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법정의 차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10건 조회 6,913회 작성일 10-04-08 10:23본문
저는 비교 분석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빚어내는 불이익이 엄청난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함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이해를 서로 비교합니다.
김기태 선생님의 책은 줄을 쳐가면서 공부를 했는데, 참으로 훌륭한 분임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 덕에 많은 분들의 마음의 아픔이 치유되는 기적도
접할 수 있었지요. 일반인들은 감히 흉내 조차 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 책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눠줬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당수의 분들이 그러한 김기태 선생님의 앎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왕도' 쯤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으로 그간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 믿음과 지지속에서 '안정'이 도래하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믿는 것을 면밀히 살피는 것은 참으로 번거롭고 어렵습니다.
이를 통해서 어느정도의 자기분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태-법정의 차이에 관해서
1. 차이
“있는 그대로가 진리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김기태 선생님과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했던 법정 스님의 차이는 무엇일까?
김기태 선생님은 사람들의 ‘억눌리고 집착된 마음’의 왜곡을 풀어내는데 특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를 위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법정스님은 ‘하나라도 더 갖고자 하는 의지’가 결국 스스로를 해하는 길임을 알린다.
이를 위해서 “버리라”는 가르침을 강조한다.
언듯 보면 이 두 분의 이야기는 그냥 ‘좋은 얘기’인 듯 하다.
하지만, 문제의 경향성과 작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 많은 차이가 있다.
2. 연습문제
가령, 누군가가 “하나라도 더 갖고 싶은데, 이런 욕심 된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요”라고
이 두분에게 상담을 요청했다고 하자. 이에 대해서 이 상담자는 두 분으로부터
전혀 다른 답을 듣게 될 것이다.
김기태 선생님은 아마 “욕심도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냥 그 상태에 반응해라”는 조언을 해주실 것이다.
이는 개인의 마음 작용의 역류를 바로잡고 내부적인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다.
반면 법정스님은 아마 “그러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당신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라고 조언을 해주실 것이다. 이는 개인의 의지-욕망의 작용이 세상에까지
작용해서 가장 긍정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마음가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언이다.
3. 문제를 다루는 입장
김기태 선생님의 치유는 나의 마음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반면 법정스님의 치유는 욕심을 내려놓는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4. 각각의 입장이 다루지 않는 것
각각의 조언이 다룰 수 없는 영역의 것을 살펴보면 차이는 확연하다.
우선 김기태 선생님의 조언은 ‘개인의 마음 갈등’을 해결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그러한 욕심이 고조되어 빚어낼 사회적 파장에는 관심이 없다. 가령 김기태 선생님의
논리로는 지구자원을 독점하는 부자들에게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던 말던 그것은 김기태 선생님의 논리로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기태 선생님이 다루는 것은 ‘인간집단’ ‘사회작용’ ‘환경문제’ 등의
거시적인 차원의 그것이 아니라, ‘오직 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부자’가 마음의 갈등이 생겨 김기태 선생님에게 말씀을 청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관심외 대상이다.
물론 김기태 선생님도 지나가는 말로 그러한 세태~ 즉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
부자들의 과한 욕심이 빚어낸 결과 등에 안타까움을 토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김기태 선생님의 ‘문제해법관점’에서는 그러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반면 법정 스님은 소유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번뇌가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까지 파괴시킬 수 있음의 ‘범자아적’ 문제를 다뤄낸다. 법정스님이 장준하선생,
함석헌선생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단체를 구성해서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은
괜한 것이 아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입장을 밝힌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스님은 사회적 착취와 부조리, 부정이 빚어내는 인간 고통의
근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명확하게 ‘소유의 문제’로 집약하신 것이다. ‘소유욕망의 버림’을
설법하신 것은 결국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평안까지를 이뤄낼 수 있는
희망찬 세상의 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발적 가난’의 삶을 추구하면서 살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그러한
종합적-관계적-현실적 이해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방법은 김기태 선생님의 방법과 같이 개인의 억눌린 마음을
풀어주게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스님의 방법은
개인적 억눌림(강박, 집착)을 풀어내는 것과는 약간의 관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5. 각각의 이해가 다루는 범주
이 양자의 방식이 다루는 문제의 범주를 구분하자면
김기태선생님의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의 문제만을 다룬다.
반면 법정스님은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그렇담 법정스님이 다루는 범위가 더 포괄적이기 때문에 법정스님이 훌륭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김기태 선생님이 다루는 ‘개인의 문제 해결 방법’은 고도로 집약적이고
응축력이 있어서, 그 나름의 특유의 효과를 발휘하고,
범정스님이 소유욕의 버림을 통해서 ‘개인의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관점도 나름의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 양자는 모두 필요하되, 그 우위를 비교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6. 각각의 믿음의 영향력 차이
두 분의 지혜는 참으로 뛰어난데, 두 분의 영향력은 차이가 많다.
법정을 아는 분들은 많아도 김기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이건 김기태 선생님이 능력이 뒤지고, 법정스님은 능력이 뛰어나서 일까?
그건 아니다.
그 차이는 ‘주장의 보편성’의 차이로부터 빚어진다.
1) 김기태 선생님
(1) 제한된 대상에 맞는 이야기
우선 김기태 선생님의 이해의 핵심인 ‘있는 그대로 둬라’는 말은 법정스님의
‘무소유’ 보다는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대로 둬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고, 다시 생각하는 싸이클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세상의 그 어떤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이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자신의 삶을 그대로 두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삶이 반복된다.
김기태 선생님 방식에서 말하는 ‘그대로 둠’은 기실,
내면적인 갈등과 분열이 빚어지는 순간의 작위적 변화의지의 중지 를 이야기 한다.
즉, 내면적으로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 ‘내면적 분열을 그만둘 것’을 명령하는
지극히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해는 보편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실 예를 들어보면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주로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고민’에 빠져있는
이들이 이곳 싸이트에서 상담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서 김기태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라”고 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말은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고민을 계속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김기태 선생님이
만약 “집착과 강박을 그만둬라”고 명령적 방법을 하면, 오히려 내면의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기 때문에 집착증과 강박증의 뒷 통수 치기 전법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라”는 어법을 쓰는 것이다. ‘집착’ ‘강박’의 문제에 있어서는
직접명령의 방법보다 사실을 인정하는 ‘통찰의 방법’이 문제 해결에
더더욱 수월하기 때문에 그런 어법이 쓰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노장 사상에서는 물론, 불교, 그리스도교, 심리학, 철학 등의 각종의
사상과 사조에서 쓰여왔던 방법이다. 다만 김기태 선생님이 이를 ‘집약적’이고
‘실질적’으로 재해석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맞게 실용화 시켰을 따름이다.
어쨋튼 ‘그대로 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그렇게 ‘내면적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뿐이다.
생활의 문제, 사회의문제, 환경의 문제까지를 ‘그대로 두는 것’이 해결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기태 선생님의 방식은 이렇게 한정된 영역(내면의 갈등)에 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집착’ ‘강박’의
문제에 대해서 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주로’ 이곳 싸이트의 선호 계층인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그대로 두고 인정하는 가르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면 세상의 평화가
올 것이다.’고 억지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할 수 있다면,
단군, 플라톤, 베버, 마르크스 등의 그 어떤 사이비 종교가 주장하는 세상도 천국이 될 수 있다.
‘모두가 그러할 수’ 있다면....
결국, 김기태 선생님의 방식은 (좀 과장해 보자면)‘강박’ '집착‘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들 이외로부터는 관심을 받아내기 힘든, 즉 보편성을 얻기 어려운 이해라는 것이다.
강박, 집착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 아닌 이들은 ‘있는 그대로 두라’는 말로부터
별로 얻어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강박, 집착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정도에 따라서 내용에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이들이 알게 모르게 그러한 증세에 시달린다.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와중에 삶에 적응하기에 굳이 그러한 이해를 얻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둬라’는 말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이유이고 이곳 싸이트를 즐겨 찾는 이들의 ‘폭’이 다양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이다.
(2) 다각적으로 문제를 포괄하지 못하는 제한성
김기태 선생님이 법정 스님에 비해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김기태
선생님 방식의 해법이 제반된 문제를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명박 각하가 김기태 선생님에게 와서 “4대강 사업을 진심으로 추진하고 싶은데,
오직 국민들의 반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정말 추진해야겠는데 어째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김기태 선생님의 논법대로라면 뭐라고 답변을 할까?
김기태 선생님은 아마 “그냥 추진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닿는대로 하십시오.
그대로 하십시요”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기태 선생님의 논리의 주된 관심은
‘혈세의 올바른 쓰임’도 아니요. ‘환경의 보호’도 아니요. ‘후손들의 안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게 착취당하는 시민이던 착취하는 정치인이던 관계없다. 오직 질문을 하는 이의 마음의
평안만 찾게 하면 된다. 김기태 선생님 방식으로는 ‘개인의 마음의 문제’ 이외의 나머지의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렸기에 중요한 것은
‘외부세계’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이의 ‘마음’의 문제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는 보편성이 상실된 측면이 없지 않다.
“4대강 사업 그거하려고 기초수급자들 겨울 난방비(연탄) 지원 700억도 삭감하고,
학교급식도 못하게 했죠? 더군다나 그 사업은 환경에도 안좋습니다. 그만두십시요”라는 말이
오히려 더더욱 ‘보편성’을 획득한 말일 수 있지만, 김기태 선생님 논법으로는 이런 말은
나올 필요가 없다.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관점상 그러하다.
2) 법정스님
김기태 선생님에 반해 법정 스님이 주장하는 바는 ‘보편성’을 획득했다.
‘무소유’에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가짐’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무소유의 생활방식이
빚어낼 긍정적 사회작용까지가 염두 되었다. 즉, 하나라도 덜 갖고 덜 쓰는 삶의 자세의 획득을 통해서,
하나라도 더 갖고 더 쓰려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갈등과 불화를 해소할 길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소유’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자인 사람에게나,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강박 집착증세가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보편적인
깨달음을 전해준다.
물론 이러한 법정스님의 가르침도 노장 사상에서는 물론, 불교, 그리스도교, 심리학,
철학 등의 각종의 사상과 사조에서 이미 거론되었던 것이다. 다만 법정스님은 그것을
핵심적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말로 풀면서 자신의 삶 속에 실천했다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7. 마음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
우선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은 법정스님이 아닌 김기태 선생님의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병이 없는 사람들 역시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병이 있을 수 있음에 김기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을 대략 이해해서 ‘나의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면
그 둥지로부터 떠나오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해서, 삶이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질적으로 부딪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후에는 법정스님 등의 가르침을 따라서 ‘나’의 문제를 ‘너’ ‘우리’의 문제에까지로
엮어내 작용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심과 실천으로 향하는 길’은 몇몇 극단론자, 관념론자, 초월론자 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마음을 버리고 물질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각각의 ‘나’들의 마음 작용이 치열히 어우러져 작용하는 도가니일 뿐이다.
세상의 문제 관심을 갖는 것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력과 반대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마음의 작용을 더욱 복합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의 문제에 나서서 실천을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 연결고리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가 우선이다'는 이해에만 매몰된 이들은
결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댓글목록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69.♡.240.165) 작성일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그런데 비교 분석한 자료가 너무 부실하군요
비원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짜깁기하고 가위질하여 마치 그분을 횡뚫어보시는 듯합니다
스스로 본인이 체험하고 가본 길도 조심스러운데 가보지도 않은 길을 이것 뿐이다듯 하는건
참으로 둥글이님 같습니다 ^^
황송하게도 마치 거지가 구걸할때 강요하고 윽박지르듯한 느낌입니다
아, 물론 둥글이님의 훌룡한 뜻은 뜻은 압니다
그런데도 둥글이님의 글을 보면 폭력당하는 느낌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마치 둥글이님이 훌룡한 일을 하고 다닐때 사람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분노가 글 속에 이글거립니다
아, 모두 부족하고 이기적인 수수 탓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저는 어떤 주장을 할 때 제 주장의 구체적인 근거를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의 근거도 얘기하지 않고
'뭐가 어쨌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억지'고 '아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제 주장이 부당한지 정당한지는 판단해보시라는 입장으로
늘 그러한 근거를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고, 이에 불만이 있으면
그 구체적인 근거에 대해 정확히 반박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수수님의 글을 보십시요.
문제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을 직시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씀하시면 되는데,
막연히 모든 것을 다 싸잡아서 '부실하다'고 얘기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서로간에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면 피하셔야합니다.
더불어 '구걸할때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듯한 느낌'이라는
'사람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분노가 글 속에 이글거린다'는 표현까지 하시는군요.
왜 이렇게 상대방의 가치와 감성의 문제까지 다 끄집어내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런 말씀 역시 서로간에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면 피하셔야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해보십시요.
어떤 부분이 제가 윽박지르기 위해서 쓴 말 같습니까?
어떤 부분이 제가 폭행을 하기 위해 쓴 말 같습니까?
어떤 부분이 제가 '문전박대당한 분노'가 스며든 표현 같습니까?
'막연한 감이다'라고 말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요.
더군다나 위의 글은 수수님에게 김기태 선생님을 모욕하는 글로 보이십니까?
수수님이 존경하는 김기태 선생님을 모욕하는 글로 보이십니까?
글을 차분히 다시 읽어보시고 왜 그렇게 보셨는지 말씀 들어보고 싶습니다.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112.♡.0.169) 작성일
화가 날때 화를 내는 수수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전 인터넷상에서 글로 다수를 공격하는 이런 사람을 많이 봐서..
보고도 화가 안난 척 하는 연습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꺼꾸로 같이 놀아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뭘 방어하려고하는지...
다 그런 척인것을..
산책님의 댓글
산책 아이피 (218.♡.179.54) 작성일
저 위에 처음 쓰신 글까지 지우고 여기다 다시 쓰시고... 베가님 너무 심각하시다요...
(베가님 위에서 처음 쓰신 글들 되게 적절하고 좋았는데....)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둥글님 같은 사람이 이런 사이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전혀 부정적 영향만 끼칠 것이라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때때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리라 보는데요....
사실 둥글님 남 못할 짓 하는 사람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고 누굴 해꾸지 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고작해야 자기 신념에 차서 그에 맞게 글과 말을 풀어놓고 있을 뿐인데...
가만 보면 엄청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 뿐이고,
그것도 자기딴에는 완벽하게 이론을 갖추고서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는
좀 멋대가리가 없긴 하지만 법정처럼 외롭고 카랑카랑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물론 너무 자기 신념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 그런 지 일면 바늘구멍도 안 들어갈 것 같은 면이
인간적으로 좀 아쉽긴 하지만요....
베가님....
그리고, 척 좀 하면 안되나요?
때로는 척도 좀 해보고.... 진솔하게 화 내기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다들 뭐, 그러는 것 아닌가요?
저만 그런가요?
옛날 찾아간 신림동 제 옛친구 고시원 방에
<신중하게, 하지만 심각하진 않게>라는 글이 붙어있더군요.
베가님 위 글 내용을 읽고나자 문득 그 문구가 생각 났습니다.
그냥 슬렁 슬렁 가볍게 사십시다요...
저 지금 이러는 거... 척 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ㅠㅜ 제가 도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오해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찔러서는 몸에 빵구가 나지는 않지만,
도라이버로 돌리며 해체까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ㅋㅋ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112.♡.0.169) 작성일
과도기인가 봅니다.
정신 해체 중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로즈마리님의 댓글
로즈마리 아이피 (118.♡.233.129) 작성일
둥글이님의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겟지만, 나름 제생각은 그렇습니다.
법정스님과 김기태 선생님의 가르침은 우선 타켓이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법정스님은 제기 알기로는 어떤 개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하시거나 다루시지는 않으신 걸로 압니다.
보편적인 대중들을 상대로 주로 법문을 하셨기 때때문에..
아마 개인에서 이웃, 사회, 국가 등등의 폭넓은 이야기들을 하셨고, 주로 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셧던 걸로 압니다.
김선생님 같은 경우는 제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이런말을 하는 것이 외람될지 모르겠으나 이 사이트에서의 느낌으로는..개인적인 적나라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시는 걸로 압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중심접근의 심리치료와도 흡사합니다.
이렇게 한사람의 개인의 문제를 타켓으로 이야기하느냐..보편적인 일반대중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짐은 당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와 문제와 마음이 닿는대로 사람들은 그분들에게로 향하겠지요..
어떤 우열이나 그 다음단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여기는 여기까지..저기는 저기까지..라는 것을 알고 그기에 맞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정확한 얘기십니다. 저도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양자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까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님은 잘 읽어보시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제가 쓰려는 바를 이해하신 첫번째 분이십니다. ^^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58.♡.152.238) 작성일
잘 알고계시네요..
심리치료실에 와서 사회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죠..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칼융이 심리학자입니까? 사회학자입니까?
에리히 프롬이 심리학자입니까? 사회학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