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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 근원탐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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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유 (211.♡.76.3) 댓글 1건 조회 5,281회 작성일 09-03-03 01:57

본문

남양혜충국사가 말했습니다.

‘법(法)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들여우의 울음소리이다.’

이 일은 맑은 하늘에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아서 한 번 보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스스로 보았다면 삿된 스승이 흔들 수 없습니다.”

[서장, 탕승상에 대한 답서]

예를 들어 만화영화에 나오는 세상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 밀가루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보자.

밀가루는 잘 뭉쳐지기도 하고 다시 쉽게 가루로 돌아가기도 한다.

산도 바다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나아가 생각이나 느낌 등 내면적인 것들까지도 모두 오직 밀가루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양에서 차이가 나는 산, 바다, 나무, 식물, 동물, 사람

그리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느낌 저런 감정 등등을

제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구별할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 그 자체는 어떻게 될까?

밀가루로 만들어진 사물들은 제각각 다른 모양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야 구별이 가능하므로 모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지만,

밀가루 그 자체의 경우는 정해진 모양이 없으므로

모양을 가지고 구별하여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더구나 밀가루는 동일한 성격을 가진 다른 종류의 가루가 없기 때문에

특별히 구별하여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밀가루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밀가루 인간은

밀가루에 관하여 의식(意識)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양을 갖춘 밀가루 반죽인 사물이나 의식들과는 달리

밀가루 그 자체는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의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의식하여도 모두가 반죽이 되어 모양을 갖추어 버려서

본래 밀가루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밀가루에 관한 의식 역시 이미 반죽이 되어 모양이 갖추어진 채 나타나는 것이다.

밀가루 세계에서는 어떤 생각이나 의식도 밀가루로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이처럼 밀가루는 이 세계의 유일하며 불변하는 근원이면서도

그 자체는 도무지 파악될 길이 없다.

그런데 혹시 밀가루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든 모양과는 다른

불생불멸의 근원을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면,

밀가루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밀가루에 관한 생각이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 밀가루를 말한다는 것은 모두 가짜일 뿐이다.

밀가루 사람이 밀가루를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반죽된 모양에서 완전히 부서져서 밀가루로 돌아가는 것이 방법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미 사람이 없으므로 밀가루를 알거나 모르거나 하는 일도 없다.

반죽된 상태로 사람 노릇을 하면서 밀가루를 반죽된 가짜 모양이 아니라

모양 없는 가루 그 자체로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문제는 반죽된 모양이다.

반죽된 모양에 속지 않을 지혜만 있다면,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반죽이 사실은 전부 다만 밀가루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밀가루 인간은 눈앞에 나타나는 지금 이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밀가루라는 사실을 문득 자각하여 확인하게 될 때, 밀가루를 직접 아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근본이 무엇일까 하고 의심하였던 그것조차도 바로 근본인 밀가루였던 것이다.

도(道)가 바로 그렇다.

[무심선원, 참선의 길잡이]

위의 이야기는 방편으로 세운 가설입니다.

어떠한 논리나 의식의 조작도 모두 반죽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양에 속지 않는 지혜를 통해

직접 불생불멸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이제중도(二諦中道)는

건너갈 길이 없는 나루며,


현묘하고 현묘한 법문은

들어갈 문이 없는 진리이다.


갈만한 길이 없기 때문에

유심(有心)으로 행할 수 없고,


들어갈 만한 문이 없기에

유행(有行)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대해(大海)에는 나루가 없지만

노를 저어 능히 건널 수가 있다.

[원효, 보살영락본업경소 서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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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도승이 광지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구절이 가장 앞선 말입니까?

그 질문은 뒤에 있다

[벽암록]

사람이 애써 당장에 쉬면 곧 그 당장에 쉴 수 있으되,

만약 쉴 곳을 찾는다면 아들딸을 결혼시킨 후에도 일은 많으리라.

중과 도사가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으로는 역시 깨닫지 못할지니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당장에 그만두면 곧 그만 둘 수 있지만 그만둘 때를 찾는다면

그만둘 때가 없으리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뛰어난 견해로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흔히 사람을 피함으로써 조용함을 구하나,

뜻이 사람 없음에 있다면 이는 곧 자아에 집착함이 되고,

마음이 고요함에 집착하면 이것이 곧 움직임의 근본임을 모르고 있음이다.

어찌 남과 나를 하나로 보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잊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랴.

[채근담]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의 교의는 본각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든 중생이 본래 이미 다 깨쳐 있다는 것이 본각 사상이다.

그러니 새삼 깨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수행할 때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깨달음을 기대하는 것을 대오(待悟)라고 한다.
선사들의 어록이나 그 밖의 선 문헌에 보면 대오를 경계하는 말씀이 무수히 나온다.

이렇게 하면 깨달을 수 있겠지, 또는 깨달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거는 기대이기 때문이다.

본각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깨달음은 이미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저러하게 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겠거니 하는 것은

다 쓸데없이 헤아리고 분별하는 생각(思量分別)일 뿐이다.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에는 인과율(因果律)도 적용이 되지 않고 시간의 틀도 적용되지 않는다.

세간의 그 어떤 틀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돈오 즉 ‘단박에 깨친다’고 하는 말은,

깨달음이란 시간의 틀이 적용되지 않는 초시간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천천히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있어 점오(漸悟)라 하고

빨리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또 따로 있어서 돈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관한 한 세간의 어떤 조건을 적용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길이 없다.

세간의 안목으로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을 열심히 잘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는 것은 조작이요 억지이다.

“깨달음이 내 손님으로 오실 때야 피해가지 못하지만 나가서 불러들일 일이야 아니지.”

이철수씨가 <좌탈>이라는 제목의 판화에 쓴 이 글도 바로 그런 뜻이다.
아울러, 그 어떤 세간의 장치도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나 매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세간의 장치에 의지해서 깨달음에 접근하려는 태도 그 자체가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그래서 선사들이 대오(待悟)를 경계하는 만큼이나 강조하는 것이 무소의(無所依)이다.
무소의라 하면 의지할 바가 없다는 뜻이다.

즉 세간의 그 어떤 것도, 다시 말해 어리석은 분별로 고안해낸 그 어떤 방법이나 장치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의지할 것은 없다는 얘기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수행하면 되겠거니 하고

철썩 같이 믿고 의지하는 것까지 남김없이 떨쳐 버려야 한다.

분별로 지어낸 그 무엇인가를 붙들고 있는 한

깨달음이 원래부터 이미 세상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달을 수 없다.
선사들이 흔히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런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아집(我執)을 비롯하여 집착을 끊고 버리는 수행을 하고 또 하여

이 세간에는 발 딛고 의지하는 자리를 없애가다 보니, 마침내 장대 끝만큼의 자리만 남는다.

그것을 놓치면 어딘지도 모를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그만 떨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끝까지 차마 놓아버리지 못할 그 장대 끝은

‘이렇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겠거니’하는 기대요 믿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수행의 삶을 지탱해준 수행자의 존재의 이유, 바로 불교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그것까지 포기하고 한 걸음 더 내딛으라고 한다.

선불교는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에 관한 한 그렇게 철저한 무소의를 말한다.

[돈오(頓悟),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생각을 잊는 것이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니,

비유하면 칼을 휘둘러 공중에 던져서

손이 닿고 닿지 않고를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옛날 엄양 존자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려놓아라.’

엄양이 말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려놓지 못하겠거든 들고 있거라.’

엄양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또 운개지원 스님이 운거석두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학인이 어찌할 수 없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석두 스님이 말했습니다.

‘노승도 역시 어찌할 수 없다.’

지원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학인은 배우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지만,

스님은 대선지식이면서 무엇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까?’

석두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어찌할 수 있다면, 곧 그대의 이 어찌하지 못함을 집어 내버릴 것이다.’

지원 스님이 말끝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 두 스님이 깨달은 곳이 바로 당신이 헤매는 곳이며,

당신이 의심하는 곳이 바로 두 스님이 의심한 곳입니다.

법은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또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사라지니,

모든 분별법(分別法)이 소멸하면 바로 법에 생멸이 없게 됩니다.”

[서장, 루추밀에 대한 답서]

선공부에서 가장 결정적 고비는 불이(不二)의 중도(中道) 체험이다. 색(色)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며, 온갖 모양이 곧 모양 아님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동시에 선체험의 본질이기도 하다. 불이의 중도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확인되는 실재이다. 중도의 체험은 곧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비롯한 온갖 경계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재한 해탈이다.

불이의 중도는 어떻게 체험되는가? 본래 마음은 불이의 중도이다. 다만 분별하는 의식에 가로막혀서 본래가 불이인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모양에 유혹되고 속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불이인 그대로의 마음이다. 의식의 모양에 유혹되고 속아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은 모두 둘로 나누어진 이법(二法)이니 분별이요 망상이다.

그러므로 불이의 중도인 마음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려면 분별의식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즉 헤아리고 분별함에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잊는 것이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다.”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조주가 말한 “내려놓아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석두가 말한 “노승도 역시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모든 분별법이 소멸하면 바로 법에 생멸이 없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망상을 쉬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며, 혜능이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을 때에 당신의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은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본래면목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불이의 중도이다. 불이의 중도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므로 분별하여 알 수도 없고 손을 써 붙잡을 수도 없다. 중도에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갈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고, 긍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다. 다만 바로 이것이 중도이다. 만약 어찌하려고 하면, 바로 중도에서 어긋난다. 그러면 그대로 놓아두어야 하는가? 그대로 놓아둔다고 한다면 이것도 어떻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도 하지 않음을 일러 무위(無爲)라고 한다. 무위는 쉽게 말해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든 그대로 두든 모두 힘을 들여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맡긴다.”고도 하고 “구경꾼이 된다.”고도 하지만, 일부러 이렇게 하면 역시 무위가 아니다. 힘을 들이지 않으려면 분별하지 말아야 하고, 분별하지 않으려면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일부러 하는 일이 없으니 힘이 들지 않지만, 머무는 버릇이 깊은 사람들은 도리어 어렵게 여긴다. [무심선원, 참선의 길잡이]

남전 보원 선사에게 조주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 선사가 대답하였다.

“평상심이 도이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닦아 나갈 방향이 있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향하고자 하기만 하여도, 어긋나느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앎이 없다는 것은 무기(無記)이니라.

참으로 의심 없는 도에 사무쳤다면 오직 태허의 확연하여 통할함과 같을지니

무엇 때문에 굳이 시비할 것인가.”

조주가 단번에 크게 깨달았다.

영가스님이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삼천위의 팔만세행)은 빠릅니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육조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고 인가하시니,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에야 이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습니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육조스님의 질책입니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육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습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을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 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입니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하는 말 끝에서 깨쳤다고 봅니다.
[성철스님 증도가 강설中]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습 있는 삼라만상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감각이나 알음알이[知解]로는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마음이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면 마음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마음을 안다는 것은 삼라만상을 인식하는 주관이 인식하는 주관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주관 스스로는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인식의 객체가 될 수는 없으나, 인식하는 작용은 있으므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확인을 스스로와 하나가 된다[契合]고 한다. 마음의 체(體)는 허공과 같아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인식하는 작용이 스스로를 확인하는 길 뿐이다.

마음과 경계는 둘이 아니고 하나로서 같지만, 주관으로서의 마음이 스스로의 식작용(識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객관으로서의 경계만을 인식하고 자신을 잊는다면, 마치 거울이 자신의 비추는 작용은 잊고 자신에게 나타나는 영상을 실물로 착각하는 것처럼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도(顚倒)된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참된 자기는 형태도 없고 생멸도 하지 않아서 시공간(時空間)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시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용인데도, 중생은 작용의 결과 식(識)으로 드러나는 경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영원한 참자아를 상실하고 경계 속에서 경계와 더불어 생멸(生滅)하며 방황하는 불행한 자이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일은 무상(無常)하게 생멸하는 거짓자아를 극복하고 영원한 참자아를 찾는 일이다.

그런데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찾는다고 하면, 외면적인 경계만 버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까지도 버려야 한다. 감각이나 의식 속에 드러나는 외면적인 경계만이 경계가 아니라, 그러한 경계를 파악하고 분별하며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自認)하고 있는 것까지도 경계인 것이다. 감각이나 의식 속에 드러나는 외면적인 경계를 버리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하는 내면적인 경계를 버리기는 어렵다. 여기에 수행인의 어려움이 있다. 모든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텅 비운다는 것은 아직도 텅 빈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이 허공과 같다면 어디에 있는 경계를 어디로 버려서 마음을 비울 것인가? 허공 아닌 곳이 어디며, 붙잡고 비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허공일 뿐이라면, 잡거나 놓거나 비우거나 채울 곳이 따로 없다. 수행인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하며 잡고 있는 것을 놓기 어렵다. 그것을 놓으면 마치 허무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잡고 있는 것은 허공인 참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분별해낸 경계일 뿐이다. 허공을 어떻게 붙잡겠는가? 허공은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계합(契合)하여 하나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스스로 마음이라고 여겨 잡고 있는 것을 놓고 허무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허공과 하나가 되며, 이 순간 허무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하나인 참 마음이요 하나인 참 법계가 된다.

마음은 허공과 같지만 단순히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이 아니라 법신이요 법계이기 때문에 중생을 말하고 부처를 말하며 마음을 말하고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고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허무(虛無)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만법이 생동하는 법계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나누어 말하면 허공과 같은 마음의 체(體)가 식작용(識作用)을 하여 만법(萬法)이라는 식(識)의 세계가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의 체(體)․식작용(識作用)․식(識) 3자는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따라서 깨달아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 3자의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매이지 않고 자재(自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 깨끗한 이 마음은 허공과 같아 중생․부처․세계․산하․모양 있는 것․모양 없는 것과 더불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일체가 평등하니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모양이 없다. 이 본래 깨끗한 마음이 늘 두루 밝게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 뒤덮히는 까닭에 밝은 본체는 보지 못한다. 다만 바로 보고․듣고․느끼고․아는 마음이 없으면 본체는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올라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면 다시는 막힘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잘 알아서 일상 생활 속에서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 끄달리지 않으면 바로 마음의 길이 끊어져서 집착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곳에서 본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그것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서 견해를 내지 말고,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서 생각을 움직이지도 말며,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떠나서 마음을 찾지도 말고,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버리고서 법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전심법요]

이러한 무심(無心)은 혜능(慧能)이 말하는 “상(相)에서 상(相)을 떠나고 염(念)에서 염(念)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과 같으며,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상(相)을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보고․듣고․느끼고․아는 인식행위나 인식의 결과인 모양을 따라다니지 말고, 보고․듣고․느끼고․아는 작용을 하는 그것 즉 작용의 주체를 돌이켜 찾아야 한다. 작용은 수만 가지로 생멸하며 펼쳐지지만, 그 작용의 주체는 오직 하나로서 불생불멸이며, 모든 작용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주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고․듣고․느끼고․아는 속에서 본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말하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니, 만약 말하지 않고 또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체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장소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없기만 한 것은 아니고 있긴 하지만 볼 수
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일상사(日常事)의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語黙動靜]에 모든 소리와 색이 모두 부처의 일이니, 다른 어디에서고 부처를 찾을 수는 없고,”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월성진(日月星辰)이 모두 마음을 벗어나지 아니하며,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가 모두 스스로가 되니 어느 곳에 여러 가지가 있겠으며,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청산이요, 허공세계가 밝고도 깨끗하여, 털끝 만큼도 견해 짓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소리와 색이 부처의 지혜로운 눈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묵동정(語黙動靜)과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일상사(日常事)에서 드러나는 모습[相]에 속으면 만법(萬法)이 마귀(魔鬼)의 일이지만, 모습에 속지 않으면 만법이 한 마음 속의 일일 뿐이어서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심선원,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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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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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으로 올린 글이니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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