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용하지 않으면 불성을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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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심 댓글 1건 조회 6,270회 작성일 08-09-07 14:03본문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존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품을 본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도 작용하는 데에 버젓이 나타나고 있지만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왕께서 작용하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으면 그 본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으로 나타납니까?"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내게 설명하여 주십시요."
"태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서는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서는 들으며, 손에서는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서는 온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수심결中>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품을 본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그 성품이 어디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도 작용하는 데에 버젓이 나타나고 있지만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왕께서 작용하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으면 그 본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으로 나타납니까?"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내게 설명하여 주십시요."
"태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서는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서는 들으며, 손에서는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서는 온누리를 다 싸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수심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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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교학교수는 이런 해설을 하더군요.
한 마디로 그의 답은 불성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낱낱의 작용에 있다는 말이다.
불성의 본체로 말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언제나 한결같아 일체의 모양을 떠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체는 또한 언제든지 환경을 따라 움직여서
온갖 기능과 모양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불성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본체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움직이며 변화하여 모양을 나타내는 작용에서
그 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낱낱의 작용에 있다는 말이다.
불성의 본체로 말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언제나 한결같아 일체의 모양을 떠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체는 또한 언제든지 환경을 따라 움직여서
온갖 기능과 모양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불성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본체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움직이며 변화하여 모양을 나타내는 작용에서
그 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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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움직이는 작용을 통해서만 불성을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보기가 힘들다고 할까요
댓글목록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왜냐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아 일체의 모양을 떠나 있는 본체로서의 불성(佛性)도
바로 그 움직임과 작용과 모양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움직임과 작용과 모양이 바로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아 일체의 모양을 떠나 있는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움직임을 떠나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