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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족보(族譜) 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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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댓글 0건 조회 8,592회 작성일 06-02-0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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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족보(族譜) ㅡ (1)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예수의 족보(族譜)가 나온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읽어봄으로써 그 안에 감추인 놀라운 비밀과 넉넉함들을 우리 자신을 위해 한 번 캐내어 보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성경을 읽고 싶어서, 특히 한 위대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 예수의 생애와 행적(行蹟)과 말씀을 읽고 싶어서 문득 신약성경을 펼치면 맨 먼저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래서 “흐음!” 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마음을 다잡고 이제부터 펼쳐질 예수의 세계(世系)를 찬찬히 읽어나갈라치면 곧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하며 마흔 두 번이나 되풀이 되는 ‘…낳고’와 생소한 이름들에 그만 지쳐 버리기가 일쑤이다. 그래서 미처 채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며 성경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듯, 이 ‘…낳고’를 넘어서 예수의 탄생까지 읽어나가는 데에도 사실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요한복음 14:6), 하나님의 아들인(마가복음 1:1) 예수가 탄생하기까지의 이 ‘…낳고’의 족보(族譜) 속에는 참으로 놀랄만한 비밀과 따뜻함과 위로와 넉넉한 여백들이 가득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얼마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푸근하고 또한 안심이 되는지! 그러므로 이제 그것들을 한껏 퍼내어 우리 모두를 위하여 흡족히 나누어보고 또한 마음껏 마셔 보자.
 
    그런데 얘기를 해나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가 탄생하기까지의 이 오랜 족보 속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나는 단지 그 사람들의 생애담(生涯談)이나 혹은 예수가 이런저런 계보(系譜)를 통하여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예수의 족보’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를 통하여 내가 정작 말하고자 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족보’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족보’이다. 즉, 이 이야기 속에서의 주인공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알고 또 예수를 알았다 하더라도 정작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앎들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여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유리(遊離)된 채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또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에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있다면 족보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얘기와 계보들이 어떠하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오직 이 ‘예수의 족보’를 통하여 ‘나’는 누구이며, 동시에 ‘진리’란 무엇인가?’를 밝혀보고 싶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온갖 얘기들이 이 ‘예수의 족보’ 안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 속에는 감탄하고 탄복할 만한 얘기들도 있지만, 혀를 내두르고 손가락질하며 구토를 일으킬 만한 사람과 사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사람들의 얘기를 단지 그들만의 얘기로 대상화하여 읽지 말고, 때때로 ‘나’ 자신에게로 돌이켜 ‘내’ 안에도 그들과 똑같은 마음의 속성들이 낱낱이 들어있음도 한 번씩 들여다보자. 그리하여 ‘예수의 족보’가 사실은 ‘내 마음의 족보’이며, 따라서 ‘예수의 족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내 마음’을 읽고 있음도 때때로 깨닫자. 나는 그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치졸했던 내 마음의 얘기도 적나라하게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의 족보’ 곧 ‘진리의 족보’ 안에서의 일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하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연유는 글의 말미에서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예수의 족보 속에서 하나님[진리]의 우리 모두를 향한 엄청난 사랑을 느낀다. 나는 그 사랑을 한껏 나누고 싶은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말할 땐 언제나 그렇게 부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義)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義)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어다.”(갈라디아서 3:6∼7) 라는 말씀처럼,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義)로 여기셨으며, 그럼으로써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라고 하셨을 때, 그의 나이 이미 칠십오 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더욱 막막하고 불안한 걸음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말 않고 그 말씀을 좇아 오랫동안 의지하며 안정되게 살아온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과 생업(生業)을 버리고 떠날 만큼 큰 ‘믿음’이 있었고, 그의 조카 롯이 소돔땅에 거하고 있을 때 전쟁에 휘말려 재물을 모두 노략질 당하고 사로잡혀 갔을 때에도 고작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가서는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창세기 14:16)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강한 ‘힘’도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이윽고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유황과 불로 멸하려 하실 때에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주께서 의인(義人)을 악인(惡人)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城) 중에 의인 오십(五十)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그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公義)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세기 18:23∼25)라고 거듭거듭 따질 만큼 절절한 ‘자비심(慈悲心)’과 ‘사랑’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늘그막에 100세가 되어서야 낳은 귀하디귀한 아들인 이삭을 어느 날 하나님이 난데없이 번제(燔祭) —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올렸던 제사의 한 가지. 제물(祭物)을 통째로 불에 태우는 제사를 말한다 — 로 바치라 했을 때에도, 그는 오히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창세기 22: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곳에 이르러서는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壇)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세기 22:9∼10)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헌신(獻身)’의 마음도 깊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시시로 때때로 그에게 임하여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2∼3)라며 복을 주고 또한 축복하기를 거듭하셨으니, 그의 완전함과 충만함이야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런 그에게서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무지 어떤 자그마한 부족과 결핍과 허물도 발견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약함과 두려움과 비겁과 비열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신(不信)까지도 그 삶 속에 짙게 드러나 있음을 본다.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길을 나서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한 때 기근(饑饉)을 피하여 애굽 땅으로 내려갈 때의 일이다. 이때 그는 문득 길 위에서 자기 아내 사래 — 나중엔 그 이름이 ‘사라’로 바뀐다 — 를 돌아보며,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 12:11∼13)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 땅을 지날 때에 애굽 왕 바로는 사래가 아브라함의 여동생인 줄 알고 그의 미모(美貌)에 반한 나머지 그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고, 대신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낙타]로써 후대(厚待)하게 된다.
 
    아니, 세상에! 자기 살겠다고, 자기가 죽을까 두려워, 자기 마누라를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비열하게 여동생이라고 말하게 하고는 그럼으로써 선선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게 하다니! 더구나 제 한 목숨 건지려고 벌벌 떨며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아내로서의 사래의 실망과 낙담은 얼마만 했겠으며,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끌려들어가야만 했던 사래의 처참한 심정은 또한 어떠했겠는가. 아, 거기 어디에도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그득하고 굳건하며 믿음직스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에 바빠 옹색하게 떨고 있는 한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일의 연유를 알게 된 바로왕으로부터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창 12:18∼19)라는 심한 책망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내를 되돌려받는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寓居)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取)하였더니……”(창 20:1∼2)라는 기록에서도 보듯, 또 한 번 더 그 부끄러운 짓을 되풀이 한다. 이때에도 그는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사라를 되돌려 주는 아비멜렉왕에게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창 20:11) 두려워 그리 했노라며, 겁에 질린 채 궁색하고도 초라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상(異常) 중에 임하여 그를 축복하며 말하기를,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賞給)이니라……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列國)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라며, 그에게 마침내 아들이 날 것을 예언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心中)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 17:17)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비웃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아내 사라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서자(庶子)를 낳고 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하여 그 믿음을 의(義)로 여김을 받으며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그였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도 또한 나약하고 겁 많으며, 실수 많고 허물 많고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진리’인 예수의 계보(系譜)를 잇는 그 맨 처음에 보란 듯이 올려져 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동시에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들을 나는 ‘예수의 족보(族譜)’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그 삶들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결국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바른 이해들을 갖게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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