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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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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댓글 11건 조회 8,579회 작성일 06-07-2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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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끝없는 수련을 통해서 진리의 빛을 찾으신 그 의지가 감탄스럽습니다.
혜안을 가지신 분의 눈으로 보는 것을 듣고 싶은데요.
저는 작금의 세계상황속에서 인간들이 자본과 권력만을 쫓아서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 생각하는 것도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별 필요도 없는 주변적인 것들을 주머니에 채우기 위해서 본질적인 것들을 내 던져 버리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도 가련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물신화된 사회구조는 없는자와 약한자를 더욱 궁지에 몰기 때문에 더욱 답답합니다.
나름대로 사회복지 전공해서 밥벌이도 포기하고 5년 째 혼자 시민사회활동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에게 아무리 해도 자신이 놓여있는 현실을 보여줄 수 없군요.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문제의식'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서서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각자의 소임'임을 알릴수 있을까요.
수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활동을 해왔으나... 감이 안오는 군요.

댓글목록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작성일

좋으신 말씀입니다.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냥 존재하십시오. 진정 '일'하는 자는 '내 일한다'는 그 마음도 없습니다."는 말씀이 특히 마음에 옵니다. 

개념적으로 좀 일탈적인 것인데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가령 환경문제를 생각해 볼라치면 저 자신이 아무리 혼자 환경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갑니다.
따라서 혼자만의 노력에 전력을 하느니 그 반절의 노력을 다른 이들에게 환경을 보호하면서 살자고 노력해서 그들의 삶의 습관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환경'에는 효과가 있는 것이죠.
물론 이는 저와 상관없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 자신이 '진실로 자각하고 존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나,
전체 세계를 위해서는 제 자신이 혼자 제대로 자각한 것보다는 차라리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욱 세상을 위해서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각자 머리, 손, 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처럼 선생님 같이 정신적인 혜안이 있는 분들은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훈련과 성찰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시켜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고,
저와 같은 몸으로 떼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방향에서 움직여야 할듯 합니다.

물론 저는 '저를 희생하고 세상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저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고 보면...
내 팔의 한쪽 피부가 아픈 주사를 참고 맞아야 결국 내 자신에게도 좋은 것 처럼...
인간들 중의 준비가 된 이들은 아픔을 견디고 수고를 무릅써야 전반적으로 내 전체가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이 그러하신 것 처럼요.

근데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고, 몇년 동안 활동하면서 생활도 몸도 적응되어 있는데...
항시 채워지지 않는 갈증... 정확히 말씀 드리면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들' 때문에 종종 갈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직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34살입니다.) 여자친구도 변변히 없어봐서 그런지 이래 저래 상념이 많습니다.
특히 이성(여성)에 대한 갈망은 그 이성이 요구하는 것들을 갖지 못했음에 대한 열등감까지 동반하는 듯 합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안되는 군요.
유기적 세계속에서의 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어줍쨚은 소명의식과... 그와 대립되는 '개체'로서의 현실...
양자에 대한 의식이 하나로 합쳐져야 온전한 제가 될 터인데... 아직까지는 저를 찾기 위한 방황이 부족한 듯 합니다.

하여간 말씀해주신 바 대로의 '무개념'??? 활동을 숙고해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다님의 댓글

다다 작성일

크, 이 말씀에 다 들어있네요. 
 '혜안(慧眼)'을 갖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또 다시 시내 중심가엘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고, 수많은 네온사인과 애드벌룬들도 여전히 눈이 어지럽도록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 그 모든 것들이 제 눈에는 그저 '생동감 넘치는' 무엇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냥' 가고 오고 있었고, 애드벌룬도 '그냥'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모든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구요!

그런데 김선생님, 굳이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이런 혜안을 갖은 상태에 있으니 평화롭고 자유로우니 이제 됐다. - 소승
다른 이들도 이처럼 혜안을 가져 (있지도 않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울수 있도록 하는 방향 - 대승

이렇게 봐도 좋을런지요?

그래서 김선생님도 다른 사람들이 벗어나 자유롭도록 하는 방향쪽으로 이미 저절로 가고 계시는거지요?

꼭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유님의 댓글

자유 작성일

둥글이 님! 한 말씀 거들어도 될까요?
님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십니다.

"유기적 세계속에서의 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어줍쨚은 소명의식과... 그와 대립되는 '개체'로서의 현실... "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세상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구요..
그러나 내겐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죠, 그래서 자그만한 힘이라도 모아서 세상을 바꾸려 하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동글이 님과 같은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 기태 선생님 역시 그 옛날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사셨으니까요(?)
그리고 저 역시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 굴레를 벋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근데 그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으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아래 김 선생님의 말씀 처럼,,

 '혜안(慧眼)'을 갖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또 다시 시내 중심가엘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고, 수많은 네온사인과 애드벌룬들도 여전히 눈이 어지럽도록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 그 모든 것들이 제 눈에는 그저 '생동감 넘치는' 무엇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냥' 가고 오고 있었고, 애드벌룬도 '그냥'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모든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구요!

보려는 마음, 찾으려는 마음, 기타 모든 마음을 잠시 내려 놓으세요...진정으로
그리하면 보일 것이고 찾아질 것입니다.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또 많은 피해가 있었겠지요..
비를 그냥 비로 쳐다 볼 수 있는 지혜 그 것이 바로 깨달음이 아닐까 잠시 되뇌어 봅니다.

행복하세요.

공허님의 댓글

공허 작성일

비가 그치고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항시 그러하고 그러할 뿐,세상이 언제 우리의 생각대로만 움직인 때가 없었지요. 앞으로도 영원히....
기태 선생님의 말씀 중에 내 마음의 잣대라는 말씀이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잣대가 모든 것을 규정지으며 우리의 마음과 몸을 조종하고 온갖 농락을 일삼는 주범?
너무 애쓰지 마시고 편히들 지내십시오. 세상은 어차피 그 자체로 살고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다.우리가 걱정을 하든, 유쾌해 하든 개으치 않고.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 분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 '둥글이'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나 '표현'에는 담지 못했던 것들을 참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둥글이님.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는 '소유의 모양'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즉, '무소유'라 하여 아무리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무소유'라는 것을 부여잡고 있으면 그것은 곧 엄청난 '소유'일 수 있으며,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끊어져 있으면 그것은 곧 '무소유'일 수 있습니다.

    앞서의 답변에서 제가 님께 '먼저 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남들에게 보여주려 하거나 깨닫게 하려 하거나 알리려 하지 말고 <그냥> 일하라'라고 말씀드린 것은 곧 '혼자 일하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님의 마음의 '집착'과 '무게'를 얘기한 것이지요.

    즉, 님의 마음에서 '소임'에 대한 집착과 무게가 끊어져 있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들에게 '소임'을 보여주려 하거나 깨닫게 하려 하거나 알리려 하더라도 그것은 곧 잃어버려지지 않는 '진정한 힘'이요 '선(善)'일 수 있으나, "작금의 세계상황 속에서 인간들이 자본과 권력만을 쫓아서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별 필요도 없는 주변적인 것들을 주머니에 채우기 위해서 본질적인 것들을 내던져 버리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도 가련할 뿐입니다.....더군다나 그러한 물신화된 사회구조는 없는 자와 약한 자를 더욱 궁지에 몰기 때문에 더욱 답답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일'에 대한 집착과 무게가 너무 선명하고 큰 듯하여 드린 말씀입니다.

    둥글이님.
    '선(善)'에 대한 집착과 무게가 클 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또한 '악(惡)'일 수 있는지요!
    세상은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입체적인지요!

    저도 세상과 사람을 참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눈으로 얼마나 세상과 사람을 정죄(定罪)하며 심판했던지요!
    저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제게서 솟아 나왔습니다.

    둥글이님.
    우리에게 살아갈 인생의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곧 '배울 수 있는 시간들'이 그만큼 많이 남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배운다는 것'이니까요. 늘 배우는 마음으로 이 생(生)의 시간들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작성일

좋으신 말씀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머리 속에 많은 것이 들어차는 뿌듯한 느낌입니다.

'불교적인 사고'와 '기독교적인 사고'의 일반적인 차이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자기 성찰'에 집중하는 것이고,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이상하게 변질하고 불교도 한국적인 현실에 맞게 변하면서
불교가 자기성찰 중심의 활동에서 이웃돌봄의 활동까지 하고 있고,
기독교는 이웃돌봄의 활동은 커녕 영생 놀음 하다가 자아도 제대로 못 찾고 미숙한 인간들을 양산해 내지 않는가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저는 불교적인 자기성찰을 강조함으로 인한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고의 노력 끝에 세상을 성찰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눈이 트여서 여러모로 바람직할 수는 있지만,
내 자신이 '자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일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다른 훌륭하신 분들이 깨달음으로 인해서 자유로워진 순간에도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끼니도못 떼우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각'한 분들의 경우에는 그 '자각'의 시점 부터 일상적인 사람들이 갖는 번뇌를 갖지 않다 보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고통을 느끼는지 그냥 간접적으로만 느끼시는 듯 합니다.
더군다나 그 '자각'하신 분들은 자각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구체적인 세상사의 문제...사회 시스템,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통의 문제들에 대해서 아예 초월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직 '자각'하지 못한 이들이 그 사회 내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의식의 작용이 빚어지는 것이죠.

결국 그로 인해서 '자각'하신 분들은 '일반 대중'과의 관계 고리가 끊겨 버린다고 생각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초연해 져 버리니 당연한 것이죠.
 
물론 그 '자각'하신 분들은 '자각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이들과는 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극을 제공하기는 하죠.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그 자각하신 분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특이한 사람' 정도로만 보일 뿐이고,
그들의 허황된 것을 쫓으려는 속성은 그 '자각'하신 분들의 노력을 통해서 바뀌어 질 수 있는 영역으로 와 닿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적당히 자각'을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자각' 후에 구체적인 세상의 관계에 다시 심도 있게 빠져 들어서 그 '일반 대중'에 대한 '자각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인해서 사람들에게 좀 더 '깨일 수 있는 기회'를 줄수있을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어줍쨚이도 자각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런 걱정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습지만,
저는 그야 말로 '완전한 자각'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없애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물론 저 자신의 욕망과 상념을 덜어낼 수 있는 차원에서는 그러한 자각이 바람직 할 것이지만,
 
'알고 보니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었어'라고 세상을 인식 한 후에
더 이상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개입할 의지를 못 느낀다면 그것은 참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자각한 후에는 무책임의 개념 자체가 없겠지요.)

하지만 내가 '자각'을 했던지 안했던지 세상에는 분명히 고통받는 이들이 있고,
그것은 구체적인 관심과 실천을 통해서 바뀌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도 어떤 식으로도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할 터인데, '자각'을 통해서 관점이 바뀌고 나서도 실지로 그것이 올바로 유지 될지는 한편으로 걱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경향성'이 있는 이유로 한번 쏠리기 시작하면 그 방향으로 줄곧 내닫곤 하죠.

만약 세상에 저 혼자만 존재한다면 저는 그야 말로 치열하게 자각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저쪽에 서있는 나'인 너와의 관계까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기에
과연 어떤 식으로 그 정신을 다듬어야 할 것인지는 쉽게답이 안나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의 특성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각'을 통해서 저 꼭데기에서 '자각을 갈구하는 이들'을 끌어 올리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찌끔 자각의 의미를 맛본 상태에서 일반 대중의 수준을 끌어 올리려는 이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이런 전반적인 문제까지를 이해하고 개념화 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여간 훌륭하신 여러분들의 조언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사실은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삶의 빛깔과 모양이 서로 조금 다를 뿐이지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작성일

더욱 핵심적인 말씀 사려깊게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더욱 와닿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소임'에 대한 집착과 무게가 끊어져 있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들에게 '소임'을 보여주려 하거나 깨닫게 하려 하거나 알리려 하더라도 그것은 곧 잃어버려지지 않는 '진정한 힘'이요 '선(善)'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 5년 활동하면서 그래도 사람들에게 많은 자극을 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이고 명절때도 돌아다니면서 계속 캠페인을 했을 정도이니까요.
지치고 힘들고 챙피해도 꾸역 꾸역 나가서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야 말로 그러한 집착을 끊고, 자각을 했다고 하면 아마 그 순간부터 마음으 여유로워져서 그 전의 반정도의 활동밖에 안될 것 같은 걱정도 한편으로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제대로만 깨달으면, 같은 양의 활동을 하더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시는지요...

활동의 '양'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실지로 하루에 열명 만나서 전단지 나눠주면서 어떤 문제(환경-정치 등등)알려주는 것과
하루에 스무명 만나서 전단지 나눠주면서 어떤 문제를 설명해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그럽니다.

더군다나 지역에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없고,
반대로 진실을 가리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를 늘리려고 하는 이들이 판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최소한의 현재상태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활동을 해야하는데...
그냥 마음을 놔 버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없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려는 마음이 가져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분할 때는 말이 격해지곤 하는데...

예를 들어서 '새만금 사업' 추진을 하면서 저와같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못 내게 행정깡패들 이용해서 두들겨 패고,벼라별 이권세력들이 다 달라 붙어서 마치 시민을 위해서 추진하는 것 처럼 활동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는 당연히 화를 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시민들이 거짓과 진실을 못 가리고 새만금 사업 무조건 찬성해야한다는 압도적인 지지입장을 가지고 있다보니,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알릴 수 없는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새만금 반대한다- 새만금 추진하면서 반대단체들 폭력으로 억압하는 세력은 각성하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리는 것 마저 단순한 '진리 상대주의' 차원에서 판단되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적절하지 않은듯합니다.

물론 결국 새만금의 생명이 다 죽고 어민 가족 2만이 생계의 터전을 잃어 버리고, 앞으로 북한산크기의 산 100개 정도가 더 깍여 나가야할 상황이더라도,
그것은 결국 '그저 그런 거야'라는 식으로 '한발 물러나서' 인식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최소한 당면한 현실 속에서 그 에 고통받는 어떤 힘없는 존재를 위해서는 관심을가져야 할것이고,
그 관심이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라,
그 힘없는 존재가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유지할 수 있는 노력이어야 한다면,...
당연히 그에의해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감수해야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에대한 구체적인 '활동' '목적'이 수립되면 필연적으로 '소명'이 생길 터인데...
왜? 그것이 잘 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득 짧은 소견이 떠올라서 글 올렸습니다.
암튼 두번 고견 주셨는데,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나다님의 댓글

지나다 작성일

미천한 제가 지나가다가... 보니...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 자각은 상보성이 있는가 상충성이 있는가?
이런 문제같습니다.
한때 고민했던 바의 문제라서... 끼어듭니다.
그건 이렇게 생각됩니다.

상보적이라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지난 세월 가졌던 관심은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상충적이라고... 내 마음이 그건 헛된 일인 줄 알면 지난 세월 가졌던 관심은 퇴색되고 맙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자각해야겠다.
예를 들어 지금 둥글이님이 열심히 발바닥 부르트게 쫒아다니며 사회활동을 하시는데
그게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이며 또 토대를 구축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 것이며
내 인생을 그런데 다 바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회활동하며 사는 의미는 둥글이님이 더 잘 아시는 듯하니 말할 것이 없고 자각하여 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각하며 사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자각한 분들의 말씀을 조금 인용하여 말하자면....
자각해 보면 세상의 일이란 것이 온통 자기 일이 되어서
지금 지구상에서 누가 굶어 죽으면 그게 다 내일이지 남의일이 아니고
둥글이님이 적대감 갖고 있는 환경파괴자들이 모두 다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짐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이고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을 환경문제 쫒아다니는 것으로 다 해결할 수 없고 죽기전에 얼마나 이룰 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찌되는지 생각해보면 그게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왜냐면 죽음도 모르는 사람이 삶을 어찌 알것입니까?
삶도 모르는데 무슨 운동이다 뭐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각부터 해야 우주의 일이 내일이로구나
지구란 손바닥만한데서 무슨 일을 이룬들 그게 다 또 뒤집히면 아무것도 아니라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니 허망하기 짝이 없구나

그럼 내가 전단지 하나 돌릴 때 의미있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전단지 하나 돌릴 때 우주에 다 돌림이 되면 그게 참 의미란 것입니다.
이런 발걸음은 한발자욱이라도 시간을 관통하고 공간을 관통하기에 찰라가 영원으로 이어져
모두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거니와
이런 것이 아니라면 그때 그때에 그치고 마는 전단지 돌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단지 돌리는 것에도 이런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을 동글이님은 아시겠는지요.

이게 어디서 비롯되냐면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언컨데 여기까지 한 이 말은 제 말이되 제 말이 아니고 깨달은 분들의 말씀을 일부 귀동냥 해와서 구성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릇된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재주없음과 이해력 부족 탓입니다.
좌우간 자각이란 이토록 전단지 돌리는 것을 하늘 땅 차이로 만든다는 얘기입니다. 
자각하고 말고는 둥글이님의 일이니 둥글이님 스스로가 알아서 하실 것이고... 그럼 이만... 지나갑니다.

자유님의 댓글

자유 작성일

둥글이 님의 따스한 가슴을 느낄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두 가지만 첨언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먼저 자각에 대해서의 제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리자고 하는데..
먼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터 이야기를 해야 겠네요..
위의 내용을 보면 자각과 깨달음이 같은 의미로 쓰인 것처럼 보이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깨달음을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아! 이 아이가 배가 고프구나.. 밥을 줘야지..
아! 이 아이의 기저귀를 바꾸어 줘야 하는 구나.. 바꾸어 줘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을 수 있는 경지까지 갈 수 있는 자가 깨달음을 얻은 자라 생각합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리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자
그 자가 비로서 깨달음을 얻은 자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를 떠난 진리는 모두 사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진리는 바로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까요..

지금 여기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지금 이 치열한 현실을 살지 못하는 자, 그 자는 자각한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미혹에 빠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를 떠나 진리를 얻은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분면 사기꾼이니 거들 떠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세상 사람들의 삶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자와 가슴으로 사는 자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 부류에 대한 비유로 가장 좋은 예는 예수님과 가롯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많은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마음을 내려 놓으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겠느냐 불안해 하시는 둥글이님의 마음!
아! 이 안타까움이여....

하지만 저는 둥글이님의 가슴 속에 가득한 사랑이 보입니다.
마음을 내려 놓는 순간, 그 사랑이 조금씩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비록 지셨지만
가슴속의 그 사랑으로 인해 결코 무겁지 않게 그 짐을 지셨으리라 믿습니다.


둥글이님처럼 가슴이 따스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작성일

사려 깊은 말씀 감사합니다. ^^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날이 덮습니다. 몸관리 잘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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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800 원장희 8645 08-06-13
1799 무루 8634 06-03-05
1798 너와나 8634 15-01-10
1797 할머니사랑 8632 07-05-24
1796 김기태 8612 12-04-22
1795 그냥 8593 16-02-14
1794 김기태 8590 06-09-26
1793 이호준 8585 06-08-15
1792 김기태 8582 20-03-21
열람중 둥글이 8580 06-07-27
1790 힘겨움 8579 15-05-25
1789 구름따라 8561 18-03-17
1788 눈송이 8555 16-01-21
1787 다다 8553 06-08-01
1786 나란다 8553 18-06-28
1785 김기태 8545 06-03-06
1784 죽음 8544 16-01-07
1783 김기태 8541 08-06-19
1782 헬로우 8539 06-05-26
1781 선생님 8532 1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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