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충동이 생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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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궁금자 댓글 4건 조회 9,506회 작성일 14-01-19 14:3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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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작성일
많은 경우에 '행위'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답니다.
님이 "그러다가 그 살인충동에 흠뻑 빠져...."라고 말씀하셨듯이
미처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감정을 자각하기도 전에
그 감정에 '함몰'되어 자신도 모르게 행위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휘둘린' 것입니다.
진정한 '받아들임'은 아무리 격한 감정과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녹여버리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님은 "인간도 그 자연의 일부이니, '도' 의 일부이니 살인도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요?"라고 말씀하셨지만,
진실로 '도'와 하나가 되면 오직 사랑밖에 남지 않는답니다.
궁금자님의 댓글의 댓글
궁금자 작성일답변 감사합니다..^^
행인님의 댓글
행인 작성일
살인충동을 느끼는 심리적 기전을 심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유아는 많은 감정과 욕구를 느낄 텐데 그것들이 드러날 때 감정에는 공감되거나 위로되고 욕구는 충족되기를 원합니다. 성숙한 부모를 만나면 원하는데로 되는 경우가 많지만 미숙한 부모를 만나면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하게는 비율의 문제입니다. 미숙한 부모라도 유아의 욕구에 만족시켜주는 것도 있지만 그 비율이 상대방적으로 많이 낮습니다. 충족이 되면 자신도 좋은 자기로 느껴집니다. 충족이 되지 않으면 좋은 자기가 멸절되는 느낌과 더불어 나쁜 자기가 출현하는데도 나쁜 자기는 분노 또는 격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나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내면에 분노가 많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자신이 드러난 모습이 무시당하는 등의 일을 겪으면 바로 나쁜 자기가 출현하고 격노가 일어나고 폭력이나 살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왜 이런 충동을 느꼈을까? 상대방으로 인해 좋은 자기가 멸절이 되었으니, 다시 말해서 내가 죽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너도 죽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고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정이 무시당하거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기가 심하게 위축되거나 멸절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시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무시를 당했을 때 자신마저 자신을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기에 위축이 되고 나쁜 자기가 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원래부터 감정이나 욕구에 만족을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부모라도 부모의 문제입니다. 부모라면 기대를 버리기가 어렵지만 버려야 합니다. 부모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대를 해야겠죠. 쉽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감정에 공감받고 욕구가 충족되길 원하는 욕구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폭력이나 살인을 하고 싶을 때 내면을 들여다 보면 격노가 활성화되어 있을 텐데 격노가 일어나기 전에 욕구의 좌절이 있었을 것이고 뭔지 모르지만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격노보다는 이 위축에 집중을 하면서 상대방은 만족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위축이 덜 될 것이고 자신의 온전함을 어느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기대를 접고 가능한 사람과 관계경험을 하면 됩니다. 궁극적으로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위와 같이 이해하시면 약간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욕구는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살인까지 하고 싶다는 것은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그래서 살인 충동을 느낍니다.
살인충동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기'를 느끼지 않기 위한 강렬한 방어이기도 합니다. 무시를 당했을 때 내면에서 심하게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기'가 출현했다는 뜻인데 이때의 느낌은 느끼고 있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랑이란 게 바로 이 느낌이 들 때 자신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껴앉는 것입니다. 껴앉을 수 있으면 격노가 일어나진 않습니다. 상대방의 문제일 뿐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격노가 방어라고 하는 것은 격노를 하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 나'를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표출을 하면 내면에 자리잡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기를 껴앉을 기회를 또한번 놓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궁금자님의 댓글의 댓글
궁금자 작성일
그렇군요!
진실된 답변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