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대원님과 말씀을 나누려다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순전히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대원님께서는 스스로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는데 그렇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인식 조차도 안되는 분 같았습니다.
(제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근거를 들면서 말씀 드렸지만,
이럴 때 마다 오히려 제가 깨어나지 않아서 그런 잘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만 밀어 붙이시더군요.
그래서 좀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그에 대해서 설명 드리려다가
제가 써 올리는 글로부터 눈을 거둔 분에게 억지로 보게 해드릴수도 없는 일이고,
한편으로 대원님에 대한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해서 2주간 묵혀뒀으나,
이는 단순히 대원님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원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분들의 문제이기도 하여
한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대원님은 본인이 보시는 세계를 인식하시기에 그 세계에 사시겠지만,
이를 접하는 분들은 대원님이 위치한 지반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여 자신의 갈 길을 가늠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맹신의 길로 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전부 다 읽기 어려우시면 빨간 글씨만이라도 읽어주시면 됩니다.
제가 보기에 대원님과 김기태 선생님은 언듯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성격이 다른 듯 합니다.
김기태 선생님은 어떤 문제를 풀어 나갈 때 순리 위에서 사안을 살피고,
이를 실타래 풀듯이 풀어나가는 모습을 접해왔습니다.
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이 함께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김기태 선생님도 모든 문제는 '나'라고 하면서 '나'를 강조하시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더 넓은 지반에서 통찰하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반면 대원님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갓은 소소한 일상의 문제부터 고승들의 설법을 자유자제로 인용하면서 실타래를 엮어 냅니다.
'나'가 견성하는 방법을 설법하시면서 역사와 인문 심리를 넘다드는 다종다양한 수식들을 사용하십니다.
더군다나 그 수려한 논변은 전혀 다른 개념들을 하나로 싸잡아서 같은 의미로 만들어내거나,
비슷한 개념들을 나눠서 철저히 이격시키기도 합니다.
사용하는 '말'이 일정한 순리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대원님 원하는대로 자유자제로 사용됩니다.
'견성하자'는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만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대원님은 소설가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것이 '비우자' '있는 그대로 대하라'는 따위의 이야기들에 가려
대원님 본인은 물론이고 이를 접하는 이들까지 이것이 온전한 '비움'과 '무한자유'의 이야기로 들려질 뿐인 듯 합니다.
이는 아마 '합리성'이 결여된 대원님의 사고 때문인 듯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합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의 합리성이란 '기계적 논리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치' 정도라고나 할까요?
밥을 먹으면 똥을 싸는 것과 같은 '당연한' 합리성 마저도 대원님은 부인하면서
본인이 만들어낸 합리성만을 급구 주장하고 계시는 모습을 여러번 봤습니다.
이게 바로 대원님과 김기태 선생님과의 결정적 차이이지요.
김기태 선생님과는 몇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가치가 통하지 않는 부분은 있어도 말은 통합니다.
쉽게 말해서 대화는 되는데, 결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죠.
하지만 대원님과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간단한 질문인데도 질문 자체의 요지를 못알아 듣는 모습을 몇번 뵈었습니다.
제가 대원님이 하신 말씀의 앞뒤 맞지 않음의 문제를 거론할 때 마저도
'네가 제대로 깨달아봐야 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이 필요하다'는 식의 처방전만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화 조차도 통하지 않는 모습을 기독교 광신도들에게서 자주 접하곤 했는데,
대원님의 모습도 그로 부터 별반 멀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그것'이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견성'을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지요.
대원님 스스로 자부하시는 대로 대원님이 정말로 견성해서 세상을 '거울 같이' 받아들이는 분이라면,
고등학생들도 알아듣는 질문마저도 못아들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대원님은 다만 하나의 견고한 '믿음'을 광신적으로 믿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대원님이 '견성'하신 것은
어떤 스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어 들은 말씀에 기인하신 것이지요.
'나를 찾는 종교'인 '불교'의 지식을 통해서 대원님은 눈이 트이신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 '믿음'(나를 내려 놓으라.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라)에 집중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이를 계속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반복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또한 김기태 선생님과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른 이유일 듯 합니다.
만약 제가 김기태 선생님에게 이런 지적을 드렸다면, 김기태 선생님은 '당신 하는 말이 무언가?'하면서
제 질문을 하나 하나 살피면서 자신이 서 있는 존재의 지반을 꼼꼼히 살피시려는 노력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대원님은 제가 드린 말씀이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것인지 아닌것인지만 살펴보고
그렇지 않으면 일단 벽을 치고 보시는 듯하니 한편으로는 가까이 다가갈 길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김기태 선생님은 본인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안다고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바의 그것으로 환원시키고 절대화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모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판단을 유예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김기태 선생님이 인간의 본성을 깨달으신 점 보다는 바로 이점이 김기태 선생님의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마음가짐은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을 늘상 살피고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끝없이 명증한 마음가짐을 만들어내는 동인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대원님에게는 전혀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본인이 알고 있는 바만을 거듭 확인하면서 그 믿음을 공고히 하고
상대방이 한 얘기가 본인의 생각과 비슷하면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고, 약간 다를라 치면 벽을 치는 듯 보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내가 가진 믿음과 같은가 아닌가'만 비교하는 것이지요.
이런 식의 마음가짐은 '진리'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 진리의 기반이 어느때 흔들렸을 때 그 자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함정이 있지요.
그리고 제 판단으로는 이미 대원님은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원님의 견성 방식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견성하지 말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대원님 개인이 알게된 '진실'이 대원님의 의식 속에서 인식되고,
그것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중에 몇 차례 굴곡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다른 방식의 견성을 얻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목적으로 자신이 의식하고 지각하는 이야기들의 중심에만
견성이 있는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극히 주관적이고도 좁은 시야로 봤을 때는
대원님은 세태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초기적인 견성'의 기회를 견인하기 위한 능력자로서는
참으로 훌륭하신 듯 합니다. 기독교의 전도사들 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이상'(내가 말하는 것이 진리로 가는 길이다는 식의 처방전)은 부적절한 듯 합니다.
본인이 서 있는 지반도 모르는 이가 다른 이들에게 서 있을 자리를 점해준다는 것만큼 부적절하다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교회만 진리가 있다'는 식의 광신도들의 행태와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만 그만한 이해를 가지신 분들이 수려한 지식과 문장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대원님의 글을 맹신하시는 듯하고,
대원님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다시 스스로가 아는 한도의 것들을 설법하면서
공생관계가 지속되기에 그 '울타리' 안에서는 결코 그 함정을 아시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런 저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도'나 '견성'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도나 견성을 말씀하시는 김기태 선생님과 다른 점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