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두 가지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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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9,666회 작성일 06-03-18 11:49본문
"인생은 고(苦)다!"
석가모니가 6년 설산(雪山)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산을 내려와선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比丘)들에게 맨 처음 법(法)을 전하게 되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 맨 처음 굴린 진리의 수레바퀴)이라고 하지요. 이때 석가모니가 전한 법(法)이 바로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입니다. 그런데 그 사성제(四聖諦)의 처음이 '고성제(苦聖諦)'인데, 이는 곧 "인생은 고(苦)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산다는 것은 참 힘들고 괴롭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제 나름으로는, 살아있기에 우리가 받고 또한 치러야만 하는 고통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고통의 두 가지 빛깔이라고나 할까요.
그 하나는, 똑같은 고통(혹은 삶의 힘겨움)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자유'에로 인도하는 고통이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우리의 생명력마저 갉아먹는 고통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똑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바로 그 고통 때문에> 오히려 삶의 자유와 해방과 자신 안의 진정한 '힘'을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바로 그 고통 때문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어째서 그럴까요?
똑같은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똑같은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결국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죽지 않으면 고통이 곧 기회가 되지만, '마음'이 먼저 죽으면 삶의 모든 기회가 그대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죽지 않으면 고통이 곧 기회가 되지만, '마음'이 먼저 죽으면 삶의 모든 기회가 그대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삶에 열정이 너무 없습니다.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두렵네요. 또 큰일을 해보려고 하면 두려움이 앞섭니다."라구요.
님의 짧은 이 한 마디 속에 님의 삶의 힘겨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네요.
"삶에 열정이 너무 없습니다.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두렵네요. 또 큰일을 해보려고 하면 두려움이 앞섭니다."라구요.
님의 짧은 이 한 마디 속에 님의 삶의 힘겨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네요.
그런데 님이여.
악순환은 악순환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네 인생은 <아직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가능하구요.
'한 마음'을 일으켜 보세요.
그 악순환의 고리를 지금 당장 끊을 '한 마음'을요.
님은 지금 삶의 열정이 너무 없기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귀찮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무언가 일을 해보려고 해도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에>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채 거기 그냥 주저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자꾸만 자신 안의 그런 마음들에 스스로 주눅들고 함몰되어 가는 것이지요.
님은 지금 삶의 열정이 너무 없기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귀찮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무언가 일을 해보려고 해도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에>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채 거기 그냥 주저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자꾸만 자신 안의 그런 마음들에 스스로 주눅들고 함몰되어 가는 것이지요.
님이여.
동일한 에너지는 동일한 에너지를 부릅니다. 그래서 악순환은 그저 똑같은 악순환만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이제 그 '고리'를 한 번 끊어보십니다.
제가 님에게 일으켜 보라 한 그 '한 마음'이란, <∼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입니다.
즉, 삶의 열정이 너무 없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열정이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한 번 문득 일으켜 보면, 참으로 묘하게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여백 같은 것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두렵기 <때문에> 그 마음을 따라 그냥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귀찮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을 살포시 내디뎌 보면, 아! 님 안에서 죽었던 많은 마음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뇨,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큰 것을 하려하지 마시고, 작은 것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때마다 <∼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한 번 일으켜 보세요. 그러면 그 자그마한 '한 마음'이 참으로 묘하게도 님에게 자꾸만 새로운 마음들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이제 님도 함께 살아날 것입니다.
즉, 삶의 열정이 너무 없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열정이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한 번 문득 일으켜 보면, 참으로 묘하게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여백 같은 것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두렵기 <때문에> 그 마음을 따라 그냥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귀찮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을 살포시 내디뎌 보면, 아! 님 안에서 죽었던 많은 마음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뇨,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큰 것을 하려하지 마시고, 작은 것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때마다 <∼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한 번 일으켜 보세요. 그러면 그 자그마한 '한 마음'이 참으로 묘하게도 님에게 자꾸만 새로운 마음들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이제 님도 함께 살아날 것입니다.
님이여.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귀찮아하고 두려워하며 그냥 앉아 있어도 괴롭고, <∼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을 내디뎌봐도 여전히 불안하고 힘든 건 우선은 마찬가지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자(前者)는 님을 더욱 오래고도 질긴 헤어날 길 없는 어둠과 무기력 속으로 끌고 들어가겠지만, 후자(後者)는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 오래지 않아 마침내 님을 '자유'에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귀찮아하고 두려워하며 그냥 앉아 있어도 괴롭고, <∼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을 내디뎌봐도 여전히 불안하고 힘든 건 우선은 마찬가지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자(前者)는 님을 더욱 오래고도 질긴 헤어날 길 없는 어둠과 무기력 속으로 끌고 들어가겠지만, 후자(後者)는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 오래지 않아 마침내 님을 '자유'에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님이 만약 지금 그 '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마음은 참으로 많은 '선물'들을 머지않아 님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생(生)의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지금 내딛는 이 자그마한 한 걸음 속에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그와 같이, 생(生)의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지금 내딛는 이 자그마한 한 걸음 속에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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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열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용이 잘 안 되는 것.
진리나그네 06-03-16 00:34
진리나그네 06-03-16 00:34
삶에 열정이 너무 없습니다.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두렵네요. 또 큰일을 해보려고 하면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리고 제가 수용이 잘 안 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고문에 대한 것입니다. 고문에 대한 이런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것이 존재했다는 거 자체를 수용을 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리고 제가 수용이 잘 안 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고문에 대한 것입니다. 고문에 대한 이런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것이 존재했다는 거 자체를 수용을 하기가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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