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과 '깨달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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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0건 조회 6,087회 작성일 10-04-18 11:18본문
앞서 저는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웃의 문제, 사회의 문제, 인류의 문제, 자연의 문제를 제껴두고
오직 내 마음의 문제만 잡고 있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하려합니다.
앞선 질문은 제 3의 관찰자 입장에서의 질문이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인 참여자의 한사람으로서의 질문입니다.
혹시 사람 죽어나가는 모습이 안타깝습니까? 2
1. 살인과 깨달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이 타인의 죽음의 이유와 책임이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면서도 우리는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이 생기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한국인들은 1인당 평균 지구를 2.03개 있는 폭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지구자원은 과소비되고 자연환경은 파괴됩니다.
이 결과 힘있는 이에 의해서 힘없는 이의 삶의 기회는 착취당하고,
후손들은 미래의 존립자체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손에 쥐는 만큼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은 덜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아마 이 글을 보실 대부분의 분들은
나는 가난한 축에 속해라며 스스로의 '지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산상 한달 76만원 이상의 수입의 삶 자체가 '지속가능한계발'을 방해하는 삶입니다.
설령 76만원 이하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더 잘 먹고 잘 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이상,
'지구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76만원이하 수입의 삶을 사는 것은 자발적이 아니라,
대부분 경쟁에 낙오된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곤 그 이상 수입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지만 지금은 단지 잠깐 뒤쳐진 결과이고,
앞으로 더 벌 욕망을 고도화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 우리의 수입이 적고 많고의 문제와는 별도로 그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지구생태계를 붕괴시키는, 후손들의 존립을 어렵게 하는,
내 자신이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타인을 살육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욕망이 집단화된 결과 세계가 이렇게 된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인문학적 상상력이 빈약한 분들의 경우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총이나 칼을 가져다가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해 목숨을 거둬들이는 것만
'살해'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본이 어떻게 흐르고 이어지는지, 여기에서의 내 자신의 일상의 욕망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 표출되는지, 내 자신의 투표행위가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되돌아오는지를
판단할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각자가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사례
가령 한나라당에 대한 투표행위로 인해서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정책 기조가 바뀐 후~
▲541억 교육급식 예산이 2010년 전액 삭감 ▲903역 저소득층 겨울 난방지원비(연탄 등)예산 전액삭감
▲1조2000억원 신규일자리 예산(희망근로, 청년인턴 등) 전액삭감
등이 빚어졌습니다.
4대강 사업을 위한 예산삭감였습니다.
이로 인해 생활고에 허덕이는 이들의 삶이 더 욱 처참해 지게 되고,
끼니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어려워진 삶에 비관해서 자살하는 이들의 수도 증가합니다.
참고로 이러한 천민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한국사회의 '자살률'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
OECD 국가중 1위로 한해 평균 만 몇천명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투표행위로 인한 직간접적인 결과만 이정도입니다.
이를 단순히 국내의 문제에서만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의 문제로까지 확대할 때는
더욱 심각한 문제점들이 호박덩쿨 잡아 당길 때와 같이 눈에 드러납니다.
한해 평균 물, 식량부족으로 수천만명의 인류가 말라죽는데, 이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보다 세계화의 유리한 고지를 먼저 선전함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세계가 자본화 세계화 되기 전인 수백년 전에는 그곳 아프리카 주민들이
그렇게 떼죽음 당할이유가 없었지요.
3.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깨달음의 관계
이렇게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의 생활 자체가 '타인'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이에 대해 무관심해야할까요?
우리 자신이 타인의 죽음의 이유와 책임이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해야할까요?
쉽게 말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면서도 우리는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존재'와 '당위'의 문제로 구분되어서 이뤄져야 합니다.
4. 존재와 당위
존재적 판단 : 우리는 타인을 희생시키면서도 이에 아랑곳 않고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위적 판단 : 하지만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의 지반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죽음을 외면하고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는 넌센스입니다.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삶을 기반자체가 다른 사람이 깨달을 기회마저도 못주게 만드는 삶이라는 사실은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문제는 둘째치고, 너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깨닫기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최소한 다른 사람의 그것도 고민해 볼만한데,
다른 사람의 깨달음의 문제는 고사하고 그들이 생존할 수도 없게 만드는 현실상황을 만들다니요.
그것은 분명 큰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일수록 철저하게 '현실' '인류'의 문제를 깨달음의 문제로부터 격리시키고
'오직 나의 마음'만을 추구하면서 극단적인 '유아론'에 매몰되기에,
'타인이 곧 나'라는 사실은 고사하고 '타인의 상실'을 볼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하시렵니까?
존재적으로 '타인의 죽음을 불러오는 내 삶의 기반의 문제'를 무시하고 '오직 깨달음'
'오직 내 마음'만을 잡고 나아가시겠습니까?
그러한 이율배반성을 극복하는 것이 깨달음에 근접한다는 판단하에 당위적으로 문제를 살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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