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바깥’이 아니라 우선 ‘안’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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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7,057회 작성일 08-08-31 10:28본문
삶의 긍정에 대해서..
민병주 08-08-29 23:12
삶에 대해 긍정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부조리 모순 악 타락 너무나 선명하게 저에 눈에 비추어져 삶을 세상을 긍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뇨, ‘바깥’이 아니라 우선 ‘안’이 먼저입니다.
바깥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 아니라, 님 안의 세계를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님이 말씀하신 부조리, 모순, 악, 타락 등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님 안에도 있습니다. 님 안에 있는 그러한 것들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바깥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님은 문득 의아해 하며, “아니,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나?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근본에서부터 뿌리를 뽑고, 극복하며, 온전히 내 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아뇨, 진리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의 인위적인 노력과 수고를 통하여 내 안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하는 속에서 이윽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노자(老子)도 도덕경 7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正言若反.
나라의 더러운 때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를 일컬어 사직(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스럽지 못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를 일컬어 천하의 왕이라 하나니,
진리의 말은 마치 반대되는 것 같다.
이 글을 그대로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읽으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하는 단순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있다’고 긍정하고 시인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주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내 안의 상스럽지 못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나’라는 천하의 왕이 된다. 사실이 그러하건만, 이는 얼마나 반대되는 이야기로 들리는가....”
그렇듯 먼저 님 안으로 눈을 돌이키십시오. 그렇다고 ‘바깥’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선명히 보시는 것만큼 ‘안’에 대해서도 분명히 깨어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내 안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바깥의 아픔에 대해서도 진실로 함께 아파하며 사랑하며 깊이 보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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