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be’ 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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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5건 조회 6,216회 작성일 10-04-19 00:31본문
이 글은 통속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Let it be’의 문제까지를
꼬투리 잡으려고 쓰는 글은 아닙니다.
그에 맹신할 때 빚어질 재앙을 다룬 글입니다.
1. 강박의 이유
인간 정신이 자유 할 수 없게끔 구속의 말뚝에 붙들어 매는 강박과 집착!
왜 그러한 증세가 발생되는가?
인간이 접하는 상황에 대해서 ‘개연성 있는 사물과 현상에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심적, 생리적
자극이 이뤄지는 것을 ‘반복강박’이라고 한다.
만약 그러한 심적, 생리적인 기제가 작용되지 않으면 우리는 매 순간 생소한 현실을 접하며 살아야 할 것인데,
이로 인해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강박적인 심리’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심리적 기재이다. 다만 정도가 좀 높아졌을 때 문제가 된다.
이러한 강박증은 다양하다.
편의적으로 분류하자면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으로 나눠질 것이고,
이에 수도 없는 강박의 사례가 나열될 것이다.
생리적으로는 섹스중독, 우울증 등이 있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는 결벽증에서 불면증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대인공포증은 물론이거니와 자신감 부족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부류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서로 상호작용하여 상황을 악화시키곤 한다.
2. 강박의 치료
그렇담, 이 강박증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은 무엇일까?
그 특효약은 말 그대로 그 강박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정확한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자극이다.
이 자극은 ‘강박’ 현상의 작용을 역이용할 때 발생한다.
강박증은 ‘개연성 있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심상이 과도하게 이뤄짐으로
발생하는 증세이므로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개연성’을 끊고, ‘반복성’ ‘지속성’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 예로 ‘대인공포증’이 시작될 때, “공포증을 없애야 해”라는 의지적 노력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강박증에 있어서 그러한 의지적 노력은 오히려 ‘개연성’을 확장하고,
반복성과 지속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이때는 차라리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불면증’도 마찬가지이다.
잠이 안 오는 상황에서 “잠을 자야지”라고 아무리 다짐을 하고 노력을 해봤자,
이미 ‘깨어있음을 확인하는 강박의 회로’의 작동만 더욱 요란해질 뿐이다.
이때는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자신감부족’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있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하는 순간. 과거 자신 없이 살아왔던 기억과 심리와 생리작용이
동반하면서
‘자신없음’의 이미지가 개연적으로 현실과 맞물리면서 무참한 무기력의 구렁텅이에
자기 자신을 빠트린다.
이때 역시 자신 있기 위한 노력보다, 그냥 ‘멍’하니 있는 편이 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강박증 관련한 거의 모든 증세가 이러한 특성을 갖는다.
3. 강박의 특효약 ‘렛잇비’
여기에 바로 '렛잇비‘의 마술이 있는 것이다.
강박적인 증세는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서 바꾸려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훨씬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이러한 ‘렛잇비’가 강박증세의 완화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안되는 현실(지금)’과 ‘원하는 현실(목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에 저항해 버리면,
자아가 분열되고, 심리적으로 역류 현상이 빚어져 이에 증세가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이런 때는 안되는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면 분열된 자아가
화해를 하면서 그 간격이 좁아지는 와중에 서서히 원래의 자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한 다른 병리적 문제가 없는 한 모든 인간의 정신구조는 이러한 작용을 답습한다.
결국 이러한 작용을 염두에 둬 ‘렛잇비’하라고 하는 것은 선인들의 고도의 통찰의 결과이다.
구겨진 종이를 바닥에 던지면 원래 상태로 펴지기 위해서 기지개를 펴듯이,
우리의 상처 난 자아도 그냥 놔두면 상당부분 자유롭게 치유가 되는 것이다.
4. 만병통치약이 아닌 ‘렛잇비’
문제는 그러한 강박 증세를 완화, 치료하기 위한 특효약인 ‘렛잇비’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만병 통치약이 아니라, 다만 그 증세완화의 특효약일 뿐이라는 것이다.
‘렛잇비’를 통해 우리는 과거로부터 시달리는 엄청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세상이 뒤 바뀌어 보여 다른 이들에게 이 마법의 효용성을 떠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애초에 그러한 강박증세가 없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좀 더 폭넓은 앎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렛잇비’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앎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렛잇비’를 절대진리화해서 만병통치약으로 우상시 떠받들어버리면,
그 자체로 우리는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된다.
물론 그 함정은 기존의 여느 강박적 함정과 달리 참으로 편하고 달콤하기에
함정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안주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이는 비교하자면 여느 강박의 함정이 지옥 불구덩이의 함정이라면,
이러한 ‘렛잇비’의 함정은 선녀와 함께하여 시간 지나는 줄 모르는 산속 세상?의 함정이라고 할까?
하지만 과거의 지옥불구덩이의 고통이 워낙 버티기 힘들었는지라,그 반대의 무한한 편안함이
주어질 듯한 렛잇비의 삶이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기에 애초에 그러한 함정에 빠져나갈 필요조차를 우리는 못 느낀다.
그렇기에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무한한 평안을 준다면 ‘렛잇비’의 삶만을 살아도 되리라.
하지만 평소 생각하고 준비해 두어야할 ‘과제’ ‘노력’를 등한시한 ‘무조건적인 렛잇비’는 결국 자신의
삶에 뒷통수를 치는 결과를 빚어낸다.
내가 서 있는 삶의 지반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하고,
내 삶이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냉철하게 숙고하지 못하고,
필요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렛잇비’의 삶은 결국 내 자신에게도 고통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렛잇비’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한 ‘과제’와 ‘노력’이 있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과제와 노력으로 인해서 오히려 스스로의 자유와 영혼이 방해받는다고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병이 나아서도 병원을 떠나지 않으려는 환자의 태도와도 비교할 수 있다.
단지 ‘그것’(렛잇비)만으로는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치료제일 뿐인 것이다.
성장을 위한 양식과는 차이가 있다.
* ‘성장이 필요없다’ ‘노력이 필요없다’는 인식은 강박증을 치유하기 위한 선결과제일 뿐이지,
치료가 끝난 후까지도 영속적으로 그에 안주할 말은 아니다.
이의 혼동만 벗어나도 우리는 ‘회의주의’라는 큰 재앙을 피해갈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회의주의에 바진 이들은 “영적 성장이 어딨느냐?”고 되물을 것이지만...
댓글목록
바다海님의 댓글
바다海 아이피 (211.♡.61.44) 작성일렛잇비................렛잇비...........이.............아따~~~좋다
로즈마리님의 댓글
로즈마리 아이피 (211.♡.128.28) 작성일
<내가 서 있는 삶의 지반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하고,
내 삶이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냉철하게 숙고하지 못하고,
필요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렛잇비’의 삶은 결국 내 자신에게도 고통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이 됩니다
< 평소 생각하고 준비해 두어야할 ‘과제’ ‘노력’를 등한시한 ‘무조건적인 렛잇비’는 결국 자신의 삶에 뒷통수를 치는 결과를 빚어낸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렛잇비’ 전의 '준비해 두어야 할 과제와 노력'이란 무얼 말하는 건지요?
각자가 살아온 삶의 여정들 외에 달리 어떤 과제와 노력을 말하는건지 궁금합니다.
둥글이님의 글에 절대 태클 거는게 아니고요..
정말 궁금해서 묻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ㅋㅋ 조심스럽기도 하시지.
제가 '발끈'할 때는 다음의 두 경우입니다.
1.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롱성 댓글을 달때
2. '1'과 같은 사람과 논쟁하고 있는데, 끼어들어서 비아냥거리는 투의 댓글을 달때.
따라서 이 두 경우가 아니면 그냥 막 댓글 다시면 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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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주셨군요. ^^
제 짧은 소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무조건적인 렛잇비'에 앞서 해야할 것이란 것은 로즈마리님이 관심갖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 삶이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냉철하게 숙고하고,
필요한 책임을 다하는 삶] 말입니다.
1. 렛잇비의 문제
각자의 삶에서 우리는 개인이 목표하고 노력한 수많은 과제를 성취해 왔습니다.
'렛잇비' 해야한다고 하면서 '노력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이들 조차도
자신 개인의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은 결국 '자기'라는 자아의 아집과 욕망을 고도화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과거 글에서 정리했듯이 그러한 '자기'를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타인의 삶의 지반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무턱댄렛잇비'라는 것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성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타파는 단순히 '내가 없다' '자아는 허상이다'는 부류의 이해에 연결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실지로 그런식으로 주절거리는 분들 보면, 자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성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자아 역시 인정할필요 없는 상황에서 결국 그냥 '렛잇비'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내가 없다' '자아는 허상이다'는 식의 발상을 가진 분들은
결국 그러한 '회의주의'와 '허무'의 함정으로 빠지는 경우가 너무 잦습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의 자아를 인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에
타인, 사회, 환경에 관심가질 필요가 없는 이러한 분들의 삶은 '결과론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타아를 인정하지 않기에 타인의 밥의 필요성은 못느끼지만
자기 자신의 뱃속에서 오는 신호에는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2. 자아 확장의 필요
따라서 제 생각으로는 이러한 '개인주의'의 타파는 단순히 '자아가 없다'는 식의 발상으로는 부작용이 많고
'자아를 확대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로즈마리님이 긍정하신대로 '내가 서 있는 삶의 지반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내 삶이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실행한다면 '너'라는 것이 단순히 '타인'이 아닌, '저쪽에 서있는 나'임을 알게 되지요.
세상과 자연도 나와 별개의 그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공동체임을 알게 됩니다.
협소하게 제 밥벌이만 하면서 살던 '나'를 '온세계' '대자연'에 내 던져야 됩니다.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구성하는 물질, 그리고 우리의 사고를 가능케 하는 신경작용은
다만 그것을 내가 조종할수 있는 '나의 하위단위'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구성물질과 신경작용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공유하고 있지요.
아니 전 우주가 우리 몸의 구성물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바다(공)에서 헤엄치는 작은 아이(색)에 불과합니다.
'나'가 '나'인 것은 다만 그 물질들과 공간과 시간의 우연한 배열에 의할 뿐인 것이지요.
우리는 다른 곳에서 헤엄치는 아이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가 아닌 '너'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공'의 바다에서 '나'가 '나'가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과 필연의 미묘한 작용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존재의 '원류'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내가 굳이 나일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게되고,
그로 인해서 아상, 집착, 욕망을 서서히 극복하면서 그 거대한 대양에 뛰어들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개인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그 거대한 대양으로서만 존재하겠지요.
즉 '헤엄치던 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바다'만이 존재하겠지요.
결국 이렇다면 우리의 존재는 시공을 초월해 전 우주의 영역과 전 우주의 시간에...
과거와 현재를 걸쳐 미래의 모든 영역에 맞닿아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과 공간성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지고,
지금 현재로 영원의 시공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러한 앎은 (틀렸다 맞았다를 떠나서)실로 많은 것을 포용하고 많은 것을 설명하고,
많은 것을 실천하게해 줍니다.
'너'가 결국 '나'임을 안다면, 타인의 그것에는 관심없이 내 배고품만 생각할 일도 없을 것이고,
'자연'이 결국 '나'임을 안다면, 내 금고에 쌓아둘 보화를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이의 끝없는 싸움과 자연파괴로 인한 후손들의 존립의 문제를 가져올리도 없죠.
정신적이고 이론적인 관념론만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의 바다'는 단순한 영적인 도가니가 아니라,
물질과 정신, 시간과 공간, 너와 나가 하나로 버무려진 비빔밥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러한 앎에 다다르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조건적인 렛잇비'는 필연적으로 앞서 말씀드린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결국 자신의 삶에 뒷통수를 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지요.
문제는 '무조건 렛잇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노력주의' '무이성주의' '무실천주의'를 동반하기에
그 함정을 벗어날 아무런 실마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력, 이성, 실천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의 렛잇비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지요.
* 참고로 '나'와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믿음까지 나가는 것은 바른 것이기는 하되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초월론과 관념론, 신비론으로 빠질 우려가 다분하고 현실적 삶과 실천을 등한시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와 '너', 그리고 '사회'와 '자연'이 연결되어 있음의 '끈'만 제대로 살피고 그 '책임'의 문제에
고민하는 것만해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로까지 넘어가면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ㅎㅎ
뭐 제가 이를 잘 알고 잘 실천한다는 의미로 이 내용을 정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방법의 '앎'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자아확대이론'?이 포용하고 있어서요.
뭐 그렇다는 얘깁니다.^^
로즈마리님의 댓글
로즈마리 아이피 (118.♡.233.129) 작성일
답변 글 잘 읽었습니다.
둥글이님의 관점은 참으로 거시적인 것 같습니다.
잘은 모릅니다만..
나라는 것을 모든 것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연기론적 관점을 보는 듯하네요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만..어떤 부분은 다른 생각입니다.
<문제는 '무조건 렛잇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노력주의' '무이성주의' '무실천주의'를 동반하기에 그 함정을 벗어날 아무런 실마리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렛잇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고를 가져오는 정서나 느낌, 사고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외부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나 일상생활은 열심히 하는 게 좋겠죠..
이 사이트에서 강조하는 ‘렛잇비’라는 것도 결국은 나와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서부터 너로 우리로..확장되어나가는 게 순서라고 생각되는데요.
내가 잘먹고 잘 살기 위해 타인의 존재 기반을 위협하는 노력으로서의 ‘렛잇비’가 아니라..
자신을 수용하기 위한 뼈아픈(?) 여정의로서의 ‘렛잇비’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초점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인정하지 않던 부분을 자신에게로 통합함으로써 ‘건강한 자아의 확립’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도 인정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인정하고 확장되어 갈수 있을는지요?
개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수용’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기주의로 보일는지 모르나..
하루종일 그것만 하는 것도 아닐테고..남 생각도 하고 사회나 환경도 생각하고, 내노라하는 실천은 못해도 조금씩 실천도 해가며.. 정도의 차이는 물론 있겠지만..
다들 그러고들 사는 것 아닐까요^^;
긴 소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ㅎㅎ 제가 극단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을 대상으로만 문제를 다뤘나 봅니다.
글을 쓸 때 '노력 자체'를 부인하는 분들이 과거로부터 상당히 많이 있었거든요.
그분들에 관심이 있다보니 그분들 대상으로만 문제를 다룬 점이 없지 않아 있군요.
로즈마리님이 지적하시는 바가 적절합니다.
[내가 잘먹고 잘 살기 위해 타인의 존재 기반을 위협하는 노력으로서의 ‘렛잇비’가 아니라..
자신을 수용하기 위한 뼈아픈(?) 여정의로서의 ‘렛잇비’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초점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인정하지 않던 부분을 자신에게로
통합함으로써 ‘건강한 자아의 확립’이라고 생각됩니다. ] 말씀 역시 통찰적으로 잘 정리하신 부분입니다.
사실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올바르지요.
그분들은 '렛잇비'를 잘하는 분들일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분들은 '무턱댄렛잇비'를 하시는 분들이고,
아마 우리가 관심가져야할 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도 인정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인정하고 확장되어 갈수 있을는지요?
개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말씀도 옳습니다.
우선 '주체'가 제대로 세워져야 하지요.
주체가 제대로 세워져야 자아 확장도 가능하지요.
저는 제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종종 생각하고 합니다.^^
문제는 이곳의 상당수 분들이 그 '주체'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없다' '자아란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곳 홈피의 사상적 지반인 노장사상의 영향때문입니다.
로즈마리님이 근래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작년 한해는 좀 바빠서 못 왔지만, 그 전까지 계속 이곳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과정에 대했던
7,80%의 분들이 대체로 그런 분들였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주로 논쟁을 이끌고 가시는 뜨신밥, 봉다리, 베가님 등은
'자아' '주체' '사회적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기에
이러한 글들이 주로 도배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는 로즈마리님은
'누가 자아를 부정하냐?' '누가 노력과 실천을 부정하냐?'고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 싸이트의 저변에 이를 부정하는 처절한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뿌리뻣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고 받고 있는 글들에 대한 잠재된 반발의 기류가 엄청나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가, 봉다리님, 베가님의 말씀에 민감히 반응했던 것도 '그런 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이었지요.
물론 그분들은 아니었지만요.
제 글에 댓글달리는 글을 잘 살펴 보면 논박은 못하고 조롱성 댓글만 다는 분들이 지금도 종종 있는데,
그분들이 바로 그러한 분들이지요.
저는 현재 잠재된 그러한 경향이 다시 언제곤 이곳에서 터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대화중에 경험했던 그 기억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사회문제에 고민은 깨달음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판단하며, 노력하는 것 자체가
허황된 일이라며 태연스럽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우글거리는 분위기요. ㅎㅎ
그래서 그때 제 글에는 항시 '자기 입에 밥알을 쑤셔 넣는 필요는 느끼면서 다른 사람의 그것에 관심갖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당신들의 이율배반성을 좀 봐라'는 후렴구가 붙어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 자체가 '논리적'이라는 이유로 부정을 했기에 소통 자체가 힘이 들었지요.
그러한 분위기를 퍼트리는 명망있는? 어떤 분?들이 다시 귀환할까봐 한편으로 걱정도 됩니다.
현란한 수사를 잘 갖다 붙이는 관계로 팬들이 많거든요. ㅠㅡ
저 같이 길고 재미없는 설명성 글을 쓰는 사람과는 비견할 바가 아니었지요.
아마 그분들이 나타나면 제가 왜 지금 이리 길이길이 날뛰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ㅎㅎ
저는 나름대로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그분들은 '관념론' '초월론' '유아론'에 빠진 분들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들로부터 현실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지금 그와 관계된 글들을 미리 써 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가 없던 분들이 처음 그분들의 '초월론' '감성론' '유아론'을 접하고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제 글은 문제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면역주사를 주기 위함이라고 할까요? ㅋㅋ
물론 이 역시 제 아집일 수 있습니다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