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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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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슬 댓글 0건 조회 7,851회 작성일 11-09-2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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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의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데, 제가 하는 것은 무위는 아니고 약 십 년 전부터 습관화하려 했던 것인데 그 동안 십여 번 실패했고 최근 다시 습관화해 보려는 것입니다. 하는 중에 쓴 일지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올립니다.
2011.9.19~

1일 - 2011.9.19
'행' 하려 하니 거부감이 일어나 2~3시간을 우물쭈물하다가 했음.
--우물쭈물할 때 거부감의 강도가 점점 높아져 괴로웠으나 한 달을 하기로 했고 '행' 외에 답이 없다고 해서 결국 했음.
--오히려 '행' 할 때는 거부감이 덜 일어났음.

2일 - 2011.9.20
아침에 하려고 하니 거부감이 어제 못지 않게 일어나 몇 시간을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결국 했음.
1일과 마찬가지로 할 때는 거부감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음.
--이 '행' 을 하는 '나' 에 대한 거부감이 뼈속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거부감이 일어났던 것은 '행' 해봐야 못 할 게 뻔하고 못할 게 뻔한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관념이었고 이것을 극복하려면 오랜 노력이 필요할텐데 그 정도를 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 '나' 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잣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갭이 너무 많고 사회적 잣대에 맞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기준이 있다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준 자체가 없으면 아무렇게 '행' 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서 그것은 충족하도록 '행' 하는 게 중요하다. 그 정도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하는 게 중요한 듯하다. 아마 한 달 정도 계속 할 수 있다면 내면의 심층에서 나로 인정하지 않을까 싶다.
3일 - 2011.9.21
아침에 하려 하니 잠시 거부감이 일었으나 '행' 할 땐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 잠시 후 '행' 했고 문안하게 했다.
--첫 날과 둘째 날에 하기 전에 심한 거부감이 일어났던 것은 과거의 체험에서 일어난 그것이 되살아나서인 듯하다.
--이번에는 '행' 하는 중이나 후에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기준을 확 낮췄기 때문인 듯하다. 기본 몇 가지만 정해 그것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다.
--저녁해도 해 볼 예정이다. 즉, 하루에 두 번 해볼 생각이다. 기준은 지금같이 느슨한 것으로 하면서 말이다.

3일 - 2011.9.21
점심 때 하나 더 했음.
--이젠 하기 전에 긴장 또는 거부감은 거의 일어나지 않음.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바로 '행' 할 수 있었음.
--내면에서 불안 하나가 일어났음. 현재 적용하는 기준이 너무 낮아 사회적 기준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까라는 불안. 이것은 이성적 인식과 정서적 인식의 갭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이성적으로 지금 방식을 맞다고 생각하지만 정서적으론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 불안에 대해서는 계속 지켜봐야 한다.

4일 - 2011.9.22
점심 때 하나 하다.
--좌절에 자기가 무너지는 느낌은 후천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다.
--좌절이 작은 현실적 관념 하나를 배울 기회라고 생각하면 긴장은 일어나지만 유지할 수 있고 긴장을 유지할 수 있기에 긴장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자존감은 인격의 성숙 정도와 관계없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다.

4일 - 2011.9.22
하나 더 하다.
--하려는데 갑자기 단기만족을 주는 어떤 것이 하고 싶단 욕구가 일어나자 '행' 할 수 없었다. '행' 하려고 해도 이미 일어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그 욕구가 방해를 하더라. 그 일을 3시간을 하고 단기만족의 욕구가 모두 해소되고나서야 '행' 할 수 있었다.
--?? 이 단기만족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게 있을까? 앞으로 하면서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그량 '행' 인가. 행이 계속 되다보면 어느 날 사그러드는 것인가.
--'행' 하는 바로 직전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재미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고역으로 느껴졌다. 이 생각에 머물러 보니 이런 느낌을 예전부터 거부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이 일어나면 무의미하다 여겨 다른 것으로 도피를 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도 잘하는 게 없는 것이다.
--김기태의 노자 도덕경 강의에서 어떤 느낌이든 허용하라, 는 말이 있다. 이것이 도덕경의 핵심이라 하더라. 그러고 보니 심심에 가까운 이 느낌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고나도 그대로이고 하는 중에도 재미라곤 전혀 없는 이 느낌. 이 느낌이 내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나의 일부란 뜻인데 이것을 일어날 때 받아들이지 못해 많은 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고 '재미없음' 이 일어나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속에 머물러보자, 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생각을 하니 '행' 중에 일어난 '재미없음' 에도 괴로움은 없었다. 물론 '재미없음' 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5일 - 2011.9.23
아침에 하나 하고 점심 때 하나 더 하다.
--힘듦 또는 고통 또는 거부감이 일어난 원인을 찾았다.
--아래에 적다가 생각난 것인데 무력감의 일종인 듯하다.
--아침에 하나를 하고 점심 때 하나 더 하려 하니 힘듦이 일어났고 일부러 '행' 하지 않고 그 상태에 머물렀고 1~2시간 머무르는 중에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 원인은 지금 '행' 하는 것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 만 하니 지금 하는 게 맞는지 알 수 없고 괜한 수고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힘듦에 영향을 미친단 생각이 든 후에 지금 '행' 하는 대입해 회상해봐도 어떤 틀이 인식되었을 땐 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틀이 떠올랐기 때문에 덜 힘들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진 못했다.
--과거의 비슷한 몇 가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현재는 하고 있는 것의 '틀' 하나를 알게 되었고 이것이 실체 중의 하나라 생각되는데 '행' 의 초기에 먼저 이 틀을 인식한 후에 '행' 하면 덜 힘들 것이다. 이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니 더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하다보면 이 틀에 익숙해질 것이고 다른 중요한 실체가 눈에 보일 때가 있을 것이고 보이면 그것들에도 유념하면서 '행' 하면 되겠다.
--그량 적어두자.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형이 성지사(成志社)에서 나온 영어참고서로 가르쳐주려 했는데 중학교 수준과 너무 차이가 나서 3일만에 도저히 못하겠다며 포기한 적이 있다. 동생이 못하겠다니 형도 포기하더라. 그때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단어의 길이는 길지, 모르는 단어 천지지, 문법은 하나도 모르는 상태지. 이때 일어난 난 힘듦 또는 고통이 실체를 알 수 없기에 일어난 감정일 것이다. 어찌보면 무력감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
--"무력감 (無力感) - a feeling of helplessness[ineffectualness]"

6일 - 2011.9.24
아침에 하나 하다.
--아침에 하나 하려고 하는데 거부감이 내면에서 일어나더라. 도대체 이건 뭔가 싶었다. 그 원인이 무력감임을 어제 밝혔고 '행' 의 실체 중의 하나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행' 만 계속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행' 전과 후에 걸쳐 1시간 정도 일어난 거부감에 머물렀다. 왜지? 왜 여전히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 거지? 계속 물으면서 생각해보니 거부감을 일으킨 게 실체를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무력감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거부감을 일으킨 또다른 것은 사회적 잣대였다. '행' 하는 주체는 어릴 때 성장을 멈춘 내면아이이지만 그 행을 바라보고 살피는 관찰하는 자아는 성인의 나였다. 내면아이가 내 안에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실제로는 스스로 성인이라 생각한 것이고 그런 시각으로 '행' 을 본 것이다. 그러니 '행' 의 실체 중의 하나를 알았고 그에 따라 '행' 하더라도 여전히 미숙해보이고 약간은 수치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이 사회적 잣대는 왜 이토록 영향을 미치는가? 지금 '행' 하는 나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엄격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많은 나 중에는 못나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행' 하는 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관념이 무의식 깊이 뿌리내려 있기에 쉽게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회적 잣대를 떼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 보니 실제 '행' 하는 '나' 가 내면아이라는 것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 수 있었다. '행' 하는 내면아이의 나이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행' 하는 지금의 나와 고딩 때의 나와 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18살인 것이고 중딩 때의 나와 차이가 없다면 15살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정해보니 초딩 3~4학년 때와 별차이가 없더라. 그렇다면 '행' 하는 주체인 나는 초딩3학년, 즉 10살인 것이다. 적어도 '행' 하는 중에는 내가 10살임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야 사회적 잣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나는 성인이므로 10살로 보는 게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사실이라해도 정서적으론 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그래서 지나가는 10살 가량의 아이가 현재 내가 하는 '행' 을 한다고 상상해보았는데 그 아이에게 성인에게 들이대는 사회적 잣대로 판단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당분간 이 방식으로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일어나는 거부감에 또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봐야겠구나. 예상보다 많이 복잡하다.
--'행' 전에 10살이라 생각하고 관찰하는 자아가 10살의 행으로 보는 것이란 것을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이게 되지 않으면 계속 '행' 하는 것도 또 어려워질 것이다.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일 - 2011.9.24
점심 때 하나 더 하다.
--거부감의 이면에 조급함도 숨어 있음을 발견하다.
--그러니까 거부감이 일어난 것은 무력감, 평가절하, 조급함 때문이었던 것.
--'행' 하기 전에 먼저 10살임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나가는 10살 가량의 아이가 '행' 한다고 이미지해 보았다. 이렇게 해보니 상상으로 하는 것보다 좀더 현실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그 아이가 내가 하려는 '행' 을 한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난감함이 일어나더라. 그 아이가 '행' 을 한 달을 해봐야 얼마나 변화가 있겠나는 생각이 들더라. 두세 달 했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적어도 1년, 아니면 2년은 꾸준히 해야 변화라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 이런 생각이 들자, 나에게 조급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겠더라. 현실적으로 필요한 능력이고 어찌보면 절실한 것이니 무의식에서 되도록 빨리 붙었으면 하는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조급함과 아이의 얼굴이 겹치면서 조급함이 무의식에서 조금 내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10살의 아이임을 받아들인다면 조급함을 가진다고 될 일이 아님도 받아들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급함은 접고 '그냥 매일 열심히나 해야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이 '행' 이 습관화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동안 매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까지의 일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행'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무력감에 빠져 있는 10살의 아이에게 성인의 잣대를 들이댔고 한두 달 만에 어떤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조급함의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실제 10살 된 아이에게 쉽지 않은 것을 하라고 하면서 이런 압박을 가하는 부모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인인 내가 내면아이에게 그런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7일 - 2011.9.25
아침에 둘 하다.
--'틀' 만 인식하면 두 개까지는 어렵지 않더라. 더 하려면 할 수도 있겠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해 두 개만 했다. 차라리 매일 하나 또는 둘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겠더라. 마치 바둑을 배울 땐 많이 두는 것보다 하루 한두 판만 두고 복기를 해보는 게 더 낫듯이 말이다. 더 공부하려면 정석, 포석, 사활 공부하는 게 더 낫듯이 말이다.
--지나가는 10살 가량의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지금 '행' 하는 게 저 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저 아이가 '행' 한다고 생각하니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제까지 거부감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세 가지를 찾았는데 그것들이 원인이 맞는 듯하더라. 무력감은 '틀' 하나로 많이 무뎌졌고 나머지 '틀' 은 스스로 찾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평가절하는 10살의 아이 얼굴 한 번 보면 싹 사그러진다. 오히려 대견하게 보이더라. 조급함, 이것은 현실적 압박 때문인지 10살 아이의 얼굴을 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더라. 며칠 전보단 나아졌지만 말이다.
--조급함은 기준을 낮추는 게 약간의 도움이 되긴 한다. 낮은 기준이 가치있게 보이고 현재 상태에서 노력하면 할 순 있겠단 생각이 든다면 낮은 기준뿐 아니라 현재도 인정하는 긍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더라. 낮은 기준에 미치면 그 다음 단계를 설정해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게 맞는지 확실힌 모르겠다.
--되내어보면 못하긴 참 못하더라. 사회적 잣대로 보면 말이다. 그래도 10살이 그 정도 한다 생각하면 못한다고 볼 순 없지. '행' 자체가 대견한 것이지.
(...)
13일 - 2011.10.1
오후에 둘 하다.
--부담감이 일어나 마음에 자리를 잡았음이 느껴지더라도 '행' 하기. 부담감은 무력감과는 다르다. 무력감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태이지만 부담감은 미숙하지만 할 순 있는 상태이다. 일어난 감정이 부담감이 확실하다면 그 감정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더라도 '행' 하면 초기에는 그 감정이 여전히 느껴지지만 조만간 자연스레 사그러들더라.
--이것에 대해 적는 것은 부담감이 일어나면 사그러들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래도 가라앉지 않으면 단기만족으로 가서라도 가라앉히려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이 왜 문제냐 하면 부담감이 일어나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이 불안해 하며 '행' 을 못하는 이런 성향을 반복함으로서 계속 '행' 해야 익숙해지는 몇 가지를 할 때 초기에 포기함에 따라 익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에서도 적었지만 부담감이 느껴지더라도 '행' 하면 된다. '행' 하는 중에도 부담감이 느껴져 부담스럽지만 2~3분이 지나면 대개 자연스레 사그러들더라. 사그러들지 않아도 그량 하면 된다. 이런 성향에 지배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고 깜짝 놀랐다. 어찌보면 기회의 순간일 지 모른다. 앞으로는 '좌절' 이었던 '행' 을 많이 할 생각이거든. 일어난 부담감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다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중이라 보면 되겠다.
13일 - 2011.10.1
자기를 구축하는 과정 또는 마음치유하는 과정은 의지가 아니라 '겸손'이다.
--의지는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뉘앙스를 많이 함축한 단어로 그 시선이 미래에 가 있다. 반면, 겸손은 그 시선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 자기가 미숙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인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두운 감정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의 미숙한 자기와 현재 일어나는 어두운 감정을 수용하기 때문에 체험이 누적되면서 미래상은 어느 덧 현재상이 되는 것이다.
(...)
15일 - 2011.10.3
아침에 둘 하다.
--난 김기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질문에 단 답변을 읽어보면 맨날 똑같다. 질문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대동소이하다. 그들이 '질의응답' 의 글을 읽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답답하니 질문을 했을 것이다. 답변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다 그러진 않겠지만 95%는 그럴 것이다. 김기태는 이 사실을 모를까. 그의 글에 등장하는 몇 사람 같이 그의 답변 한 마디면 질문자가 깨달음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갭을 줄일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는 왜 고민하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생의 목적이 타인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답변을 받은 대다수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 글을 보고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가 어찌 생각하든 나는 그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95%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이 갭은 한 달 동안의 실험으로 조금 줄어들 수 있는 듯하다.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15일 - 2011.10.3
(번외)
<<그리스인 조르바>> 를 이틀에 걸쳐 읽다.
--조금 신기한 체험을 했다. 어제 155페이지까지 읽고 오늘 읽고 있는데 230페이지 근처에서 힘듦 또는 부담감의 감정이 일어나더라. 부담감이니 신경쓰지 말고 그량 읽자는 생각으로 읽는데 이 감정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더라. 그래도 계속 읽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대로였다. 별재미도 없는 걸 어제부터 읽으니 드뎌 힘들어하는 듯했다. 감정 옆에 있는 또하나의 생각이 감정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난 다 읽기 전까지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다."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호함 때문인지 힘듦이 사그라들더라. 조금은 마음 편히 읽었다. 하지만 300페이지를 넘으면서 다시 일어났고 그후 계속 간간히 일어났으나 "그래도 끝까지 읽어야돼" 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결국 다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었지 싶다. 이런 감정이 일어나면 대개 두세 번을 넘기지 못하고 항복했던 것 같다. 뭐가 달라서일까, 를 생각해 보니 두 가지 때문인 듯했다. 하나는 일어난 그 감정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은 것인데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것을 감정에게 말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야 된다' 에 대해 마음의 심부에서도 공감한 것이다.
(...)
29일 - 2011.10.17
미숙한 자기로 '행' 할 때 사회적 잣대가 의식으로 침범해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계속 '행' 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명제를 하나 얻다.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 이전에도 반복되었던 퇴행적 반응으로 돌아갈 뻔 했으나 어찌어찌 사회적 잣대를 차단할 수 있게 되자 다시 '행' 할 수 있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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