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철학을 타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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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유 (110.♡.85.230) 댓글 9건 조회 8,137회 작성일 10-01-01 14:27본문
댓글목록
들풀님의 댓글
들풀 아이피 (58.♡.50.136) 작성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누군가의 가르침이 별로 와 닿지 않으면 그냥 살면된다.
그대가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울때까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두분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해 본 사람으로서 양쪽에서 얻을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도판에서 신통묘용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은 다 의식의 장난일뿐입니다.
그런것을 찾는다면 이 두분의 가르침은 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러나 님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나 심리적 소외감 이런것들을 치유하는데는 이 두분의 가르침은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로즈마리님의 댓글
로즈마리 아이피 (118.♡.233.129) 작성일
제가 경험한 바.. 제 생각에 의하면..
아무리 좋은 법이든 방편이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사이비입니다.
반대로 어떤 법이든 자신에게 맞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사이비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제 생각엔 딱 두가지만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 현실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가
2, 돈을 밝히는가
이 두가지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래도 믿을 만한 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110.♡.85.230) 작성일현실 속에서의 두려움이나 심리적 소외감이 치유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면 이런 글은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효과도 별로 느끼지 못하겠더군요. 다만 道라는 초현실적인 것에 의지하면 심리적 소외감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황홀한 듯 하는 일시적 효과는 있었지요. 이곳의 있는 그대로라는 가르침도 자기가 만든 심리적 상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자세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더군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 기분이랄까.. 기존에 조작적인 명상 수행을 했던 경우에는 독한 독으로 부터 약한 독으로 중화가 되는 장점은 있는 것 같습니다.
언덕님의 댓글
언덕 아이피 (61.♡.68.58) 작성일지난 시간 동안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등 어디서 배우든 그것이 종교든 학문이든 어떤 가르침이든 정말 바르게만 가르치는 선생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렇다고 틀린 것만 가르친 선생도 만난 적이 있나요. 선생이란 이 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설사 깨친 분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만 틀린 것을 가르치면서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맞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맞는 줄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부족한 것을 부족한 줄 아는 사람, 모른 것을 모른다고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가르칠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의 스승도 우리 사회에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스승의 존재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답은 자신 안에 있으니까.
박쥐님의 댓글
박쥐 아이피 (211.♡.215.18) 작성일
나 되돌아 갈래....
어디로.....
본래의 자리로....
그기가 어딘데....
지금 여기!
그리고...................
그것은 약속아닌 기약처럼 기다림에 머물고 있었다.....()
로즈마리님의 댓글
로즈마리 아이피 (118.♡.233.129) 작성일
그리고 사이비 판단 기준 중 하나 빠진 게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3.폼을 많이 잡는다> 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대부분의 마음공부나 진리를 깨쳤다는 분들이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
전 솔직히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인 양 생각되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치부나 인간적인 결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깨달음, 진리에 관한 아름다움만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예전에 읽었던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깨달음은 없다>라는 책을 읽고 참으로 많은 감명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결코 유지의 글들이 감동적이라든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깨달음에 관한 착각을 모두 깨부숴버린 군더더기 없는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대화는 불가능하다..깨달음이라는 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닌다. 그런 걸 뭣 하러 하려고 하는가..>
어찌보면 냉랭해보이는 그 말들이 오히려 너무나 자비롭게 다가왔습니다.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략 위의 말들이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의 깨쳤다는 분과 그냥 공부 좀 한다는 분들이 폼나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반대(?)로 가는 분도 한분 쯤은 저는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폼을 안 잡아주셔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솔직히..
산책님의 댓글
산책 아이피 (222.♡.11.124) 작성일
<무기를 경계함 - 의심하지 않음이 병이다>
오매일여의 무심경계에 들어서,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참학하는 납자는 만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무심경이 되었는데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때의 제일 큰 병이 공안 즉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7지 8지의 경지에 이르러도 공안을 모르고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심경이 되니 자유롭고 편안하다”하며 스스로 옳다 여기면 영원토록 외도가 되고 만다.
대혜스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매일여의 쇄쇄낙락(灑灑落落)한 경지가 되었지만 원오스님으로부터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한다는 꾸중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有句無句 화두를 참구하였는데 마치 개가 기름솥을 대한 듯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하루는 손님과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젓가락을 손에 쥐고 먹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를 본 원오스님이 웃으며 손님에게 “저놈은 황양목선(黃楊木禪)을 참구한다오”하고 핀잔을 주었다. 나무 중에 가장 더디 자라는 나무가 황양목이니 윤달이면 자라기는커녕 도리어 오그라든다는 얘기까지 있다.
스스로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데 거기에 스승의 핀잔까지 들은 대혜는 분개하여 스승인 원오스님께 따지듯 물었다. “예전에 스님께서도 노스님에게 유구무구 법문을 물은 일이 있다는데 노스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유구무구가 칡덩굴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을 때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오조스님께선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또 “그럼 나무도 넘어지고 칡덩굴도 마를 때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서로 따르느니라”고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대혜스님이 확연히 깨달았다.
원오스님은 그래도 혹 공안을 투과하지 못했을까 걱정이 되어 난해한 공안을 물었는데 대혜스님은 일체에 막힘이 없을 뿐 아니라 맞서서 거량까지 하였다. 이에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을 인정하였다. 그러니 완전한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다시 공안을 확철히 깨쳐야 병이 완전히 없어진 대조사라 할 수 있다. 조금 안 것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깨치지 못하고 만다.
대각을 얻게 한 인연을 어찌 육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혜에 비교하겠는가? 대혜스님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원오스님 사후에도 좋은 음식이나 새로 딴 과일이라도 있으면 먼저 원오스님의 진영에 바쳤다고 한다.
교가에서는 오매일여 숙면일여가 된 자재위에 들어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성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많은 시일을 요할 뿐 아니라 10지보살도 잘못하면 외도에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종문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고 10지 등각마저 봉사나 잠을 덜 깬 이로 취급해 눈을 뜨고 잠을 깨는 방법으로 공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혹자는 “7지보살 10지보살이 얼마나 높은 경지인데 그들이 다시 공안을 참구할일이 뭐가 있겠냐?”고 한다. 하지만 그건 천부당만부당이다. 10지 등각이라도 아직 완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기 때문에 공안을 모르는 법이다. 오매에 일여한 10지 등각에게도 언구를 참구하지 않음이 병이 되는데, 황차 망상이 죽 끓듯 하는 지견을 두고 돈오다 견성이다 하며 점수한다느니 보임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가당키나 한가? 허황될 뿐만 아니라 온 천지를 마구니로 가득 채우는 요설이라 하겠다. 정식(情識)이 여전한 상태에서 공안을 알았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니라 망상경계다. 대사지(大死地)에서 다시 공안을 참구해 크게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고불고조께서 누누이 강조하신 선문참구의 생명선과 같은 지침이다.
-성철-
산책님의 댓글
산책 아이피 (222.♡.11.124) 작성일
<스스로 가로막는 장애>
근세의 사대부(지식인)들은 왕왕 이러한 견해를 지으니,
한자창(韓子蒼)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임천(臨川)에 있으면서
이 일을 논한 지 반년이 되었지만 역시 스스로 믿지 않았다.
매번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우리들은 다만 돌아갈 곳만 알면 되니
어떻게 곧장 손을 써야 할까?’ 하면서
역시 스스로 가로막는 장애를 만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또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은
10겁(劫)을 도량(道場)에 앉아 있었으나
불법(佛法)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佛道)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말을
오해하여,
불도를 이루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고 한다.
이들은
‘한 순간에 헤아릴 수 없는 겁(劫)을 두루 보니,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무는 일도 없으며,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밝게 알고,
모든 곳을 벗어나 곧장 십력(十力)을 이룬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석가모니께선 본래면목을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기이하구나!
모든 중생에게 여래의 지혜와 공덕(功德)의 모습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다만 망상(妄想)에 집착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할 뿐이로구나.’
망상에 집착한다는 말이 바로
오늘날 사대부(지식인)의 병통을 말한 것이다.
-대혜어록 <손통판이 청한 보설> 중에서-
산책님의 댓글
산책 아이피 (222.♡.11.124) 작성일
<결국 무엇인가? - 스스로 살펴보라>
말과 침묵이라는 두 가지 병을 없애지 못하면
반드시 도에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수행하여 나아갈 몫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심할 것은,
아는 것을 붙잡고 일로 삼고서
다시는 묘한 깨달음을 찾지 않으면서,
그가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거나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견(我見)의 그물 속에 떨어져서
아상(我相)에게 부림을 당하여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데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낸다면, 이 병은 더욱 무겁습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이 두 가지 병은
뛰어난 의사라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하면
증상만(增上慢)이나 사견인(邪見人)이라 부릅니다.
오래도록 공부해 온 영리한 자라야 비로소
여기에 이르러 자신을 모두 바꿀 수 있고,
자신을 바꿀 수 있으면 사물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꿀 수 있으면,
바야흐로 뜻을 밝힌 사람이라 합니다.
이미 그 뜻을 밝혔다면 이 마음도 밝힌 것이고,
이 마음을 밝혔다면
밝힌 곳에서 시험 삼아 미세하게 헤아려 보면
원래 밝힐 것이 없으니,
밝힐 것이 없는 곳에서
발딱 일어나 곧장 가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한 줄기 풀을 집어
장육금신(丈六金身; 불신(佛身))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장육금신을 다시 한 줄기 풀로 만들면서,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모든 법을 이루기도 하고
모든 법을 부수기도 하며,
뒤죽박죽 자유롭게 하여도
모두 이 밝힐 것 없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여래선(如來禪)도 아니고, 조사선(祖師禪)도 아니고,
심성선(心性禪)도 아니고, 묵조선(黙照禪)도 아니고,
방할선(棒喝禪)도 아니고, 적멸선(寂滅禪)도 아니고,
과두선(過頭禪)도 아니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禪)도 아니고,
오가종파(五家宗派)의 선도 아니고,
내가 제멋대로 말하는 선도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선이 아니라면, 결국 무엇일까요?
여기에 이르러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님이 스스로 살펴보길 바랍니다.
-대혜선사 법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