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성의 극복은 오직 삶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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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8,404회 작성일 08-07-19 22:00본문
이원성에 대하여
공허 08-07-10 13:08
이 공부를 하면서 꼭 걸리는 부분이 이원성에 대한 이해부족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도저히 못받아들이는 저 자신을 보면서,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그것은 좋다, 싫다로 나뉘어진 저의 마음이었는데, 도저히 그 싫다라는 마음을 설득할 수가 없었답니다. 좋다라는 추구하는 그 마음 또한 놓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가)에서 (나)로 가려는 '자아'가 살아있는 한 이 공부가 요원한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이원성의 허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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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공부를 하면서 꼭 걸리는 부분이 이원성에 대한 이해부족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싫다라는 마음을 설득할 수가 없었답니다.”
“어찌해야 이원성의 허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뇨, 이원성의 극복은 ‘이해’의 차원도 아니요, ‘설득’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니며, ‘허상’ 운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가 생각 혹은 관념 속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 혹은 관념으로는 아무것도 우리를 변화케 할 수 없습니다. 이원성의 극복은 오직 구체적인 ‘삶’ 혹은 ‘살아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님은 “(가)에서 (나)로 가려는 '자아'가 살아있는 한 이 공부가 요원한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뇨, ‘자아’는 살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공부는 ‘자아’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때, ‘자아’가 (가)에서 (나)로 가려고 할 때, 그것이 ‘길’이 아님을 설득하거나 설명하거나 이해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나)로 가려는 모든 몸짓을 정지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로 가지 못한 ‘자아’는 참 답답해하고 깝깝해하고 힘들어하고 씁쓸해하고 괴로워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냥 답답해하고 깝깝해하고 힘들어하고 씁쓸해하고 괴로워하고 불안해하십시오.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원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아’가 가장 못견뎌하는 것이 바로 ‘할 일이 없는 것[無爲]’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아’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부추기며, (나)로 가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와 방법들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너무나 그럴듯하게 보여서 우리는 항상 그것들에 속아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무도 당당하게 (나)를 향해 길을 떠나지요. 그러나 그렇게 (나)를 향해 꿈쩍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유’는 우리로부터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영원히 해방케 할 ‘자유’는 분명 (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자유한 존재입니다, 그죠? 또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원성이야 말로 실체가 없는, 허공 속에 그려진 이정표와 같은 것입니다, 그죠? 그런데도 그 허공 속의 이정표를 좇아 길을 떠나다니오!
그렇듯 이원성의 극복은 어떤 설득이나 설명이나 이해나 지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살아냄 혹은 치러냄 속에서만 가능한, 지극히 단순한 무엇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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