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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에 대한 기억-수수님에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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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126.122) 댓글 12건 조회 7,349회 작성일 12-04-2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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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07년, 끙끙대며 좌선을 하다가 눈을 떴을 때 겨울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곳은 무척이나 더워 방석과 가사가 땀에 푹 젖을 정도였다. 법당 서쪽으로 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환기를 위해 항상 열려져 있었다. 늦은 오후의 어두운 실내. 마침 서쪽 햇살이 비스듬히 문으로 들어와 법당 가운데를 가로질러 전면 중앙의 불상을 비추는 것이었다. 그러면 실내의 어스름함과 대비되어 그가 마치 온몸에서 빛을 쏟아내는 듯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곤 하는 것이었다. 개인 모기장 너머로 보이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무 생각 없이 오래 멍하게 앉아있었다. 마당에서 시얄리들 비질하는 소리, 먼 데서 챈팅하는 소리, 새소리, 서서히 드리워지는 어두움.
고요한 시간이 주어지면 끊임없이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였다. 주로 부정적인 기억들-분노, 원망, 후회, 욕망들을 일어나는 대로 보고, 보고, 보고, 또 보고 하였다. 지겨울 정도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 그러다 보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토록 질기게 일어나던 특정한 생각은 없어지는 줄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고 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간들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것, 두려워서 덮어놓았던 것, 억눌렸던 감정과 생각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더러운 쓰레기를 냄새난다고 덮어놓으면 우선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패하여 악취가 새어나오는 것같이 거부하는 마음으로 덮어놓고 억눌러놓았던 것들은 끊임없이 올라와, 위축되게 만들고 주눅 들게 만들고 사물을 왜곡하여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덮어놓았던 것들을 걷어내고 바람을 쏘이고 햇볕에 말리면 그 고약한 것들이 냄새도 없어지고 별것 아니게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많은 쓰레기들...
II.
삼촌을 기억하는 일 역시 그러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아픔이었던 그의 죽음. 이제 훨씬 나이가 많아진 내가 38세의 젊은 그를 조금씩 이해한다. 무섭기만 했던, 항상 술에 취해 있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던 그. 그도 이해받지 못하고 욕망에 좌절했으며, 시대와 환경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분노했으며, 센 자존심과 대비되어 엄청난 열패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생각나는 기억 한 토막, 옛집 마당 건너편으로 철로가 지나고 있었는데 열차가 지나가면 그 삼촌, 어김없이 마당에 있었거나 마루에 있었거나 간에 부엌으로 숨어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열차속의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스로 느끼는 초라함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오형제 중 가장 기대를 받았던 삼촌,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집안의 몰락과 함께 그의 꿈도 그 시기에 사라진 듯하다. 간혹 취중에 이야기해주던 아름다운 도담들-축지, 장풍, 다섯 가지 차력, 경신일, 여러 선사들의 이야기들, 본인의 수행담들은 어린 조카의 영혼을 부추겨 어정쩡하게 여기 이렇게 서게 만들었다. 고교시절 내내, 이십대 내내, 삼십대 내내 그를 안타까워하고 문득 눈물지었으며 자주 생각나곤 했었다. 그의 수행담들을 약간 과장되게 친구들에게 떠벌이곤 했었다. 항상 그를 기억했었다.
III.
시간이 흐른 지금, 굳이 떠올리지 않으면 그에 대한 기억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래전 마음속으로 그를 놓아버린 것이리라. 이제 한 시절 함께했던 지금은 죽고 없어진 여러 가족들을 독특한 각각의 캐릭터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디선가에서 우연히 본 오쇼 라즈니쉬의 동영상 한 토막이 기억난다. 웃기기도 하고 매우 의미심장하기도 한 대목.
한 선사가 법문을 하고 있었다. “신은 완벽한 존재다. 완벽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지금 이대로 완벽하고 완전하다.” 이때 늙고 못생긴 꼽추가 일어나 선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는...?” 선사가 대답했다. “나는 이토록 완벽한(!) 꼽추를 본적이 없다.” 이어 대중들의 웃음, 하하하...
그랬다. 삼촌보다 더 삼촌스러운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삶이 있었을 뿐이며, 그대로 완전하다.

댓글목록

바다海님의 댓글

바다海 아이피 (182.♡.120.207) 작성일

vira 님글은 아주 나즈막한 소리로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이듯 합니다.  섬세함 !

기차 지나갈때마다 부엌에 숨던 삼촌!  이대목  에서
저의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ㄱ자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에 살땐 앞동에서 우리집이
보인다며  커텐과 창문을 꽁꽁 닫고 살았지요.

그러다 형편이 나아져
제일 앞동  그러니까 문열면 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야말로 풍경은 일류 호텔급에 살았죠

그러나,  남편은
이번엔 저 멀리 떠있는 배에서 우릴 본다고
문과 커텐을 치고 살아,  환기가 되지 않던 집안을
남편 몰래 환기 시키느라 애 먹었지요!

모든것이 통제 되었던 결혼생활은
이름 하여! 봉쇄수도원 이라 감히 이름 붙여봅니다.

남들보다 못배우지도, 못나지도, 않고
그런데  남편은 그토록 문을 닫았습니다.

말돌이님의 댓글의 댓글

말돌이 아이피 (125.♡.54.11) 작성일

아니 왜, 커텐을... 신혼땐 이해되지만...히히히
그런 답답한 남편과 10년 넘게 결혼생활을 이어오셨다니...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없는 사람도 못 견디겠네요.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네요.

서정만1님의 댓글의 댓글

서정만1 아이피 (221.♡.67.204) 작성일

어?난 그냥 순수하게 '커텐과 창문을 닫았다' '커텐과 창문을 닫았다'
건전하게 읽었는데..난 건전하게 읽었는데..진짜 건전하게 읽었는데..
말돌이님은..말돌이님은...
ㅎㅎㅎ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75.♡.182.51) 작성일

봉쇄 수도원이라. 가슴 아프군요. 그 분이 놓여나기를.
바다해님은 더 행복해지길 기원합니다.

바다海님의 댓글의 댓글

바다海 아이피 (39.♡.82.179) 작성일

봉쇄수도원!  제가 배워야 할 사회에 규정과 규범은 거기서
다 배웠습니다.  허락된것은 일과 공부 였기에  지금의 제가
되기도 했기에! 간혹 떠오르는 남편에게  그져 미안하고!
그져 감사할 따름 입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게지요!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69.♡.189.211) 작성일

"이런 시간들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것, 두려워서 덮어놓았던 것, 억눌렸던 감정과 생각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더러운 쓰레기를 냄새난다고 덮어놓으면 우선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패하여 악취가 새어나오는 것같이 거부하는 마음으로 덮어놓고 억눌러놓았던 것들은 끊임없이 올라와, 위축되게 만들고 주눅 들게 만들고 사물을 왜곡하여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덮어놓았던 것들을 걷어내고 바람을 쏘이고 햇볕에 말리면 그 고약한 것들이 냄새도 없어지고 별것 아니게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많은 쓰레기들..."

vira님의 글을 읽기 시작하는 처음 부분은 설래이다가^^
위의 글을 보며 공감 하다가
삼춘의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해 졌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신다면 술잔을 함께 나눌 수 있을텐데...
 젊은 날의 분노와 좌절이 수수 같았고 그 분의 황소같은 죽음이 절여 옵니다

아무 형식없이 단지 마음으로
vira님이 그분께 술한잔 따라 들이고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고
삼춘께 그 말씀을 해드렸음 좋겠다고 생각 했어요
"삼촌보다 더 삼촌스러운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삶이 있었을 뿐이며, 그대로 완전하다. "

vira님을 마음의 세계로 인도 하신 감사한 마음과
삼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vira님의 마음을 받아
 그 분의 영혼이 깊이 위로 받을것 같았습니다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75.♡.182.51) 작성일

수수님의 제안대로 오늘 술 한잔 그에게 바치렵니다. 고맙습니다.
그가 진실로 위로 받으면 좋겠습니다.

정리님의 댓글

정리 아이피 (220.♡.184.45) 작성일

아주 오래되고 약간은 빛이 바랜 시집 한 권을 손에 쥔 듯한
vira 님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
잠깐 호흡을 쉬어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읽어보니
슬픔이
너무 깊이 배여있어
뚝,
하고 마음이
정지해 버리네요...

어쩌면
vira 님의 삼촌은 또다른 내가 '될 수도 있었을 것'같아...
비는 오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마음이 아파옵니다.

요즘 마음이 아플일이 다소 있는데
아플 땐 더욱 아파서 풀어야 저는 제대로 풀어지는 체질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에겐 무척 위로가 되는 글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정리님의 댓글

정리 아이피 (220.♡.184.45) 작성일

아 참...
조금은 다르긴 하지만

여전히 '항상 기억이 되는' 그런 '그'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나의 기억속에서 더이상의 '그'가 희미해질까요...

아...그 분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네요.

그 분이 뿌려진 섬진강으로 조만간 가야겠습니다.

vira님의 댓글의 댓글

vira 아이피 (110.♡.248.235) 작성일

화창한 봄날의 아침.정리님의 글 아프게 읽습니다.
몸마음 모두 건강하시길. 평화롭기를.

용석用石님의 댓글

용석用石 아이피 (211.♡.22.74) 작성일

이곳은 도판이라 다들 의젓 하신데...
그런 여인들이 슬픔에 잠겼다!

싱겁다고 애써 외면 하려는데...
목석같은 이 사람 마져 가슴이 져려 옵니다.

슬픈 사연들을 차마 모른척 할 수 없어 끼어 들었습니다.
훌훌 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들 오시길...

불쑥 여인들의 심금을 울려버린 vira님,
다음에는 좌선 수행담을 부탁드리면 실례 인가요?

루시오님의 댓글

루시오 아이피 (118.♡.169.217) 작성일

감동적이게 글 잘 읽었습니다^.^ vira님. 이처럼 완벽한 꼽추는 없다에서 살짝 웃음이
나오네요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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