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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고 간택하는 것이 생명의 속성이라고 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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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유 댓글 1건 조회 6,070회 작성일 09-07-1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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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별-간택하는 마음이 내려져서 있는 그대로 흐르고 존재하게 되었을 때, 이를 달리 ‘대긍정(大肯定)에 들어갔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러고 난 후에도 여전히 분별하고 간택하며 살아가게 되지만 ― 왜냐하면, 분별하고 간택하는 것이 ‘생명’의 속성이니까요 ― 그것 자체가 ‘대긍정’ 안에서의 분별과 간택이기 때문에 거기 어디에도 매이거나 끄달리지 않게 되는 반면에, ‘흐름’ 자체가 되지 못하고 긍정의 대상과 부정의 대상을 <분별>하여 흐름을 막아가면서까지 간택하고 취사하게 된다면 그 하나하나마다에 매이고 끄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질의응답 답변中)
글을 작성하였는데 정상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뜨며 작성했던 글이 모두 날아가버렸네요. 다시 작성해 보겠습니다.
1. 현대사회에서 어떤 일이나 게임 같은 작업을 하려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분별을 굉장히 전문적으로 해야합니다. 이것은 어떤 직업에서든 필수적인 것이며, 특히 전문화된 것일 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죠. 예를 들면 학자 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자료들을 평가하고 분별해야 하며, 격투게임 같은 경우 상대의 기세를 순간 순간 읽으면서 매 순간마다 빠르고 정확한 분별을 해야합니다. 게임이 끝나고 나면 과거를 회상하며 더 나은 기술을 연구해야 하고요.
그런데 그런 분별에 파뭍힌 일상에서 '분별을 하면서도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싶습니다.
깨달은 사람이 분별을 하면서도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논외대상이고, 중요한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분별을 하면서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긍정의 대상과 부정의 대상을 <분별>하여 흐름을 막아가면서까지 간택하고 취사하게 된다면 그 하나하나마다에 매이고 끄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분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요? 긍정의 대상과 부정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 분별의 기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분별 자체가 존립할 수 없을텐데요.
2. '게으름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유위'가 아니라, 자신이 게으르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진실로 인정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일체의 행위는 '무위'일 수 있는 반면, 그것을 끊임없이 정죄하고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오직 그 극복 속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그 모든 행위는 '유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위'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버릇을 바꾸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끊임없는 '유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라는 답변도 보았는데요. 게으름과 부족을 진실로 인정하고 시인했다면 도대체 그 극복을 위해 왜 노력을 하나요? 게으름과 부족을 조금만 인정하고 시인한 경우에만, 곧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닐지요.
3. 분별을 하면서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종종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방구석에 가만히 있어보라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정체되고 고립되어 보이는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도 분별을 하면서 분별을 하지 않으려면 어떤 '수행'이 필연적으로 요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항상 '지금'에 머물려는 노력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道의 핵심이 '무위'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는 도중에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것(지금)에 맡기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의 성질 역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음' 이기에 곧 게을러지겠다는 것이고 방관적으로 되겠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무언가를 하려고 해야되고 의지를 굳건히 해야합니다. 그렇게 상황에 맡는 '함(爲)'을 하면서도 '지금'에 머물기만 하면 해결 되는 것인가요?
세 가지 번호를 써놓은 것은 세 가지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답변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모든 것을 분.명.하.게.알.고.서.야.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진실로 알게 되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제대로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서도 그냥 ‘불상현(不尙賢)’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면, 그 행(行) 속에서 진지(眞知)가 오롯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 속에서
  줄무늬 애벌레가 노랑 애벌레를 떠나 ‘꼭대기’에 이르는 길로 달려갔을 때
  상심에 젖은 노랑 애벌레는 어찌할 줄을 몰라 합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확신에 찬 줄무늬의 모습을 보니 노랑 애벌레는 함께 가겠다고 동의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가지 않겠다는 이유를 그가 수긍할 만한 뚜렷한 말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당황했고, 스스로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 행동하는 것보다는 그냥 기다리는 것,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노랑 애벌레는 그 상심과 모호함과 불분명 속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어느 날 고치를 치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용기를 얻게 된 그녀는 마침내 나비가 되는 모험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대목에선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서 그녀는 그 늙은 고치 바로 옆에 매달려서 자신의 실을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나,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제대로 되는 것 같아서 기운도 나고. 나의 내부에 고치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들어있다면 ― 나비가 될 수 있는 자질도 어쩌면 있을 거야.』”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랑 애벌레는 창공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눈부신 나비가 됩니다.

  님이여.
  모든 것을 분.명.하.게.알.고.서.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이 아름다운 책의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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