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쓰다가, 뭘 잘못 눌렀는지 깨끗히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고 쓸 수 있을 것 같아 잘 됐다는 생각도 드네요ㅎㅎ. 이번이 고2가 되는 여학생입니다. 제 안에서 날뛰는 증오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질문 드립니다.
잘 되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누구에게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강박이 있습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예전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느 새벽, 저는 엄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엄마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더군요. 그리고, 통화음을 줄이지 않은 엄마의 핸드폰에서 들리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렸습니다. "너 같은 년 밑에서 애들이 얼마나 잘 크나 보자." 이런 얘기였죠. 아빠 쪽 친척의 전화였던 것 같습니다. 둘째 큰엄마 정도였겠죠.
남자가 네 가지만 안 하면 그냥 같이 살라고 하죠. 도박, 바람, 폭행, 주정. 저희 아빠는 이 네 가지를 모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무책임한 아빠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했고, 가뜩이나 약한 몸을 끌고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하지만 아빠와 아빠의 가족들은 그런 엄마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벽까지 고3 과외를 하고 들어온 엄마를 남자와 모텔에서 뒹굴다 온 화냥년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엄마의 과외 학생이 멋대로 엄마를 좋아했고, 엄마는 그 때문에 굉장히 난처해했지만, 아빠와 그 학생의 부모들은 엄마를 학생에게 꼬리치는 음탕한 여자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당당한 사람이 되어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말했잖아, 그토록 연약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상냥했던 우리 엄마에게,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엄마에게, 단 한 순간도 가정을 외면한 적 없던 내 엄마에게, 당신들이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지금 나와 내 동생을 봐, 당신들이 그토록 짓밟으려 했던 엄마 밑에서 우리는 이만큼 잘 컸어, 당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깨끗하게 살아왔어,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더럽게 살지 않았어…….
당신들이, 틀렸어,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건 강박이 되었습니다. 저는 늘 최고이고 싶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늘 성실하고 밝고 예의 바르고 성적 우수 품행 방정한 학생이었습니다. 완벽한 모범생 루트를 걸어 왔다고, 제 스스로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좋았습니다. 늘 독을 품고 생활한 건 아니지만, 이따금씩 그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저는 다시 증오에 헐떡거리고, 그 사람들 앞에 작아질까 두려워하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를 늘 채찍질하게 되더군요. 저는 결코 모든 면에서 완벽해질 수 없을 텐데, 늘 저 자신에게 완벽만 바라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도 다독이지 못하고, 조금의 이탈도 인정하지 못하고, 한 치의 실수도 없는 똑바른 삶을 요구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버겁습니다. 네, 버겁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 강박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 강박이 불러온 모든 감정들 때문에 저는 참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아팠지만, 그래도 지금 저는 그 강박의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잘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한참 더 가야 하지만, 일단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강박이, 증오로부터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희 엄마를 비웃었던, 그들을 향한 증오로부터요.
무엇이 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요. 저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친가 친척들을 향한 증오, 아빠를 향한 증오를 받아들일까요? 늘 최고가 되어 그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이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선생님,
저 이런 말 하기는 정말 싫지만, 슬프지만,
늘 저에게 최고의 엄마였고,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저의 편이었으며, 가장 좋은 친구이자 조언자이자 동행자였고, 그토록 사랑스럽고 여리고 안타깝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나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나는 엄마랑 아빠가 똑같이 좋아."라는 말에, 제게 과도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향한 증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빠랑 화해하면 안 돼?"라고 묻던 제게 "우리 인이는 그냥 아빠랑 같이 살래?"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향한 이 증오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저는 편해질까요?
엄마를 정말 너무 좋아합니다.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때는 정신이 너무 피폐해지고 몸도 약해져서,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 실수를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를 짓밟으려 들었던 모든 사람들을 증오합니다. 엄마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희 엄마는 단 한 번도 저희를 아빠의 폭력 앞에 방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보호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단 한 번도 저희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던 엄마인데, 왜 저희 남매 혼자 남겨졌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엄마의 노력을 왜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몰랐던 그 어린 아이로 돌아가, 왜 보호해주지 않았냐고, 왜 안아주지 않았냐고, 왜 이해해주지 않았냐고…… 따져 묻게 되는 걸까요.
엄마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건 저인데……. 이해해주지 못했던 것도 저인데…….
이해와 납득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건, 수학 문제를 이해한다는 느낌의 그 이해입니다. 엄마가 왜 제게 과도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는지, 왜 아빠에게 가버리라고 밀쳐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합니다. 저희 엄마는 너무 힘들었을 테니까요. 아팠을 테니까요. 그런데 아이들마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서러웠겠죠, 아팠겠죠, 죽고 싶었겠죠. 그럴 만도 했겠죠. 엄마의 앞뒤 사정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납득은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증오합니다. 저는 엄마를 모욕했던 사람들을 짓밟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엄마를 증오하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죠?
몇 년 전에, 엄마에게 그때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게 과도를 들이밀던 그 날을 기억하느냐고요. 그런데 엄마는 웃으며, 제가 꿈을 꾼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꿈이었을까요? 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엄마로부터 도망치려고 한 날이었습니다. 엄마는 급히 신발 신는 제 옷을 끌어당겼고, 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습니다. 울음도 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엄마가 또 그러면, 그때는 신발 따위 신지 않고 도망가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또렷히 기억합니다. 늦게 들어온 아빠가 우는 저를 안아올렸을 때, 그 손이 놀랍도록 차가웠다는 것도…… 그 감촉도……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꿈이라니요.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요, 부정하는 걸까요.
무엇이었던, 저는 더 이상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작년에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예전에 나나 동생이 아빠 편 들면, 우리가 그렇게 미웠어?"라고요. 엄마는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조금 마음이 씁쓸해지고, 슬퍼져서, 그래? 라고 되묻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엄마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증오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엄마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저는 결코 좋은 딸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단 한 번도 엄마를 보호해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놓고 저희를 보호해주지 않았다며 서운해하는 것을…… 그 비겁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늘, "아프지?"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엄마가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에, 엄마는 너무도 힘에 부쳐 하고 있기에, 엄마를 힘들게 할 말은 하지 않기로 아주 오래 전에, 초등학생 때부터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저 스스로 그렇게 하자고 결정해 놓고, 마치 엄마가 말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서운하고 서럽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프지? 아팠지?"라고 물으면,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납니다.
네, 아팠습니다. 엄마도 아팠겠죠. 하지만 저도 아팠습니다. 모든 어른들이, 제게 "누구는 이해할 수 있지?"라고 말했습니다. "저번에도 엄마를 이해해 줬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어른스러우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른스러워서 엄마와 아빠를 이해했던 게 아닙니다.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저를 어른스러운 아이로 보고, 너는 착한 아이니까, 라는 말을 하며 일사천리로 이해의 몫을 떠안겼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팠습니다. 비록 엄마가 아팠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미한 아픔이었다고 해도요, 그래도 저도 아팠습니다.
엄마는 증오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치사스럽게도요. 한심하게도요. 이것은 엄마에 대한, 저희를 위해 바친 엄마의 시간에 대한 배반이 아닌가요? 저의 이기심이 아닌가요? 저는 늘 좋은 딸이 되겠다고 다짐해 왔는데……. 저는 대체 어디까지 엄마를 비난하고 증오해야, 엄마를 받아들이게 될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