 표시한 '공'의 의미도 모르는 무지한 소리인 것이지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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