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들렀다 대화가 너무나 재미있어 끼여들었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신다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톨레의 관찰자, 위빠사나의 주시자, 그리고 김기태 선생님의 주시자 없음”의 차이점을 밝히고자 하시는데, 이런 논의는 관념으로 진행되는 한 해결되지 않고 똥싸고 밑 안닦은 것 같은 찝찝함이 계속 남게 되지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진리의 실상을 알아야 논의가 끝장, 즉 사라지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실상(저는 “자연의 이치”라는 표현을 즐겨 씁니다)에서 볼 때 모두 맞기도 하고 모두 틀리기도 합니다. 관찰이니 주시니 하는 정신 작용은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상태를 가르키는 관념입니다. 아는 마음과 알아지는 대상 사이에 인식작용이 끼이면 관찰자 또는 주시자(이 둘은 같은 상태를 가르키는, 용어는 다르지만 같은 관념입니다)로 서로 분별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분별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이치에 의한 작용입니다. 이 때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분명 관찰자 또는 주시자라는 관념의 사용은 적절합니다. 톨레의 관찰 또는 위빠사나의 주시행위를 계속 하다보면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끼여 대상을 아는 관찰자 또는 주시자가 있는 상태가 있게 되나, 점점 관찰이나 주시작용은 관찰이나 주시작용으로 분별하는 인식작용은 인식작용으로 별개로 느껴지게(느껴지듯이 아는) 되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관찰자 또는 주시자라는 관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주시자 없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셨겠지만 “톨레의 관찰자, 위빠사나의 주시자, 그리고 김기태 선생님의 주시자 없음”은 서로 다른 있는 그대로의 정신작용 상태를 가르키는 표현(관념)일 뿐이지 어느 것이 틀리고 어느 것이 맞는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진전에 따라 주시자는 없고 주시행위만 있을 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김기태 선생님의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 이미 이대로 깨달아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슨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다만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무언가 완전한 것을 찾거나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말씀 너무나 훌륭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여기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진리(자연의 이치) 그 자체라는 말씀은 맞지만 깨달음 그 자체라는 말씀은 적절한 용어(관념)는 아닌 것 같군요. 통상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여기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있는 그대로 진리(자연의 이치) 그 자체라는 통찰(앎 또는 이해)이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가르킬 때 사용하는 것이지요. 여기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이 있는 그대로 진리(자연의 이치)인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것이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진리(자연의 이치) 그 자체고 알면 아는 대로 진리 그 자체이지만, 아는 상태의 정신작용과 모르는 상태의 정신작용은 모습을 달리 하게 되지요. 모르는 상태의 정신작용은 불편함이나 불만족을 드러내고, 그래서 불편이나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무언가 완전한 것을 찾거나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의 이치로 일어나게 되지요. 그래서 김기태 선생님을 찾거나 위빠사나 등 수행을 하게 되는 거지요. “수행이나 방법”이라는 것이 불편이나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이르는 용어라면, “수행 또는 방법”이 자신이 있는 그대로 진리 그 자체임을 모르는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지요. 물론 필요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수행이라는 이름없이도 벗어나려는 노력을 이미 많이 한 사람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과는 당연히 필요 정도가 다르게 됩니다. 사람마다 벗어나는 성취의 속도가 다른 것은 그런 이유에 기인합니다.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한 노력에는 위빠사나 같은 “하는” 것들도 있고 김기태 선생님의 “하지않음”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김기태 선생님의 “찾거나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기” 또한 사실은 “하지않음의 함”이지요. 왜냐하면 “찾거나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기”가 김기태 선생님 같은 깨달음이 있는 분들을 제외한 아직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겐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는” 방법이 유용할 것이요 이미 벗어나고자 온갖 노력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김기태 선생님의 “하지않음”의 방법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실제의 정신작용(진리가 작용하는 실상)에서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지않음”(무위)은 “하는” 또는 “하지않음의 함”(유위)을 거쳐("수행 또는 방법"을 통하여) “하는” 또는 “하지않음”의 인식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즉, 자기라는 인식도 없고 “한다 안한다 또는 안다 모른다”라는 인식도 없을 때의 상태를 이르는 표현입니다.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김기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 ‘나’가 이미 깨달음” 그 자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관찰자나 주시자 같은 것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모두들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