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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는 것'과 '그 자체가 되는 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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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대 댓글 1건 조회 5,840회 작성일 09-04-18 08:22

본문

'수행을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겠습니다 '
'매순간 깨어 있기 위해서 수행을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지금 여기 이순간이 진리이다'
'깨달을 것도 깨달음도 없다'
'나는 없다'
'모든 게 허상이다'
하지만 산만하고
생각많아 갈등하고
생각에 끌려다니는
나를 있는그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가감없이 시비분별없이 보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깨어있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아는 것'과 '그 자체가 되는 것'과의 차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에 그치지 읺고 그 자체가 되고 싶다는 것도 쉬어야한다면
부처님은 뭐하러 위빠사나를 '오직 이 길'이라고 권하셨을까요?
원으로 도를 표현하자면 출발할때의 점과 돌아와서의 점이 같더라도
체험한 후에 그 원점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댓글목록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안녕하세요?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은 "....산만하고 생각 많아 갈등하고 생각에 끌려다니는 나를 있는그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가감없이 시비분별없이 보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깨어있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감없이 시비분별없이 보려는 바로 그 놈이 이미 분별입니다.
그리고 분별로는 결코 '가감없이, 시비분별없이'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분별로는 결코 분별 너머의 자리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하여 미래의 어느 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고 '미래'에 ㅡ 이것이 바로 이원성(二元性)인데,
이원성으로써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원성의 사라짐, 그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을요....

<대승찬(大乘讚)>을 쓰신 지공화상(誌公和尙)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하면, 늘 부처와는 까마득히 멀구나.     
若言衆生異佛  迢迢與佛常疎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면, 저절로 남김없이 구경(究竟)이리라.   
佛與衆生不二  自然究竟無餘

용모를 단정히 하고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경계를 거두어들이고 마음을 안정시켜 깨어서 관찰하지만
斂容入定坐禪  攝境安心覺觀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가 도를 닦는 것과 같으니, 언제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機關木人修道  何時得達彼岸

이치를 깨닫고 돌이켜 수행을 살펴본다면, 공부한다고 헛되이 애쓴 줄 비로소 알리라.
得理返觀於行  始知枉用工夫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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