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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축괴 사자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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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9.244) 댓글 1건 조회 8,285회 작성일 11-11-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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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그 어느 때, 이소룡 영화 ‘사망유희’에 나오는 지한재 사범의 초기 합기도 멤버였던 삼촌, 대학 졸업 후 입산 십여 년에 가세 몰락으로 뜻을 잃고 하산하여 집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는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의 술 이력은 독특한데가 있어서 밤이고 낮이고 소금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취해 있었다. 주변의 말로는 축지법을 쓴다든지 나무젓가락을 콘크리트 벽에 꽂는다든지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내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확인할 길은 없다. 한두 달 일체의 곡기를 끊고 술 마시다 문득 밥 먹고 정신 차리면 멀쩡하게 다니는 것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지만, 어김없이 두어 달 술 마시고 이삼일 멀쩡해지고 다시 두어 달 술 마시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절망과 분노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공부는 좀 했었지만 꽤 어리버리한 촌놈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은 생각나진 않지만, 그 삼촌 문득 마루에 앉은 나를 돌아보며, “개새끼는 흙덩어리를 먹이인줄 알고 쫓지만, 사자는 뒤돌아서서 그 던진 놈을 물어 버리지.”하며 껄껄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 짧은 한순간은 까마득한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아버리고,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중3 드는 겨울, 그는 완전히 미쳐 삶을 놓아버렸다. 그 추운 겨울, 우우 부는 바람, 끝없이 뭔가가 덜컹거리는 소리, 그의 고함소리,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그 파란 불빛을 잊지 못한다. 그의 나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서른여덟이었다.

2.

더 어린 시절, 멍청한 아이들을 보고 “바보 축구, 온달아!”라든지, “할로축구, 할로축구”라고 놀리던 일이 생각난다. 바보온달은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말이었지만, 할로축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막연히 ‘할로’는 헬로라는 미국말이 변형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지만, ‘축구’라는 말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멍청하게 공을 차는 놈을 축구라고 하나?

시간이 흐르고 그러한 말조차 없어져버린 세상이 되었다. 내 나이 마흔쯤 삶이 고달프고 쓸쓸해졌을 때, 수행을 찾게 되었고, 그때 ‘한로축괴 사자교인 (韓獹逐塊 獅子咬人)’이라는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한로라는 개는 흙덩어리를 먹이인줄 알고 쫓고, 지혜로운 사자는 그 근원을 향하여 던진 자를 문다. 아득하게 잊고 있던 그 어린 날, 그 삼촌이 나를 놀리며 내뱉은 그 말이, 그 짧은 순간이 망각의 늪에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후 남방불교 수행서인 청정도론에서도 또 다른 책들에서도 그 말을 만나게 되었다. 이 말이 이천여 년 전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통하여 한국, 그중에서도 경상도까지 흘러들어와 칠십년 대까지 통용된 아름다운 욕이었다니! 그리고 수많은 흙덩이를 보게 되었다. 갈증처럼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을 쫓고 있는 나를 보았다. 특히 명예에 대한, 물질적인 풍족함에 대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망들과 성적 망상이라는 흙덩어리들을 감각기관이 이끄는 대로 그것의 노예가 되어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었다. 아니, 진흙탕이나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더 가관인 것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좌절하여 영적 우월감으로 모습을 바꾼 고약한 흙덩어리였다. 그 많은 흙덩어리들... 뒤쫓던 개.

3.

그렇다! 사자는 뒤돌아서 흙덩어리를 던진 근원, 사람을 문다. 이것이 수행자의 길이다. 끊임없이 뒤돌아서 사람을 문다. 현상을 쫓지 않고 그 근원을 알아차리고 물고 물고 문다. 이것이 사자의 길이다. 나는 어리석은 한로였다. 이제 뒤돌아서서 포효하는 사자가 되리라.

4.

시간이 흘렀다. 끊임없이 사자가 되기를 소망했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스승이 나타났으며 책들이 주어졌다. 내게 주어진 그러한 삶을 신뢰하고 그 흐름에 몸 마음을 내맡겼으며 바른 견해에 의지하여 떠내려갔다. 그러한 어느 때, 흙덩어리를 쫓는 개도, 사람을 무는 사자도 본래 있지도 않은 것임을 알았다. 허상이 허상을 쫓는다? 허상이 근원을 찾는다?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개든 사자든 상관이 없어져버렸으며,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개는 개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흙덩어리는 흙덩어리일 뿐이었다.

오늘 여전히 나는 흙덩어리를 보며 먹이인줄 알고 쫓는다. 가끔은 뒤돌아서서 물기도 한다. 나는 개이기도 하고 사자이기도 하다. 또는 둘 다 아니기도 하다.

댓글목록

서정만님의 댓글

서정만 아이피 (221.♡.67.204) 작성일

비라님글은 고전영화나 고전소설보는것같아요..요즘 소설보다 전 고전소설이 더 좋아요..
영화도 그렇고요...감사합니다...비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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