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도. 그리고 '책임'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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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5건 조회 6,462회 작성일 10-04-03 09:45본문
저는 '책임'의 문제를 많이 거론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상당히 다의적인 의미가 있음에도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이것이 마치 자신들의 어깨에 강제로 짊어지워진
'도덕적 책무'로 여겨서 반발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곤 하지요.
특히 저는 '밥'의 문제를 통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 중의 '상당수'(전부가 아님)의
허황된 의식을 파헤치려고 하는데,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늘 내거는 표어가
배 굶주리는 이들에 대한 동정과 책임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로 부터
어떤 사회복지적 실천을 강요하는 의무만을 찾아냅니다.
아마 이에는 그들 나름의 어떤 컴플렉스가 반동적으로 작용한 듯합니다.
그리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제 주장은 이렇습니다.
지구자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손에 쥔 그 무엇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으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굶주림은 내가 배부름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결국 내가 말하는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 '이유'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렇게 일상적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을 간접적으로 빼앗는 행위로 인해서
결국 타인의 '희생'이 결과 되기 때문에 여기에 미묘한 도의적 책임이 자동적으로 부가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만 이러한 한정된 자원의 세계에서의 역학관계를 보여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여기에 제 주장의 입지가 구축됩니다.
즉 자신의 '밥'은 소중히 여겨서 하루 세끼 꼭 챙겨먹는 이들이
마음공부에'만'매달려서 '밥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실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극단적 초월적과 관념을 추구하는 것을 “독선이다”라고 칭할 근거를 얻는 것입니다.
자신이 밥 먹는 문제를 중시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밥 먹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무심하다면
이해를 할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밥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자기 합리성’은 있기에 들어 줄만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하루 세끼 안빼 놓고 꼭 챙겨 먹으면서 그에 대한 (역학적)책임이 있는
굶주리는 타인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 말로 언어도단이지요.
그렇다고 나는 세상의 모든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밥 굶주리는 사람에 대한 책임을 가져라라고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라는 도덕적 책임을 지워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생계-생존행위(밥)가 다른 생명에 어떤 영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해와 책임도 못 느끼는 이들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사회', '나'와 '자연'을 극단적으로 구분하여,
오직 '자기의 마음 속에서'만 평안을 찾으려는 극단적 관념론, 극단적 유아론자들이
도를 찾는다며 거창한 미사어구 남발하는 것이 그 자체로 넌센스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의 역학을 등한시 하는 것은 결국 ‘초월론’을 추구한 결과로 봅니다.
하여 이에 나는 저기 서 있는 이들의 배 굶주림이 내 것인 줄 모르는 이들이,
어찌 '모든 것이 하나다. 마음을 비우면 안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냐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배 굶주리는 이들의 고통을 내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어찌 저기 서 있는 이들의 마음 속에 결국 내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을 알 것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저기 서 있는 '너'라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모르는 이들이,
어찌 색즉시공을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는 ‘도덕적 실천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그렇게 역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110.♡.85.230) 작성일
문제는 일부의 이기적인 거대부호들이지 일반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은 오히려 누릴 것을 풍족히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겨워하는 그들에게 더 가난한이를 도우라고 하니 짜증이 나게 마련이죠.
현실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자선을 한다고 나서도 변화되는건 제로에 가까운데 말입니다.
그래서 더 큰 해결책이나 근본적 해결책을 궁구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업에 성공을 하여 복지사업을 해나가는 CEO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나'는 책임 없고, '그들'만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한 판단의 '근거'를 말씀듣고 싶습니다.
일반인(나)의 삶이 이웃과 사회를 파괴시키지 않는다고 여기는 '근거'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쓴 얘기지만 저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도와라!'라면서 '복지적 실천'을 강요하는게 아닙니다.
천천히 다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110.♡.85.230) 작성일
다른 사람의 굶주림은 내가 배부름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논리의 비약입니다.
일반인들에게 비합리적인 죄의식을 심어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굶주림이 내가 배부름에 의한 것이라는 말 자체가 죄의식을 심어주는 말입니다.
지구 자원의 한계가 있다면 평균 이상으로 가져가는 이들이 평균 이하의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지
중간층의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남을 도와야 한다는 어떤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무에서 남을 돕는 것 보다는 이타심에서 남을 돕는 것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초월적 관념을 중시해서 물질을 도외시하는 것은 저도 부정적으로 봅니다.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58.♡.152.238) 작성일
이 분 김기태 선생님 책에 나오신 분이네요...깜짝놀랬습니다. 방금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사회복지 전공하시고 시민사회활동 하시는 분이네요. 언뜻 보기에 그냥 생각이 복잡한 분이구나 했는데
몰라뵀습니다.. 잠시 게시판 검색해보니 일부 신문에도 나오신 적이 있네요..
일단 선생님께서는 이곳의 정서와 별로 맞지않으신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이독경 하고 계실까? 한 며칠 궁금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속세를 잊으(?)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속세의 문제에 관심좀 가지라는 얘기가 참 재밌기도 하면서 한편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같이 행동까지 해주실 분들이 선생님 주변에는 많이 있을 테니까요..
자신의 생각이 대단히 강한 분이라 딱히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순수하게 호기심에서 딱 두가지만 말씀 드려 보고 싶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계신지..
1.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어있다는 전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생명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서 옵니다. 지구의 모든 먹거리들은 지구의 자원을 소모해서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태양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순환 재사용 될 뿐입니다. 소모되는 것은 태양이지요. 기술이 발전하고 인구가 많아지고 생산량이 늘어나면 훨씬 더 많은 먹거리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에너지는 우리가 다 갖지 못해서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누군가 굶는다는 생각은 비약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인구가 적을때 인류는 가장 먹거리가 풍부해야 합니다. 인류가 두배로 늘어나면 1인당 먹거리는 반으로 줄어야되고, 10배로 늘어나면 1인당 먹거리는 1/10로 줄어서 다 굶어죽어야됩니다. 실제 그렇습니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1인분의 먹거리를 먹어치워 다른 1명의 사람을 굶어 죽이는 대신 단 한줌이라도 인류의 지적인 발전에 공헌하면 10명 100명분의 먹거리가 새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파이가 커지는 것이지요.
2.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의 삶에 공헌 할 수 있는데 그 중 선생님처럼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공헌 하시는 분도 있고, 김기태 선생님처럼 마음의 평화를 나눠 줌으로써 공헌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원시시대라면 맹수를 피해서 사과 하나를 더 따오는게 인류를 위하는 길일것이고 농경시대라면 책 한 줄 읽을 시간에 땅 한번 더 파서 씨앗 하나 뿌리는게 인류를 먹여 살리는 길일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책상놀음이 인류의 눈부신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 왔고, 그것은 쉽게 폄하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의 공헌' 을 너무 나쁘게만 바라보지 마십시요.. 세상엔 아주 많은 길이 있습니다. 인간세상은 이제 한 사람의 머리로는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복잡해졌습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사시는 선생님의 삶을 존경합니다. 무관한 사람들 까지 설득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그 넘치는 에너지도 존경하구요. 저희같이 세상에 무지한 인간들이 다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까지 살펴주시는 사회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반갑습니다. 공유님과 베가님의 말씀에 대한 제 생각은 위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만 김기태 선생님 책에 실린 제 이야기가 사실과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과거 올린 글을 그대로 퍼 올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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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김기태 선생님! 책에 올린 제 글에는 사려깊은 주석이 필요할 듯 합니다.
게시일 : 2008년 4월 1
이름 : 둥글이
1.
저는 김기태 선생님의 지혜에 탄복을 하는 사람이며,
분명 김기태 선생님식의 가르침이 필요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김기태 선생님의 방법론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는 진리'가 아님을 거듭 주장한 사람으로서,
김기태 선생님의 책에 올리신 제 이야기의 앞뒤가 잘려 나갔음이 안타깝습니다.
제가 제기한 제 고민을 해결해 주지 못한 상태에서 마치 상담을 통해서 제가 제 고민을 해결한 것같이
그리 올리신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죠.
2006년 7월 26일에 저는 '궁금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질의방에 글을 올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돌아가는 사회'를 바꿔낼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생님은 사려깊게도 '마음을 비우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정성스레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선생님도 예전에 세상의 문제 때문에 많은 고뇌를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것이 그 자체로 완벽하게 보였다는 경험담을 통해서
마음을 내려놓음으로 세상이 좀 더 온전하게 보였었다. 그러니 너도.
'그냥 맘놓고 활동해라. '스스로가 잘 피어나면 긍정적 결과가 있을 것이다'는 취지였습니다.
사실 그말씀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질의한 것은 제가 스트레스 받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법였습니다. 선생님은 제 질문을 너무 주관적인 관점에서만 축소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둔다'고 해서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두면 세상의 문제는 더 악화됩니다.
물론 있는 그대로 두면 내 마음은 편해질 수 있기는 하겠죠.
따라서 내 마음의 문제만의 해결을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둘 필요성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개인의 마음' 전문가이신 선생님에게 사회문제에 대해 질의한 것 부터가 오류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여간 애써 답변 주신 것에 대해서 우선 감사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장 제가 감사의 표현을 드린 것 자체를 제 고민이 끝난 것으로 올려 놓으셨더군요.
책에서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그 후로 이어지는 사실은 좀 달랐습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을 질문드렸습니다.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법에 대해서 질의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답변이 없으셨죠.
제가 만약 '세상에 대한 걱정에 매달려서 그것 때문에 잠도 안오고 괴롭습니다'는 고통을 하소연 했다면,
선생님은 그에 대한 훌륭한 처방전은 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때문에 불면증 걸린 사람도 아니고, 그것때문에 그러한 질의를 올린 것도 아닙니다.
저는 다만 사람들과 자연이 고통받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 혹시나 방법이 있으신지
질의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엉뚱하게 불면증 환자에게 내려줌직한 처방전을 내려주신 후에 그 후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안해주신다는 것입니다.
2.
김기태 선생님은 이 분야(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이해가 부족하심은 스스로도 자인한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2006년 9월 8일자 글 '너희는 왜? 나를 박대하느냐!!'! 를 썼을 때
김기태 선생님은 처은에는 제 글에 분개를 하시고는 댓글을 다셔서
'...자신 안에 있는 커다란 들보는 조금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그리 남의 눈의 티끌만을 분노하시오? ...' 라고 저를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을 아시고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제 아는 바를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말씀을 죽 지켜 보시더니 '반갑습니다.' 는 글을 주시면서,
저를 오해한 부분이 있음을 해명하셨습니다.
저는 그에 대한 답변에서 선생님이 화두로 잡고 계신 '개인적인 자유'의 문제와 병행해서 '사회적인 아픔' 의 문제에까지 고민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에 선생님은 '맞습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저에게 주셔서...
'제 가슴 속에서도 어떤 안타까움으로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 그 말씀을 들으매 정말이지 보다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 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는 '마음을 비우고, 사실을 인정하면 되는 일'로 끝나지 않는(즉, 김기태식 해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인정하신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후로 답을 안주셨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 방식의 관점에서는 제가 제기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관점에서는 사회적 역학관계를 살피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집중되는 경향은 그 양자를 함께 취하기 힘든 법입니다.
사실 저 같이 어설프게 '정신문제'와 '사회문제'에 동시에 관심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는
선생님같이 확실하게 정신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가지고 계신 능력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책에 올려 놓으신 저의 이야기는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이 사회적 변화를 깨워나가게끔 하는 '의지'와 '열정'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 오히려 사회 변화를 (결과적으로)가로막는 결과를 제공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를 '사회문제'에 대한 과도한 강박과 집착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이에 대해서 선생님의 조언에 의해서 그러한 강박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장한 바는 사회문제는 결국 '나'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엉뚱하게 논점을 달리해서 저를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게 깨달음을 주신 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참으로 부적절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김기태 선생님이 스스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말씀을 하시는 실수를 하신 것이란 것입니다.
선생님의 전문분야는 주로 '강박증' '집착증'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시는 것이지,
사회적 역학이 어떻게 개인의 마음에 작용하느냐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선생님은 이러한 연관성(개인과 사회의 연관성)을 따지거나 고민한 결과를 보여주시지 않으셨고, 2006년 9월자 답변도 안주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책에 저에 관한 이야기를 실으시려거든. 이러한 내용에 대한 주석을 사려 깊게 붙여주시던지 아니면 책에서 빼주시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