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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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책 (222.♡.44.101) 댓글 0건 조회 8,485회 작성일 10-03-07 14:03본문
깨달음과 관련된 수많은 담론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결국은
자아의 문제 해결, 혹은 자아의 개선이나 자아의 편안함이나 편리에 관한
어떤 것일 수 있음을 본다.
하지만 수행은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아니다.
수행은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아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이 말조차도 <자아에 대한 어떤 것>을 아는 것으로 오인되기 때문에
자아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실한 수행자는 오직 진실에 부합하고자 하기에
지엽말단에서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단도직입하여 근원을 만나고자 한다.
<지금 이대로의 나를 아는 것이 곧 그것이다>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의 나>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나에 대한 어떤 것>을 상상한다.
하지만 <나 자체>가 아니라
<나에 대한 어떤 것>을 해결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체>를 다뤄야 한다.
테라피나 최면술이나 처세술이나 온갖 정신수련 등
나에 대한 개선책이나 비결이나 해결책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은 마치 감기약과도 같은 것이다.
몸이 아프면 먹고 나을 수 있는 약처럼
뇌 속에 잘못 세팅된 기억이나 추억이나 잠재의식 등이
불편을 유발할 때에 대한 나름의 처방들이랄까......
운이 좋으면 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낫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건 방법들은 다양하게 널려 있고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물론 이런 고통이나 불편이 <나 자체>를 깨닫는
계기나 동기가 될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 자체>를 다루는 곳이나 말하는 자는 드물다.
<나 자체>의 진실을 다루면 수많은 <나>들은 싫어할 게 뻔하다.
<나 자체의 진실>을 알고 나면
<나>는 결국 <나>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잃는 것을 좋아할 <나>는 없다.
정신적 우위에 있거나 해박한 지식인, 혹은 의학 전문가이거나
소위 깨달았다는 자들의 입에서 다만
<나에 대한> 개선책이나 <나에 대한> 해결책만 나온다면
이는 오직 우는 어린아이에게 끊임없이 사탕을 물려주는 것일 뿐이다.
석가모니도 처음에 방편의 사탕을 물려준 후
나중에는 시퍼런 진실의 칼을 들었던 것이다.
그 칼 아래 수많은 <나>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나>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예수도 나중이 되어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했다.
그 당시의 <나>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물론 해석이야 다를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의 이 말들이 다 무슨 뜻이겠는가?
여호와를 직접 보는 자는 다 죽음을 당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란 기독교식으로 표현된 진실의 다른 이름이다.
오직 진실 앞에서는 <내>가 죽을 뿐이다.
진실 앞에 <나>의 개선이란 없다.
<나에 대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나 자체>에게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진실로 <나 자체>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먼저 깨달을 일이다.
약을 주어 아픔을 잊게 해 주는 자는 훌륭한 의사이다.
아픔이 없는 데도 아픈 것으로 오인하는 자에게
아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자는 진실한 의사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모든 생의 아픔들이란 그 얼마나 절박하고 아픈가?
그 아픔을 껴안아 주는 스승들의 은혜는 또 그 얼마나 눈물겹도록 고마운가?
오직 생의 편에 서서 바닥까지 몸을 낮추고 내려가 방편을 베푸니
아아, 방편의 수고로움과 지혜로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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