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身(dhammakaya)에 대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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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uslkeeper 댓글 1건 조회 7,060회 작성일 11-02-18 20:47본문
* 아래 저의 글을 읽어 보시고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어느 날 갑자기 일원상을 깨달았습니다.
일원상이란 日政시대 때 우리나라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란 사람이 일원상을 깨닫고 원불교를 일으켰는데 그 일원상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원불교 사람은 아닙니다. 원불교는 고등학교 때 친구의 권유로 같이 원불교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 한번 가 보았을 뿐 인데. 그때도 제 관심을 끈 것은 원불교가 아니라 그날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으로 ‘타이스의 명상곡’을 멋있게 연주하던 남학생이었으며 그 기억 밖에 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후로도 원불교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의 일원상을 깨닫던 순간을 이야기 하자면 이렇습니다.
일원상을 깨닫게 된 것은 지극히 평범한 상황에서였습니다.
그 날 아침 저는 기분 좋게 일어나 화장실에 갔습니다. 역시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개운한 기분으로 화장실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의 얼굴 앞에 반 주먹 정도 크기의 일원상이 번뜩이며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것, 뭐 저런 게 다 있어? 완전히 뒤 집어졌네 !” 신기하고 또 신기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가 본 일원상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것 원불교 마크와 비슷하네”. 저는 곧 인터넷으로 원불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이 일원상을 ‘法身’으로 부르고 또 ‘담마카야(Dhammakaya)라고 부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팔리어 같습니다. 산스크리트어였으면 ’달마 Dharma‘ 라고 했을 테니까요...
어쨌던 그때부터 인터넷과 책을 통한 일원상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 원불교 사이트의 일원상에 대한 자료를 검토 하던 중 한 ‘곤란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것은 위 일원상과 관련한 화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화두는 ‘入打也, 不打也’라는 화두였는데 간단히 말해 입타야 불타야는 이 일원상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니 저 일원상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순간 두려움이 몸에 느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화장실 갔다 오면서 우연히 본 일원상이고 그 일원상이 왜 생기는지 누가 생기게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마치 유령 속으로 들어가 보라는 말과 같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위 일원상이 일종의 문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한번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가 원불교도 아닌데 ‘어떻게 원불교의 말을 믿을 수 있지?’하는 생각에 주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일원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편화된 것인가 확인 하는 것이 풀어야 할 과제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외국 사이트를 찾아보려고 인터넷 구글 사이트를 통하여 ‘Dhammakaya'라는 말로 이미지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그러자 구글 사이트에서 일원상의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티벳의 린포체 쵹얌 퉁가파가 운영하는 사이트였습니다. 그리고 위 일원상은 10개의 소 그림인 ‘심우도’의 8번째 그림인 ‘인우구망’에서 위 일원상이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쵹얌 퉁가파는 그 아래 설명에서 “Enter to this dhammakaya'라고 하여 일원상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즉 일원상안에 들어가는 것을 티벳 불교에서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제서야 두려움이 없어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저 일원상 안으로 한번 들어가 봐야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을 자는데 누군가 제 머리 맡에서 ‘무아 상태 맞지?’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떤 모습이 나타났는데 ‘약 20개 정도의 동그란 달 모양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기를 ’아, 이것이 중생이라는 것이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저는 원불교 보다도 심우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심우도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심우도에 대한 책도 두 권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한 권은 오쇼 라즈니쉬의 심우도이고 다른 책은 경서원에서 출판한 심우도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소 오쇼 라즈니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엉터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쇼가 엉터리임을 확인해 보고자 일부러 오쇼의 책을 샀던 것입니다.
역시 오쇼는 제가 생각한 것과 같이 심우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오쇼의 다른 무슨 책인가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오쇼는 구나(guna)가 어쩌구 저쩌구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구나가 무슨 뜻이지? 하고 생소해 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심우도의 소가 바로 구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쇼는 자신의 책 심우도에서는 한 번도 구나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달아난 소가 암컷 소를 찾아 도망갔다는 하잖은 내용 뿐이었습니다.. 결국 오쇼가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책은 경서원의 심우도 책이었는데 비교적 충실한 내용이었으나 제가 경험한 것과 다소 불일치한 내용이 있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서원의 심우도 첫 머리에는 ‘중생은 모든 부처의 근본’이라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심우도를 이해하는데 Guna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guna라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립문자니 어쩌니 하는 것입니다. guna는 부처님 시대 이전 베다 경전에서부터 사용된 말인데 야유르베다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우도는 guna의 밭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guna는 불교 용어가 아니라 힌두교 용어입니다.
일원상은 화두집 벽암록에도 나옵니다. 벽암록 33칙과 69칙은 일원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벽암록에서는 일원상이 ‘말 할 수 없는 불립문자’라며 손짓, 몸짓으로 나타내는데
오늘 날과 같이 세계가 하나가 되고 인터넷을 통한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이해등 지식의 빠른 전달체계의 세계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깨달음은 더 이상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나의 깨달음은 언어로 말할 수 없이 심오하다’거나 ‘나의 깨달음은 언어 이전의 깨달음이다’와 같은 식으로 깨달음을 미화 내지는 신비화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논리 실증주의자 비트겐슈타인의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일원상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는 흰색의 ‘원광’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광’, ‘순질’ 정도로 말하나 인도 사람들은 이를 삿트바 구나(sattva guna)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일원상도 깨달음의 끝이 아니라 중간 단계의 깨달음일 뿐이란 사실입니다.
* 촉얌 퉁가파의 심우도: .http://www.shambhala.org/dharma/ctr/oxherding/ox8.html
댓글목록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기분 좋게 일어나 화장실에 갔습니다. 역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개운한 기분으로 화장실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의 얼굴 앞에 반 주먹 정도 크기의 일원상이 번뜩이며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것, 뭐 저런 게 다 있어? 완전히 뒤집어졌네!’ 신기하고 또 신기하였습니다.”
예, 님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런 경험을 했고,
그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