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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안에서 ‘이방인(異邦人)’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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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6,334회 작성일 08-07-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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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열등감, 이 초라함

장수생 08-07-06 18:37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셤을 시작할 때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사직서를 낼 때, 두렵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럭저럭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었습니다. 수험기간이 한해, 두해 넘어가고 보는 셤마다 떨어지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린 상태에서 한 달 전 그녀로부터 연락이 없길래 보고싶다는 문자를 넣었는데, 그만 끝내자더군요. 그냥 담담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두 가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 돈도 없고, 빨리 합격해서 당당하게 다시 연락하자, 또는 그래 너 좋은 사람 만나라, 이것도 기다려 주지 못하냐? 하는 섭섭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상한 홀가분함도 있더군요. 시간이 흐르면서, 미치도록 다시 그녀가 보고 싶고, 공부는 안되고, 날씨는 더워지고, 시험은 계속 떨어지고, 아...이렇게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로움과 씁쓸함에 몇 번 전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그녀에게 쿨하게 답장 보낸 말이 있고, 지금까지 여러 번 헤어지자는 말에도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매달린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어서..이제는 염치가 없더군요. 끝까지 연락은 안 했습니다. 잘해줄 뭔가도 없었구요, 돈도 없고, 그래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생각이었죠.

근데 오늘 피씨방에서 줄담배를 피고, 어제 먹은 술로 속도 쓰리고, 수염은 며칠 깎지도 않아서 덥수룩하고, 부족한 수면에 초췌하기가 거의 노숙자 수준에 날씨는 더워서 앞가슴은 풀어헤친 상태에서 비틀비틀 도서관으로 걸어가는데, 아..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그렇게 보고 싶던 그녀가 직장 동료 선생들과 지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학교 선생님입니다, 지금같이 경기가 안좋을 때, 참 좋은 직장이죠. 멍하니, 아는 체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어색함이 백만볼트로 흐르는? 딱히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녀도 나를 본거 같더군요.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었어요..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 초라함, 이 열등감, 이 씁쓸함..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담배만 피었습니다.

참 씁쓸합니다. 사람이 인연이라는 것이 바람이 불고 새가 나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라지만, 그녀를 붙잡고 싶은데..현실적인 여건이 안 되니..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김기태님의 조언 부탁드립니다.


* * *


님 안에서 ‘이방인(異邦人)’이 보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방인인....


이방인의 특성은 자신에 대해 무책임하고,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진실 혹은 진심이 없어 그야말로 이방인적인 냉소가 내면 깊이 흐르며, 그렇기에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만나지도 않고 또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는....그냥, 순간순간의 모면과 면피만이 있는....


님은 그 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님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모르는 가슴을 지닌 슬픈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때그때 보고 싶기만 할 뿐, 그래서 울컥 연락하고는 그 마음이 달래지면 곧 다시 싸늘한 이방인의 마음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이 이야기는 어쩌면 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저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이방인’으로 살았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저 자신이 그런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대로 답변글을 써보겠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님에게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 오히려 님 자신을 위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번 일ㅡ사직서를 내면서부터 비롯된 일련의 일들ㅡ을 계기로 님의 ‘근본’과 ‘바닥’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님은 이제 비로소 님 자신의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무책임한....피씨방에서 줄담배를 피고, 보는 시험마다 떨어지고, 공부는 안 되고, 그만 끝내자는 그녀의 말에 이상하게도 홀가분하기도 하고, “그녀는 학교 선생님입니다, 지금같이 경기가 안 좋을 때, 참 좋은 직장이죠.”라고 말하기도 하는....


님이여.

저는 님 자신을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잘해 줄 뭔가가 없어 그녀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정도의 얘기가 아닙니다. 또한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 그녀를 붙잡지 못하는’....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님의 눈이 보다 깊이 님 자신을 향하여, 먼저 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님이 님 자신 위에 오롯이 설 수 있을 때,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님 곁에 함께 서 있게 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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