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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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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8,089회 작성일 11-09-0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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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따뜻한 글과 애틋한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에게는 성향(性向)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어떤 색깔의 옷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유형의 옷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를 두고 “너는 왜 그런 옷을 좋아하느냐,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옷을 입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으니까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종교’라는 옷을 입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옷은 좀 특별해서 그 안에 ‘교리(敎理)’라는 어떤 힘이 들어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만이 유일하게 참된 옷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도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옷을 입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성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성향을 두고 “너는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구요..”라는 것이 바로 그들만의 독특한 옷입니다. 따라서 “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죽은 후의 심판 받음을 두려워할까요? 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됩니다.


저도 가끔씩 집사람을 따라 교회에 가곤 하는데, 그들을 그들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내 마음 안에서는 아무런 충돌이 없지만, “내가 부처고 하나님이고 내가 진리라는 김기태 선생님의 말씀을 살짝 꺼내면 저는 마치 정신병자가 된 듯 너무나도 안타깝게 바라보더군요...”라는 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그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안타까운 눈길을 받는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그들의 길은 그들의 길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님은 님의 길을 가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얘기도 아니고, 오래 전 있었던 일을 기록한 어떤 역사서와 같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정확히, 지금 여기의 ‘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님이 말씀하신 <노아의 홍수>도 전 인류를 몰살시킨 이야기가 아니라, 님 자신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홍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하나님이 물로써 세상을 멸하신 이유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죠?

이때의 ‘세상’은 곧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고,

그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것은 곧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고 미래의 보다 완전한 ‘남’이 되려는 그 생각이 바로 항상 악할 뿐이며 또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죄악이 세상에 관영한’ 것이지요.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 생각과 계획―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의 영혼은 숨을 못쉬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살 길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창세기 6:19~20....7:8~9)


아, 각기 둘씩....그리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암수 한 쌍씩...!

이때의 노아의 방주 또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생명은 살 수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각기 암수 한 쌍씩이 들어갔고, 또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늘 우리 마음이라는 방주 안에 강하고, 분명하고, 힘 있고, 당당하고, 멋있고, 볼품 있고, 가득 차고 충만한 것들만 들여놓고, 약하고 모호하고 초라하고 볼품없고 우울하고 외롭고 슬프고 불안하고 짜증나고 무기력한 있는 그대로의 ‘나’는 조금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지요. 성경은 바로 그러한 우리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혼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노아의 홍수 때 물에 잠겨 죽었듯이,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노아의 방주 안에는 각기 둘씩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빛과 어둠이, 강한 것과 약한 것이, 분명한 것과 모호한 것이, 힘 있는 때와 무기력할 때가, 당당할 때와 초라할 때가, 사랑과 미움이, 온유와 질투가, 따뜻함과 차가움이 함께 있습니다. 그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사는 길입니다. 그것은 곧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방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방주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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