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탔다 다시 알듯 모를듯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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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 댓글 0건 조회 6,059회 작성일 10-11-03 05:03본문
道可道非常道,
도(道)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도가 도라고 딱히 구체적으로 제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요. 살아가는 방법이 이렇다 저렇다 정형화 하고, 계량하고, 천하고 귀하고를 당당히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고 껍데기고...
名可名非常名.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이고 딱지 붙이고 분별심을 내세워 수지 타산을 맞추는 것으로서 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제대로 된 “인식론”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름자 가 “나”냐! “나”는 이름자를 가질뿐 나는 나일뿐... 너는 너이고
無名天地之始,
이름없음(無名)은 하늘과 땅의 비롯함이요,
-그러기에 바로 원래는 선,악 자체, 호, 불호 자체를 구별함이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부질없는 짓이지만...
有名萬物之母.
이름있음(有名)은 만물(萬物)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악 자체, 호, 불호 자체는 우리 스스로의 “나”란 자각을 하는 실체적 존재에게는 참으로 뼈아픈 실체이니 참으로 오묘한 일이다. 그래서 조금 한자리 봤다고 실체적 존재를 부인하고 도인처럼 행동하는 것 또한 큰 바보다.
왜 만물의 어머니라고 했나? 어머니가 만물을 먹여 살리듯 만물이 먹고 사는 과정에서는
선,악,호,불호가 부질없다고만 말하기도 힘들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분명
딱지를 붙이고, 사리판단을 내려서 먹고 살 길을 찾는 것이 바로 또 살아가는 방법이다.
먹는 자가 있고 먹히는 자가 있는데..
먹히는 자가 먹는 자에게 “자 내 몸 잘 맛있게 잡수시고 행복하세요”할 수 있을까? 도인이라면 참 그 경지가 되던지.. 그 상황을 만들지 말던지.. 그 상황을 변화 시키던지 한다고 하지만.. 실제 보통사람이 그 경지를 이루지도 못하고, 세상만사 초월한 척 부질없는
척 해봤 자.. 처자식만 고생시키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러므로 언제나 무욕(無欲)으로써 그 오묘함을 보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자기 눈꺼풀에 낀 집착 하나만 버린다면 자연스럽게 그 오묘한 모습을 볼수 있다. “묘”하다는. 것이 뭔가?..... “묘”하다는 것은 겉으로는 삐걱삐걱 잘 쉽게 잘 안 들어 맞을 것 같지만 참으로 잘 오묘하게 들어 맞고 있는 것이다. 세상 그 자체는 이미 완벽하다. 심지어 지옥 불꽃 속이라도 제대로 자신을 속박하는 집착, 습관처럼 살속에 파고들고 뼈속에 엉겨 붙어 덧없는 줄 알면서도 조금만 채워지면 즐거워지는 그 맘을 덜어내고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다. (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고, 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행복까지 원한다면 제대로된 교만을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常有欲以觀其요.
유욕(有欲)으로써는 그 가장자리를 볼 뿐이다.
- 반면에 욕심이 있는자는 절절히 욕심하나로 뼈속까지 초지일관할 욕심으로 정진한다면.. 곧 자신이 성취에 크게 관계 없이 그 또한 실체적 존재, 형식, 목적만으로는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닭게 된다. 욕심을 제대로 버려도 오묘한 세상을 보고, 욕심을 제대로 부려도 오묘한 세상을 보니.. 참으로 세상은 돌고 돌으며 쉽지가 않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이 둘은 같은 것인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
- 무명, 유명을 같은 곳에서 시작했으니, 우리에게 인식되는 실체적 느낌은 틀리지만 애초에 그 본질은 같은 것이다. 다만 쉽게 안다고 교만하지 말라. 욕심을 버려도 제대로 버리고, 부려도 제대로 시때를 알고 노력을 하면서 부려야지 섣불리 버린척, 진지하지 않게 되는대로 원한다면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다고 그 실체적 삶은 자칫 뜨거운 맛을 더 톡톡히 보기 십상이며, 운 좋아 비슷하게 들었다해도 인연이 없는 옷이니 결국에는 남들에게 자신에게 우스꽝스러워 질 뿐이다.
同謂之玄,
이 둘이
같음을 일컬어 현묘(玄妙)하다 하니,
玄之又玄,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衆妙之門.
모든 오묘함의 문(門)이다.
- 까맣게 속이 깊이 타들어 간 모습이 다시 되돌려 진실로 알듯하다 불현듯 방심하면 막막한 것이 바로 이 오묘한 우리세계의 참 모습이며... 그래서 또 “도”란 살아가는 방법이란, 교만하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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