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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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8,779회 작성일 06-05-24 09:45본문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수행(修行)'이라 이름하니 그런 분별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 하면 지금의 부족과 결핍과 허물을 (어떤 방법과 체계와 프로그램을 통하여) 채우거나 닦음으로써 보다 더 낫고 충만하며 완전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하지요. 이를 달리 말하면, 번뇌(煩惱)를 버리고 보리(菩提)로, 중생(衆生)을 버리고 부처[깨달음]로, 마음의 구속을 버리고 자유에로 나아가려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 하면 지금의 부족과 결핍과 허물을 (어떤 방법과 체계와 프로그램을 통하여) 채우거나 닦음으로써 보다 더 낫고 충만하며 완전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하지요. 이를 달리 말하면, 번뇌(煩惱)를 버리고 보리(菩提)로, 중생(衆生)을 버리고 부처[깨달음]로, 마음의 구속을 버리고 자유에로 나아가려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할 것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수행을 통하여 '지금의 부족'을 버리고 '미래의 완전'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정지하라구요. 왜냐하면, '지금'이니 '미래'니, '부족'이니 '완전'이니, '번뇌'니 '보리'니, '중생'이니 '부처'니 하고 구분하고 나누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미망(迷妄) ―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잘못된 생각 ― 인데, 그것이 미망임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미망을 따라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취하려고 애를 쓰니, 저는 자꾸만 "이제 그만 그 헛된 노력을 정지하라", "마음을 쉬어라", "그쳐라[止]"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정지하라", "그쳐라"라고 하더라도 이미 오랫동안 허망한 '완전'을 향하여, '깨달음'을 향하여 끊임없이 취사(取捨)하며 나아가는 것이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것'에 멈추고[止] 머무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수행'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완전'과 '깨달음'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것 속에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지[止]의 노력'조차 님께서 '수행'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름의 '수행' 혹은 '노력'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진실로 자유케 하고 해방케 하는 '수행' 혹은 '노력'이 있는 반면, 우리로 하여금 끝없고 끊임없는 '수행' 혹은 '노력'으로만 몰아갈 뿐 단 한 톨의 진정한 평화도 쉼도 주지 못하는 '수행' 혹은 '노력'도 있다는 것이지요.
님이여.
우리가 진실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마음의 모오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수행'이라 하든 '노력'이라 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임제 스님의 말씀도 결국은 이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 * *
안녕하세요
크로스 06-05-22 17:22
김기태님의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다가 문득 의문이 생겨 질문 올립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1. 김기태님께서는 수행이 불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곳에 계신 분들도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김기태님께 자신의 불안을 상담해 오면 김기태님께서는 그들에게 "불안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말고 한 달 정도만 그 불안 속에 온전히 머물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불안 속에 머무르는 연습을 한 그 사람이 "그래도 불안한데요?"라고 다시 상담을 해오면 김기태님께서는 "한 달만 더 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것도 수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온전히 머물기' 수행이라고 할까요? 온전히 머무는 게 잘 안되니까 자꾸자꾸 연습(수행)을 하는 게 아닌지요? 그게 빨리 되는 사람도 있고, 몇 년이 지나도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묵조선으로 보입니다만……. 김기태님께서 사람들에게 권하고 계시는 이 방법이 수행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라면 "수행은 불필요하다."라는 김기태님의 말씀은 철회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요?
2. '수행은 불필요하다'라는 명제를 강조하기 위해 김기태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임제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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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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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임제는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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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流야 莫認著箇夢幻伴子하라 遲晩中間에 便歸無常하나니 向此世界中하야 覓箇什 物作解脫고 覓取一口飯喫하고 補 過時하야 且要訪尋知識이요 莫因循逐樂하라 光陰可惜이니 念念無常하야 則被地水火風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이니라 道流야 今時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하야 免被境擺撲이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 덧없음[無常,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겠느냐? 그저 밥 한술 찾아먹고 누더기를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 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참문(參問)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즐거운 일이나 쫓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라. 순간순간 덧없이 흘러가서 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변화에 쫓기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지수화풍과 생주이멸의 형상 없는 경계를 잘 알아서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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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글은 수행하지 말라는 얘기고, 두 번째 글은 수행하라는 얘기입니다. 김기태님께서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써놓고 보니 김기태님께 딴지를 거는 듯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추호도 그런 뜻이 없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제 머릿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해결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크로스 06-05-22 17:22
김기태님의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다가 문득 의문이 생겨 질문 올립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1. 김기태님께서는 수행이 불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곳에 계신 분들도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김기태님께 자신의 불안을 상담해 오면 김기태님께서는 그들에게 "불안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말고 한 달 정도만 그 불안 속에 온전히 머물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불안 속에 머무르는 연습을 한 그 사람이 "그래도 불안한데요?"라고 다시 상담을 해오면 김기태님께서는 "한 달만 더 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것도 수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온전히 머물기' 수행이라고 할까요? 온전히 머무는 게 잘 안되니까 자꾸자꾸 연습(수행)을 하는 게 아닌지요? 그게 빨리 되는 사람도 있고, 몇 년이 지나도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묵조선으로 보입니다만……. 김기태님께서 사람들에게 권하고 계시는 이 방법이 수행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라면 "수행은 불필요하다."라는 김기태님의 말씀은 철회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요?
2. '수행은 불필요하다'라는 명제를 강조하기 위해 김기태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임제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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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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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임제는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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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流야 莫認著箇夢幻伴子하라 遲晩中間에 便歸無常하나니 向此世界中하야 覓箇什 物作解脫고 覓取一口飯喫하고 補 過時하야 且要訪尋知識이요 莫因循逐樂하라 光陰可惜이니 念念無常하야 則被地水火風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이니라 道流야 今時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하야 免被境擺撲이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 덧없음[無常,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겠느냐? 그저 밥 한술 찾아먹고 누더기를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 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참문(參問)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즐거운 일이나 쫓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라. 순간순간 덧없이 흘러가서 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변화에 쫓기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지수화풍과 생주이멸의 형상 없는 경계를 잘 알아서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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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글은 수행하지 말라는 얘기고, 두 번째 글은 수행하라는 얘기입니다. 김기태님께서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써놓고 보니 김기태님께 딴지를 거는 듯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추호도 그런 뜻이 없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제 머릿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해결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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